인내심이 탈탈 털린 날

공공의 공간에서 사라진 품격

by 기록습관쟁이

아파트 버스를 타기 위해 줄을 섰다. 그날은, 나의 인내심이 탈탈 털린 날이었다.


부산은 도시 절반 가까이가 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가 사는 아파트도 백양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번화가인 서면과 그리 멀지 않지만, 대중교통은 영 불편하다. 지하철역은커녕 가파른 경사 탓에 걷는 것도 만만치 않아 자가용은 필수다.


그래서인지 아파트에선 소형 버스를 운행한다. 지어진 지 오래된 아파트라 어르신들 비중이 높은 것도 이유일테다. 자가용으로 출퇴근하다가 이직 후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매달 관리비에서 나가는 버스 운임료가 아까워서라도 아파트 버스를 더 열심히 타게 된다.


여느 때처럼 서면에서 아파트 버스를 기다렸다. 내 뒤로는 시장을 보고 온 듯 양손 가득 짐을 든 아주머니들이 줄을 서 있었다. 퇴근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점점 불어났다.


버스가 도착하자, 나는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뒤에 있던 아주머니들이 일사불란하게 버스로 달려드는 게 아닌가. 순식간에 나는 맨 뒤로 밀려났다. 황당했다. 자리에 앉으려고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밀고 당기는 모습은 흡사,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 같았다. 그들은 서로 실랑이를 벌였고, 나는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도대체 누가 대한민국이 선진국이라고 했던가. 내가 보기엔 한참 멀었다.


거의 마지막에 탑승했지만 운 좋게 한자리가 비어 있었다. 좌석 밑으로 버스 뒷바퀴가 있어 다리를 펴기 불편한, 소위 '꽝'자리였다. 왜 비어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앉을 수 있다는 생각에 속으로 '운이 좋군!' 하며 기분 좋게 버스는 출발했다.


옆에 앉은 아주머니는 전화를 받은 건지, 건 건지는 모르겠지만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통화를 시작했다. 목청이 어찌나 크던지 버스 안이 다 울릴 지경이었다. '공공장소니 안부 정도 묻고 끊겠지 뭐' 속으로 그녀를 이해하려 애썼다. 하지만 아주머니는 통화를 끊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바로 옆에 그 소음을 듣는데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듣고 싶지 않아도 통화 소리가 귓속으로 고스란히 들어왔다. 그래, 그럴 수 있다고 치자. 도대체 무슨 대화를 하는 걸까. 한 번 들어나 보자.


"오랜만에 영화를 봤는데 말이야. 누가 나왔고 어쩌고저쩌고..."

"그 사람은 왜 그런다니? 어쩌고저쩌고..."

"요즘 날씨가 너무 더워 죽겠어! 어쩌고저쩌고..."

그렇게 이어지는 수다에 나는 점점 지쳐갔다.


서로의 안부가 궁금하겠지만, 대화의 90%는 무의미했다. 도대체 왜? 일부러? 공공장소에서? 좁은 공간 안에서 굳이 저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저런 대화는 집에 가서 해도 충분하잖아? 버스 안 곳곳에서 사람들은 내 옆자리 아주머니를 흘깃흘깃 쳐다봤다. 아마 속으로 한 마디씩은 했을 거다. 나는 곧바로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크게 틀었다.


무더운 날씨만큼, 아니 그보다 더 불쾌했다. 버스 타기 전부터 이미 그랬다. 정류장에서는 탑승질서라곤 찾아볼 수 없었고, 서로 밀쳐내며 타기 바빴다. 아이들도, 청소년들도 함께 버스를 이용하는 이 공간에서 솔선수범이란 없었다. 아마 그 단어를 인생에서 지워버린 것 같았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가슴이 답답했다. 나는 성인군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절대적 다수에 의해 소수가 피해받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멋진 어르신들도 보았기 때문이다. 젊은 친구들에게도 자리를 양보하고 (물론 그 친구들이 넙죽 받지 않는다), 온화한 미소를 가진 분, 느긋하고 여유로우며 품격 있는 분, 잘잘못을 콕 집어 공공세대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는 분. 이런 분들을 보아왔다. 하지만 불쾌한 다수에 의해 이분들의 이미지마저 덩달아 흐려진 건 아닐까. 그저 오류의 일반화일까. 40대를 훌쩍 넘긴 나조차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 도시는 늘 빠르게 흘러간다. 사람도, 버스도, 말도 그렇다. 그 안에서 나는 어떻게 나답게 살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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