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집은 감가상각 중입니다

웃프게 10년, 내가 레버리지다

by 기록습관쟁이

인스타그램 피드를 넘기다 보면, 눈부신 신축 아파트들이 나를 압도한다. 하얀 대리석 바닥은 광택을 뿜어내고, 실링팬은 우아하게 돌아간다. 포르투갈산 타일은 이국적인 감성을 더하고, 음식물 쓰레기는 자동 배출 시스템이 알아서 처리한다. 웬만한 공항보다 스마트하다는 말, 과장이 아니다. 미래 도시의 축소판 같은 그곳은, 그저 머무는 공간을 넘어선 선망의 대상이다. 그에 비하면 내 집은 스마트함 대신 감성으로 가득하다. 비 오는 날 천장에서 '틱틱'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는 몽환적인 앰비언스를 선사하고, 한겨울에도 베란다 창문 틈새로 스며드는 바람은 바깥공기를 섬세하게 전달해 준다. 에너지 절약이냐고? 아니다. 그냥 보일러가 제 기능을 못할 뿐이다. 어쩌면 이 집은, 요즘 젊은 세대가 열광하는 힙한 레트로 감성을 의도치 않게 구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낡음과 불편함이 주는 특유의 정취, 완벽하지 않음에서 오는 인간적인 매력 같은 것 말이다.


이토록 정감 넘치는, 아니 솔직히 말하면 낡고 노후된 이 구축 아파트에 산 지 벌써 10년이 되었다. 물론 자의는 아니었다. "아직이라도 사야 한다"는 주변의 공포와 조급함에 떠밀려 계약서에 서명했고, 대출은 마치 축복처럼 내 삶에 따라붙었다. 당시엔 '영끌'이라는 말이 지금처럼 흔하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영혼까지 끌어모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치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에서 이순신 장군이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에 몸을 맡기듯, 나 역시 부동산 광풍이라는 거대한 파도에 휩쓸린 것이었다. 은행은 나보다 내 월급날을 잘 기억하고, 나는 은행보다 내 이자율을 더 잘 외우는 지경에 이르렀다. 내 신용등급은 은행 앱 푸시 알림만큼이나 자주 확인하는 일종의 생활 습관이 되어버렸다.


요즘 부동산 유튜브는 온통 신축 아파트 찬양 일색이다. "10년 안 된 아파트 아니면 투자 가치 없다!" "이제 구축은 버려라!" 이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나는 스스로를 쓰레기 취급하는 기분이 든다. 정확히는 내 집이 쓰레기라니, 나도 같이 묶이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든다. 마치 내가 살고 있는 공간이 내 존재 가치를 규정하는 듯한, 지독한 자본주의의 속삭임에 시달리는 기분이다. 씁쓸함은 물론이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좌절감까지 밀려온다.


그런데 웃긴 건, 이 집조차 당시엔 무리였다는 사실이다. 은행 창구에서 서류를 내밀며 떨리는 손으로 서명했던 그날, 나는 기회비용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이 집을 사느라 포기했던 해외여행, 꿈꾸던 새 자동차, 그리고 한창 빛나던 나의 청춘. 마치 박완서 작가의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주인공이 어린 시절의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듯, 나 역시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상실감에 젖었다. 그 시절 나는 지금보다 젊었고, 훨씬 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집이 생기면 삶이 안정되고, 미래가 보장될 것이라는 낭만적인 착각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더 차가웠다. 집값은 떨어졌고, 나는 계단을 오르다 무릎이 시큰거릴 때마다 생각한다. "그래, 이 집도 나랑 같이 늙는 거지 뭐..." 한때는 "대출은 레버리지"라는 말을 굳게 믿었다. 내가 갚는 게 아니라 '오른 집값'이 대신 갚아준다고들 했다.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집을 샀다가 지금은 내가 갚고 있다. 레버리지는 무슨. 김애란 작가의 <비행운>에 나오는 청년처럼, 지금의 나는 허리를 부여잡고 간신히 버티는 중이다. 마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곡예사처럼, 은행과 집값 사이에서 위태롭게 균형을 잡고 있다. 혹시라도 한 발짝이라도 삐끗하면 그대로 추락할 것 같은 아찔한 긴장감 속에서 매일을 살아간다.


부업을 시작했다. 퇴근 후에는 글을 쓰고 제품 리뷰를, 주말에는 체험단, 각종 사진 공모전에 도전한다. 몸은 고되지만, 그래도 숨통은 트인다. 마치 낡은 자전거의 체인에 기름을 치듯, 팍팍한 삶에 윤활유를 바르는 기분이랄까. 이쯤 되면 집이 아니라 내가 레버리지다. 과거 홍상수 감독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소시민 캐릭터들처럼, 나 역시 삶의 무게에 짓눌려 발버둥 치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그들은 늘 술잔을 기울이며 현실은 한탄하지만, 결국 다시 삶으로 돌아와 묵묵히 버텨낸다. 나 역시 그들처럼, 이 버티는 삶 속에서 나름의 의미를 찾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주변 친구들은 "차라리 전세로 옮기는 게 낫지 않냐"고 묻기도 한다. 하지만 전세는 또 어떤가. 전세사기니 깡통 전세니 하는 뉴스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내 집이 아무리 낡았어도 내 명의라는 사실은 작은 위안이 된다. 비록 그 위안이 매달 날아오는 이자 고지서 앞에서 한없이 작아질지라도 말이다. 마치 사막 한가운데서 작은 오아시스를 발견한 듯한 느낌이랄까. 갈증은 여전하지만, 그래도 살아갈 힘을 얻는 그런 기분.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든다. '왜 집이 꼭 있어야 하지?' 정답은 없다. 하지만 정답 같은 말은 넘쳐 난다. "집은 자산이다.", "내 집은 사는 게 아니라 사두는 거다.", "사는 순간 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이제는 그런 말을 들으면 그저 웃음만 나온다. 팔고 싶어도 살 사람도 없다. 내 집은 요즘 무순위 청약도 외면하는 수준이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낡은 서점의 먼지 쌓인 책처럼 말이다. 아니, 그보다 더 처량하게, 재개발 구역에 포함되지 못한 채 홀라 남겨진, 시간이 멈춘 듯한 옛 건물 같은 느낌이다. 누구도 탐내지 않는, 오직 나만이 그 가치를 아는 그런 곳.


하지만 웃기게도, 이 집이 싫지 않다. 샤워기 수압은 약하고, 겨울이면 베란다 창문을 통해 혹한기급 냉기가 들어오지만, 그래도 여긴 내가 돌아오는 곳이다. 10년 동안 아내와 싸우고 화해했던 기억도, 아이가 밤새 열에 시달려 울던 밤도, 그리고 초코가 곳곳에 물어뜯은 몰딩도 모두 이 집구석구석에 스며 있다. 거실 벽에 붙여 놓은 대형 세계 지도, 주방 냉장고에 달려있는 수십 장의 사진들과 싱크대 상판에 김치 국물이 배어든 자국까지. 이 모든 것이 내 삶의 연대기이자, 고스란히 쌓인 시간의 층위다.


그러니까 이 집은 말하자면, 감가상각 중인 자산이 아니라, 감정이 축적된 공간이다. 마치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오래된 일기장처럼, 이 집은 내 삶의 기록이자 추억 그 자체다. 이성복 시인의 표현처럼,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다 병든 것이다"라는 말처럼, 어쩌면 이 낡은 집은 나의 삶의 불완전함과 아픔을 그대로 끌어안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도 웃는다. 코팅이 벗겨진 싱크대 앞에서, 틈새로 물이 새는 베란다 창문 앞에서. 이 집, 참 어이없게도 애틋하다. 이 애틋함은 단순히 물질적인 가치를 넘어선, 삶의 깊은 의미와 연결되어 있다. 부동산 시장의 논리나 타인의 시선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나만의 소중한 안식처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이 애틋한 공간에서 나의 감가상각 되는 삶을, 그러나 감정으로 충만해지는 나의 나날을 살아간다. 어쩌면 이 집은 나에게 "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진실된 답을 매일매일 알려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집은 낡아가고, 나는 자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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