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나이의 몫
새벽 1시 취침, 오전 6시 기상. 5시간의 짧은 잠은 마치 어제 빌려 쓴 에너지처럼 오늘 하루 내내 짓눌렀다. 세상 떠난 고인을 기리기 위해 상갓집에 다녀온 뒤, 초복이라는 핑계로 지인 가족과 오리백숙에 백세주, 맥주를 가차 없이 들이켠 탓이 컸다. 빈말이 아니다. 다들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은가. (초복 핑계다) 이야기꽃을 피우고 웃음꽃을 터뜨리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자정을 훌쩍 넘겼다. "아, 내일 출근인데..." 하는 죄책감은 잠시, "오늘 아니면 언제 이렇게 실컷 회포를 푸나!" 하는 악마의 속삭임에 흘러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집에 돌아오니 우리 집 털북숭이 상전, 초코는 "왜 이제 왔냐!"는 듯 눈을 번쩍이며 꼬리를 미친 듯이 흔들어댔다. 그 눈빛에 홀려 밤 산책까지 마치고 침대에 털썩 누우니, 맙소사, 시간은 이미 새벽 한 시를 넘어 있었다. '아, 망했다' 이 짧은 감탄사가 내일을 완벽히 예언하고 있었다.
그 여파는 고스란히 이어졌다. 생산적이어야 할 오전 시간은 수백 번의 하품으로 채워졌고, 점심 식사 후에는 눈꺼풀에 무게추라도 단 듯 천근만근이었다. 정신은 멍하고, 집중은 안 되며, 모니터 화면은 자꾸만 이중으로 보이는 기적을 경험했다. 도대체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저 책상 앞에 몸만 앉아 있었던 기분이다. 마치 하루치 에너지를 대출받아 쓰고, 그 이자를 제정신으로 갚고 있는 듯한, 처절한 영혼의 빚잔치를 벌였다. 아마 지금쯤 내 영혼은 마이너스 통장을 넘어선 신용불량자 상태가 아닐까 싶다.
20대에는 잠을 줄이면 시간이 늘어난다고 굳게 믿었다. 심지어 '청춘은 잠을 줄여서라도 꿈을 좇아야 한다'는 말이 유행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때 나는 "잠은 사치! 젊음은 열정!"을 외치는 투사 같았다. 성공한 사람들 일상 루틴을 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아침 4시 기상", "5시 기상 독서", "새벽 기상 러닝" 같은 문구들은 내게 일종의 강박을 심어주었다. 애플 CEO 팀 쿡이 새벽 3시 45분에 일어난다는 이야기나,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가 하루 6시간 이하의 수면을 고수한다는 이야기는 '나는 왜 이렇게 잠을 자야만 버틸까?', '잠도 능력인가?' 하는 자괴감을 안겨주기도 했다. 마치 내가 잠꾸러기라서 성공하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졌달까?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분위기가 달라졌다. 잠을 줄이는 것이 더 이상 자랑이 아닌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 (야호! 이제 변명거리가 생겼다!) 오히려 잠을 충분히 자는 것이 성과와 창의성에 도움 된다는 연구 결과들이 쏟아지고 있다. 애플워치나 스마트워치가 수면 데이터를 수집하고, 기업들은 직원들 수면 건강을 챙기기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한다.
물론 토마스 에디슨이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짧은 수면과 다단잠'을 실천했던 천재들도 있었다. 그분들은 정말 신이 내린 생체 리듬의 소유자라고밖에 볼 수 없다. 하지만 반대로 아인슈타인은 매일 밤 10시간씩 잤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그는 "머리를 많이 쓰는 사람일수록 푹 자야 한다"고 말했다는데, 현대 뇌과학자들의 연구 또한 그의 말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젠 맘 편히 자도 되겠다. 과학자들이 다 허락해 줬다!
나만 이렇게 잠 때문에 빌빌거리는 줄 알았다. 그런데 요즘 같은 팀 동료도 자주 하품을 한다. 아이 셋을 키우느라 밤마다 깨고, 새벽에는 출근 준비를 한다고 한다. 그는 "요즘은 잠이 최고 사치예요"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맞다. 어릴 때는 몰랐다. 가장 값지고, 가장 절박한 자원이 바로 잠이라는 것을.
어떤 육아 에세이에서는 "한 시간이라도 더 자고 싶다"는 말이 아기를 낳은 뒤 가장 자주 하게 되는 말이라고 적혀 있었다. 직장인도, 부모도, 나처럼 반려인도 모두 잠이 부족하다. 아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지금쯤 하품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누구나 피곤한 이유가 있고, 그 이유만큼이나 각자의 침대는 언제나 그리움의 대상이다.
그리고 이 피곤함이 단순히 육체의 피곤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는 몸으로 실감한다. 잠이 부족한 날은 기분도 날카로워지고, 작은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한다. 뇌는 마치 톱니바퀴가 닳아버린 것처럼 느려지고, 사고는 좁아진다. 창의성은커녕 실수 줄이기에 급급해진다. 상사에게 개기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고, 동료의 사소한 농담에도 정색하며 싸늘한 분위기를 만들곤 한다. 단순히 '졸리다'는 감각을 넘어, 생산성, 감정, 심지어 인간관계까지 영향을 미치는 피곤함인 것이다. 이쯤 되면 잠 부족은 인성 문제라는 말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이런 경험들을 통해 깨닫는 건, 결국 '나이의 몫'이라는 것이다. 젊을 때는 밤새 놀아도 다음 날 몸이 알아서 회복시켜 주곤 했으니까. 마치 무한 충전 배터리처럼 하루를 기울이듯 써도 괜찮았다. 그런데 이젠 다르다. 하루를 무리하면, 이틀이 힘들다. 어제 늦게 잤다면 오늘은 물론, 내일마저 흐릿하다. 잠은 하루 단위로 정산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연체되는 체력 통장 같다. 이자가 어마어마하게 붙는, 아주 악질적인 통장인 거다.
이제는 7시간은 자야 거뜬한 나이가 되었다. 잠을 충분히 자는 것이 미덕이고, 체력을 관리하는 것이 곧 일의 연장선이다. "건강도 능력이다"라는 말이 요즘처럼 절절하게 와닿는 때가 없다. 옛날 어르신들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건강하다"고 하셨을 때, 그저 잔소리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보니 지혜로운 선배님의 뼈 때리는 조언이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시간은 밤 10시 30분. 초코는 벌써 케이지 안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다. 저 녀석은 잠자는 시간만큼은 나보다 훨씬 낫다. 부럽다, 초코야. 나도 오늘만큼은 스마트폰을 멀리하고, 눈을 감아야겠다. 하루치 에너지를 '대출'하지 않아도 되는 하루가 일주일에 단 하루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당신도. 오늘 하루 많이 피곤했을 당신도 부디 잘 자길. 그게 제일 중요하니까. 우리는 잠을 자고 일어나야 비로소 내일을 살아갈 수 있다. 혹시 이 글을 새벽에 읽고 있다면, 당장 폰을 내려놓고 침대로 향하시길! 당신의 꿈은 침대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