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오리알 신세
12년 만에 돌아온 본업 하지만 그의 앞에 기다린 건 환영이 아닌, 낙동강 오리알의 운명이었다.
그는 오랜 방황 끝에, 마침내 본업의 세계로 돌아왔다. 요식업 매니저로 굵직하게 쌓아 올린 경험은 분명 값진 자산이었지만, 그의 안에는 늘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었다. 손끝으로 기계를 만지고, 복잡한 회로를 해석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희열. 그것이 바로 그가 진정으로 원하던 삶이었다. 마침내 그 길로 돌아온 그는, 새로운 시작을 축복해 주듯 완벽해 보이는 회사에 입사했다.
"저희 회사는 김 차장님처럼 실력 있는 분을 간절히 기다려 왔습니다."
면접 자리에서 대표이사가 그에게 건넨 말은 단순한 인사치레가 아니었다. 대표는 그의 지난 경력을 높이 평가했고, 1년 뒤에는 현장 관리 책임자라는 중책을 맡겨줄 것이라 약속했다. 대표의 눈빛에는 확신이 가득했고, 그는 그 믿음에 보답하리라 굳게 다짐했다. 이제껏 쌓아온 모든 경험과 열정을 쏟아부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첫 1년은 약속대로 흘러갔다. 선임자인 강 부장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현장 구석구석을 익혔다. 지하 깊숙한 곳 배전반부터, 거대한 건물을 지탱하는 환풍 시스템까지. 매일 새로운 지식과 정보가 쏟아져 들어왔다. 강 부장은 겉으로는 무뚝뚝했지만, 틈틈이 그에게 중요한 노하우를 전수해 주었다. 그는 1년 뒤에 이 모든 것을 책임질 상상에 들떴다. 마치 보물 지도를 손에 쥔 탐험가처럼, 그는 곧 펼쳐질 미래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러나 그 희망은 정확히 1년 만에 산산조각 났다. 2년 차가 되어도 그의 역할에는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강 부장을 따라다니는 보조 엔지니어에 불과했다. 경력직이었지만, 하는 일은 신입직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게 맞나?'라는 의문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기 시작했다. 대표이사와 나눈 면담 내용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약속과 현실의 괴리 앞에서 그는 점점 길을 잃어가는 기분이었다.
참다못해 그는 대표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그의 마음속에는 쌓여온 답답함과 함께, 어쩌면 오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한 줄기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그 희망은 면담 시작 10분 만에 산산이 부서졌다. 대표는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음, 사실 말이야... 김 차장님을 현장 책임자로 앉히는 건 내 개인적인 생각이었네. 강 부장이나 부서장은 이 계획을 전혀 모르고 있었어."
그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한순간에 그는 철저하게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 그는 오지도 가지도 못하는, 철저하게 고립된 존재였다. 대표이사와 그의 약속은 그들만의 리그였고, 그는 거기에 초대받지 못한 유일한 손님이었다.
그날 이후, 그는 깊은 절망감에 빠졌다. 출근하는 발걸음은 천근만근이었고, 하루 종일 그의 머릿속에는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라는 질문이 맴돌았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그가 이직을 위해 쏟았던 노력, 그리고 가슴속에 품었던 뜨거운 열정까지 모두 허무하게 느껴졌다.
이런 상황은 비단 그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의 주위에도 비슷한 경험을 한 이들이 많았다. 대기업에서 임원 자리를 약속받고 스타트업으로 이직했던 그의 지인은, 막상 가보니 '실무자' 역할만 주어져 좌절감을 맛보았다. 또 다른 친구는 '자율적인 근무 환경'이라는 말을 믿고 회사를 옮겼지만, 막상 가보니 윗선에 모든 것을 보고해야 하는 경직된 문화에 질식할 뻔했다고 했다. 그들은 모두 '낙동강 오리알'이었다. 기대라는 강물에 발을 담갔지만, 결국 낯선 물 위에서 혼자 표류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며칠간의 방황 끝에 그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그는 인생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12년의 시간 동안 몸소 배웠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 틀어졌을 때, 멈출 것인가 아니면 다시 나아갈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그는 다시 나아가기로 결심했다.
먼저,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냉정하게 분석했다. 그는 현장 책임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경력과 능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엔지니어였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회사에 머물러야 하는가?'라는 질문 대신, '나는 어떤 엔지니어가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집중했다.
그는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 부장에게 직접 다가가 자신의 역할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현장 개선 방안을 제안했다. 처음에는 강 부장도 경계하는 눈치였지만, 그의 진심을 알아주었다. 그는 작은 프로젝트부터 시작해 점차 더 중요한 업무를 맡게 되었다. 배전반의 노후된 부품을 교체하고, 효율적인 에너지 관리 시스템을 구축하는 등, 그는 단순히 보조 역할에 머물지 않고 그만의 자리를 만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깨달음을 얻었다. 약속된 자리만 바라보다가, 정작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마치 좁은 터널만 바라보며 달리는 기관차처럼, 시야가 좁아져 있었다. 하지만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 강물 위를 떠다니며, 그는 더 넓은 세상을 보게 되었다.
이직의 성공은 약속된 직무를 수행하는 것을 넘어, 예상치 못한 어려움 속에서 나만의 길을 찾아가는 과정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더 이상 그는 누군가의 약속에 좌우되지 않는다. 이제 그만의 길을 개척하는 용기 있는 항해사가 되었다. 12년 만에 엔지니어라는 길로 돌아와 만난 좌절은, 그에게 더 단단한 그 자신을 선물해 주었다. 이제야 비로소 진정한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