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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아 Dec 01. 2023

외할머니

사랑의 백신

나에게는 껌딱지처럼 붙어계신 외할머니가 계셨다.

참빗으로 흰머리를 곱게 빗고 비녀를 꽂아서 단정한 모습의 할머니 시다.

몸이 약하고 내성적인 나를 보호하려고 할머니는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어려서 세 번이나 졸도하면 빙초산을 물에 타서 입으로 뿌려서 살렸다고 한다.

워낙 편식을 하였기에 할머니는 나를 위하여 매일 김치를 담갔다. 

김치를 익혀서 손자가 좋아하는 신 김치를 만들려고 하였던 거다.

나의 식성 때문에 형제들은 불평이 많았다. 

골수 채식주의자로 신 김치, 콩나물, 두부, 비지를 좋아했다.

당연히 돼지고기, 쇠고기, 생선 등 남의 살은 냄새도 맡기 싫어했다. 

내가 만일 할머니에게 "할머니 비지찌개가 맛있어요."라고 하면 

한 달간은 비지찌개가 밥상에 올라온다. 


이렇게 외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나는

국민학교에 입학하여 일주일 동안 학교를 다녀오고 토요일이 되면

초주검이 되어 할머니 무릎을 기대어 쓰러져 버렸다. 

이런 나를 할머니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사랑해 주셨다.

아팠던 몸이 따뜻한 봄볕에 스르르 녹아버려 잠이 들었다. 

아마도 배터리 충전 중이었을 것이다.


외할머니의 과보호 속에서 무사히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친구들이 많지 않아서 집콕 생활을 좋아하는 나에게 형 친구들이

집으로 와서 함께 놀았다. 당시 어머니가 후천적으로 가장이 되어 경제활동을 하여 

나름 먹거리 걱정은 하지 않았기에 집에는 늘 사람들로 북적댔다. 

ㄷ자 형태에 가운데 마당을 끼고 방이 8개 부엌이 6개로 한 지붕에 6 가족으로 

고정 인원수 30명가량과 형 친구, 누나 친구, 내 친구 매일 수없이 사람들이

들락거렸다. 밤에 잠을 자려고 하면 크기와 상관없이 한 방에서

반대로 누워 겨드랑이에 발을 끼고 잠을 잤다. 

개중에는 이쁨 받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할머니에게는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손자 사랑이 있었다. 그래서 저녁에 밥을 지어놓고

황당하게 사람이 몰리면 내 밥을 지키려고 애를 썼다. 

그럴 때면 "할머니, 난 괜찮아요. 아직 배가 꺼지지 않았어요."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양보하면 할머니는 화를 내셨다.


어느 날 나는 친구들과 모여서 음식을 해 먹다가 뒤처리가 안된 냄비를 할머니가 보고

역정을 내셨다. 못마땅하셨나 보다. 그리고 문간방에 세를 들어 사는 아기 엄마 

집에서 티브이를 보시다가 요강에 아기가 본 용변을 처리하려고 

문을 열고 나오는데 갑자기 쓰러지셨다. 

화가 난 상태에서 따뜻한 방안의 열기와 1월 한파 속에 갑자기 접한 찬 공기가

만나서 혈압을 높였나 보다. 

급하게 할머니방으로 옮겨서 자리를 해드리고 

시장에서 장사를 하시는 어머니에게 연락했다. 

한의원의 한의사가 어머니와 함께 왕진을 와서 진맥을 짚어 보더니 <중풍>이라고 한다.

할머니는 안방으로 옮겨 치료를 받았고 어머니가 간호를 하여 

방학 중인 내가 시장에 나가 장사를 도왔다. 사실 도운 것은 아니고 보초를 섰다.

그런데 시장으로 기별이 왔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청계천 5가 시장 좌판에서 창신동 덕산 파출소 위의 집까지는 너무 멀었다.

소리도 못 내고 흐느끼며 집으로 달음질쳤다.

이미 할머니는 숨을 멈춘 후였다. 

너무 속상했다. 할머니의 임종을 못 본 것 때문이 아니라 

이제 난 어떻게 세상을 사나? 하는 생각에 두려웠다. 


사흘간의 장례 절차를 마치고 할머니는 장례 차량에 실려 벽제 화장장으로 갔다.

워낙 존재감이 크신 아버지의 주장에 외삼촌과 다른 친척들은 아버지의 

의견에 밀려 화장을 하기로 하였다. 당시에는 화장이 많지 않았던 터라

그렇게 주장하는 아버지가 미웠다. 뜨거운 불속에 할머니를 넣는다는 게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어렸던 것 같다.

지루한 기다림 끝에 할머니는 몇 안 되는 뼈와 한 줌의 재로 나타났다.

우리는 대성통곡하며 울었다. 특히 외삼촌은 오열을 하며 쓰러졌다.

야속한 땡중은 할머니를 절구에 넣고 빻았다. 

아버지는 강물에 뿌릴 테니 납골당도 필요 없다고 하여 

그 흔한 나무 유골함도 아니고 누런 봉투에 할머니를 담아 건네주었다.

그러면서 극락 영생하라고 한다. 돈을 달라는 뜻인가 보다. 

몇 장의 지폐를 건넨 후 외삼촌은 누런 봉투를 가슴에 안고

화장터가 떠내려가게 울어댔다.

"엉~엉~ 따스한 어머니의 품 같아요. 엉~엉~"

그렇게 나는 눈물을 삼키며 할머니를 강물에 띄워 보냈다.

정월의 한파 속에 할머니는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지금 내 나이보다도 적은 나이에...


지금 나는 66세의 어엿한 가장

"쯧쯧, 쟤가 결혼이나 할 수 있을까?"

"사회생활은 제대로 할지?"

주변에서 염려하고 할머니도 걱정했던

바보 같은 아이가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살아왔다.

사실 나는 우리 아이들을 키울 때에 하나도 염려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 같은 사람도 이렇게 사는데

너희들은 나보다 백배는 낫다. 걱정하지 마, 걱정 안 해"

이렇게 생각하고 말했다. 그래서 진심으로 최고라고 인정하고

축복했다. 

내가 나로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할머니의 <사랑의 백신>이 아닐까?

할머니가 지극 정성으로 사랑하고 감싸주어 어느 순간에 면역력이 생기고

세상과도 부딪쳐 싸울 수 있는 힘이 생겼나 보다. 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한다.

내가 돌아가신 할머니에게 은혜 갚을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우리 자녀들과 주변을 힘껏 사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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