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울프오브월스트리트"(마틴 스콜세지 감독)에서는 주인공 조던 벨포트(디카프리오 분)가 친구이자 사업파트너인 도니 오조프(조나 힐 분)와 저녁을 먹으면서 그가 어떻게 자기 사촌과 결혼을 했는지 묻는 장면이 나온다. 이어서 조던은 도니에게 "아이들이 건강하고 똑똑하냐"고 묻는데, 민감할 수도 있는 질문에 도니는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만약 아이들이 기형으로 태어났더라면 시골마을에 데리고 가 문을 열고 "이제부터 너희들은 자유의 몸이야"라고 말하겠다고 한다.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하는 조던의 얼굴과 수초간의 정적이 흐르고 난 뒤 도니는 '농담이었다. 아이들은 멀쩡하고 만약 문제가 있었으면 센터에 데리고 가서 적절한 치료를 받았을 것이다'라고 말을 덧붙이고 대화는 다른 주제로 옮겨간다.
위 대목에서 도니의 의연한 대답에 당황한 조던의 표정과 정적은 영화를 보는 관객의 반응을 대변한다. 자유와 평등을 모토로 내걸고 인류최초의 근대자유민주주의국가임을 자부하는 미국이지만 스스로 자급자족할 수 없는 약자를 시골마을 한복판에 방임하는 것이 자유가 될 수 없음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고등교육을 받지 않았어도 누구나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다. 아이들을 포함해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한 노인, 임산부, 장애인 등은 스스로 규율을 정하고 지킬 권리인 '자율'을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에 그들이 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비윤리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지가 멀쩡한 성인에게는 이런 방임이 자유가 될 수 있을까?
언뜻 생각했을 때, 방임은 자유와 비슷한 뜻이거나 자유를 보장하는 데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인듯 보인다. 예컨대 12년간의 학교생활을 마치고 대학교에 들어간 새내기의 예를 생각해보자. 인적이 드문 시골마을에서 학교를 다닌 경우가 아니라면, 그는 성인이 되기 전부터 유흥과 밤문화가 주변 어딘가에 항상 존재해왔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주변사람을 통해, 또는 본인이 법을 우회하여 술과 담배를 이미 접했을 수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10시 이후에 노래방에서 쫓겨난 경험, 온라인게임이 꺼졌던 경험이 있을 수 있다. 성인이 되어 자기 신분증을 당당하게 내밀고 소주를 주문하거나 밤늦게까지 게임을 하는 경험은 꿈꿔왔던 자유의 실현처럼 경험될 수 있다. 이 경우, 성인이 되어 누리는 자유는 이전에 구체적으로 금지되었던 특정사항들이 올해, 오늘로써 비로소 허용이 된다는 점에서 '더이상 금지하지 않음'으로 규정된다. 이 때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역설적으로 금지 그 자체이다. 그말인즉, 만약 술담배, 10시 이후 노래방 출입이 처음부터 청소년에게 금지되지 않았더라면, 또는 그것들이 금지되어 있음을 청소년이 애초에 알지 못했다면, 그것이 허용된다는 사실이 자유로서 경험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무엇이 금지되어 있다는 사실은 동시에 그것의 존재와 가능성을 암시한다는 점이다. 필자는 초등학교 1학년때 거실에 틀어져있던 TV에서 우연히 마약복용예방 공익광고를 처음 봤을 때까지 마약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런 것이 세상에 존재하는지조차 알지 못했었다. 그 공익광고 캠페인의 슬로건은 "마약, 그것은 상상조차 하면 안됩니다" 뭐 그런 것이었는데, 당시 나의 반응은 "엄마, 마약이 뭐야?"였다. 엄마는 "약인데 먹으면 안되는 약이야"라고 대답했다. 내가 그때까지 배웠던 많은 개념과 단어들은 특정지칭대상이 있거나 정의가 있었던 반면, 공익광고와 엄마가 나에게 설명해준 마약은 처음 소개될 때부터 형체도 없는 금지사항으로 소개되었다. 마약을 상상하지 말라는 공익광고슬로건은 나에게 마약이라는 것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먹으면 안된다는 말은 곧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먹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최근 북미와 유럽내 사회에서 이슈가 되었던 대마초의 합법화와 더불어 관련산업이 붐을 이룬 것도 이와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다. 대마초 흡연이 일종의 패션아이템과 힙스터문화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아 젊은세대 사이에서 삶의 이상향으로서 자리잡는데에는 그들이 미성년자때에 경험했던 공교육과 미디어 사이의 괴리 혹은 모순이 주요했다. 2010년대 이전 북미 및 서구사회에서는 대마초를 불법마약으로 분류했었고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마약예방교육에도 대마초흡연의 부작용에 대한 경각심을 일으킬만한 내용이 상당부분을 이뤘던 반면 스눕독을 비롯한 2000년대 힙합아티스트들은 대마초흡연을 본인들의 삶의 핵심적인 일부분으로서 미화시켰고, 이들의 음악은 당시 젊은층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오늘날 북미와 서구의 20대, 30대 혹은 밀레니얼들이 오락용 대마초관련 상품의 주소비층을 이루게 된 데에는, 그들에게 있어서 대마초소비가 곧 금지에 대한 저항,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자유의 성취 등으로 직결되는 경험이 되도록 한 사회적배경이 핵심적이다. 북미나 다른 서구사회들에 앞서 80년대부터 일찍이 성인의 대마초흡연을 부분적으로 허용해온 네덜란드에서 오늘날 청소년 및 성인 대마초흡연율이 옆나라의 그것에 비해 현저히 낮게 추산되는 통계를 미뤄보면 사회의 전반적인 "하면 안돼"가 어떻게 '그래도 하고싶은 청개구리들'을 양산하는 시작점이 되는지 유추해볼 수 있다. 네덜란드 공립학교의 마약오남용방지교육은 "하고 싶으면 해. 다만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너희들 본인이 지는거야"라고 말한다.
이 예를 앞서 언급한 시골마을에 방임되는 아이들의 예와 비교해볼 수 있다. 도니의 아이들은 처음부터 시골마을 한복판에 버려지는 것을 이상적인 경험으로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도니가 아이들에게 "시골에 가면 드넓은 광야에서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데, 그것은 너무 위험해서 아직 내가 허락할 수 없다"고 밑밥을 깔아놨다면, 그리고 언젠가 그곳에 데려가서 놀아달라고 조르는 아이들에게 매번 안된다고 했었더라면 이야기가 달랐을까? 어쩌면, 아이들은 금지된 낙원에서 마음껏 뛰어노는 상상을 하고, 답답한 집에서 탈출하는 자유를 꿈꾸며 자라왔을 수도 있다. 만약 도니가 정말로 아이들을 버리는데에 계획적이었다면, 그는 아마 외출금지령을 내리고, 낙원같은 황야벌판을 미화하는 이야기를 주기적으로 들려준 다음, 어느날 그 곳에 데려가서 "오늘 하루는 너희들의 자유를 만끽해!"라고 말하고 떠났을 것이다. 해가 지고 날이 추워지고 배가 고파질 때까지는 아이들도 이것을 마냥 자유로만 경험하지 않았을까?
이해를 돕기 위해 다소 자극적이고 단순한 예들을 다뤘지만, 우리와 가까이 맞닿아 있는 현실은 사실 조금더 복잡하다. 자유라는 개념은 애초에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기 때문에 주변환경과 주어진 조건, 시대상황에 따라서 매번 새롭게 정의된다. 이는 단순히 법적으로 금지된 사항을 논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한 예로, 과거와 요즘의 직장인들이 꿈꿨던/꿈꾸는 자유로운 삶의 이상을 비교해 볼 수 있다. 8,90년대를 20대, 30대로 보낸이들은 충분한 돈을 모아 화목한 4인가족을 일구는 20, 30년 스케일의 장기적인 플랜을 보편적 이상으로 생각했던 반면, 요즘의 직장인들은 자유를 여행, 레저, 바캉스, 음주, 퇴사 등과 연관지어 생각하고, 이는 '오늘 퇴근하고 나서' 또는 '이번 주말', '올해 여름' 등의, 비교적 가까운 시일 내에 계획된다. 안정적인 직장생활과 원만한 조직생활, 가족부양 등의 공동체적인 가치들은 개인의 만족, 유흥, 안식 등의 가치로 대체되었다.
이에 대해서 386을비롯한 기성세대는 최근 "집도 못사고 결혼도 못하는 요즘 애들은 불쌍해"라며 "MZ세대"에 대한 연민의 서사를 만들어 퍼뜨리기 시작했지만, 세계최빈국을 다투던 제3세계국가에서 성장기를 보내고 중저소득국가신분을 벗어나지 못한 중소규모경제에서 청년시절을 이타적으로 살았던 그들이 전반적으로 더 나은 삶을 살았는지는 과연 의문이다. 아무런노력 없이 물질적풍요를 누리고, 80세의 기대수명과 최고수준의 의료복지를 보장받는 세대에게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오늘의 나'를 희생할 것을 요구하는 앞 세대의 윤리는 옛날 거실의 한구석을 차지했던 브라운관TV와 유선전화기만큼이나 멀게 느껴진다. 만약 기성세대의 낡은 가치관에서 흥미로움이 느껴진다면 그건 아날로그-레트로 감성에 대한 미적향수와 호기심정도가 전부일 것이다. 내집마련을 할 수 없다는 절망 역시 내집을 굳이 마련하지 않아도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을 거라는 막연한 희망으로 대체되었다: "결혼도 못하고 내 집도 못산다고? 그럼 돈 모아서 차를 사야지/여행이나 다녀야지". 밖에 나가지 않아도 충분히 뛰어놀 수 있을만큼의 넓은 정원이 있고, 매일 룸서비스와 맛있는 끼니가 제공되는 호텔에서 자라나는 아이에게 외출금지령을 내려도 딱히 크게 아쉬울 것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다만 이러한 삶의 이상향이 장기적인 풍요에 대한 구체적인 비전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당장 눈앞의 이익과 안식만을 추구하는 것에 그치는 점은 우려스럽다. 이전의 직장인들이 회식을 통해서 수년, 십수년짜리의 인맥형성 및 유지를 도모했다면 오늘날의 직장인들은 10부작의 넷플릭스 시리즈를 다보는데에 일주일, 여러시즌이 있는 드라마를 완주하는데에 한두달정도 걸릴 뿐이다. 조직내 명령-복종관계가 퇴근시간 이후로 연장되는 회식자리에 불참함으로써 기성조직구조를 거부하고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여도 이는 "나혼자산다", "혼술, 혼밥"등의 일시적 일탈과 수동적인 자기만족에 그칠뿐 더 나은 가치추구, 대체적 공동체형성이라는 능동적인 이상실현으로 이어지지는 못한다. 이런 변화의 일부분은 세대가 전환되면서 기존의 전통가치가 제한했던 개인성에 대한 추구로 설명될 수 있지만 내집마련, 자아실현 등의 기회가 이전에 비해 줄어든 사회적 흐름 속에서 장기적, 공동체적 목표추구가 자발적으로, 또 선제적으로 단념된 것은 제도적제한에 대한 반항보다는 구조적한계에 대한 순종에 가깝다.
자기계발의 대표적심벌이 된 조던 B. 피터슨
나아가 이런 이상향의 보편화는 고립과 해방, 외로움과 행복의 구분을 모호하게 한다. 옆 사람과 내가 추구하는 목표가 다르고, 경험이 공유될 수 없으며, 장기적인 프로젝트를 도모할 수 없는 환경에서 개개인은 오늘 내가 경험하는 것이 좋은건지 나쁜건지 더 이상 알 방법이 없다. 퇴근시간에 느끼는 일터로부터의 해방은 곧 퇴근길 군중 속에서의 고립으로 이어지고 바쁜 하루를 끝내고 안락한 공간에서 즐기는 와인한잔은 적적한 방 안에서 홀로 켜진 유튜브채널의 외로움과 교차한다. 이러한 경험은 온전히 개인의 것으로 옆사람의 그것과 병치될 수 없다. 본인이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아닌지를 평가할 잣대를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동기부여 자기계발 서적과 소확행을 장려하는 이류 에세이들의 대량공급은 각각 채찍질을 받고 싶은 이들과 고달픈 삶에 대한 정신승리가 필요한 이들의 욕구를 대변하며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디스플레이의 절반이상을 차지한다. 롯데리아 햄버거같은 문학의 대중화는 혼란스러운 나의 오늘에 대한 가치평가를 생판 모르는 캐나다의 어떤 중년남자가 나 대신 해줬으면 하는 바람과 맞물려있다. MBTI와 각종 유사심리학 이론들, 사주 및 타로카드 점의 대중적인기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먼 미래를 내다볼 수 없다는 환경적, 구조적 제한을 능동적으로 타개해 나갈 수 없다는 단념과 삶에 부여할 의미의 부재는 곧 짧은 템포로 연속하는 지금, 순간의 혼란을 대신 해설해줄 서사적권위에 대한 대중적 수요를 낳았다. 그 어느때보다 다양해진 개인의 경험은 손에 꼽는 인기 대중연설가들에 의해 일률적으로 정의되고 지도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기성세대가 일구어놓은 사회구조와 답답한 조직생활로부터의 해방으로써 찾은 개인의 삶과 자율에 대한 꿈은 앞을 볼 수 없음과 지도자에 대한 갈망이라는 암초에 봉착했다. 무엇을 얼만큼 이뤄내야 성취인지 객관적인 기준이 부재한 현실에서 자유는 구체적으로 정의되기 힘들다. 기존규율의 굴레에서 벗어난 오늘날의 자유인들은 새로운 의무와 규율을 누군가 대신 구체적으로 정해주기를 요구한다. 이러한 의무는 이전세대와 달리 사회적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정의되기보다는 개개인의 자유로운 행복추구라는, 결코 덜 추상적일 것이 없는 개념에서 답을 찾는다. 이미 개개인의 가치를 노동의 결과물로서 증명하여 경쟁하는 것이 관습화되어있는 문화적토양에서 공동목표의 부재와 기존 자유주의사회 이념의 해체는 각자의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권리'를 '개인의 행복과 자유로운 삶을 남들에게 증명해야 할 의무와 강박'으로 치환하는 모양새이다. 이전에 경쟁과 시장논리의 영역 바깥에 있던 '사생활'이라는 치외법권은 오늘날 상품화가능한 잠재적경쟁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여행지에 가서 사진촬영에 수시간을 쏟고 어디서 밥을 먹는지 일일이 기록해야 하는 인플루언서에게는 휴식과 안락이 곧 노동이고 경쟁이다. 정확히 말하면, 사생활의 표현과 프레젠테이션의 경쟁이다. 해방의 겉모습을 하고 자율적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자유인의 얼과 넋에는 어쩌면 쉴새없이 자유롭고 행복하기만 할 것을 요구하는 고용주가 내재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