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추장와플 Jul 21. 2024

남의 편과 조선멘탈 아버지, 그리고 끈나시

남의 편과 조선멘탈 아버지의 한판 승부

아버지와 어머니가 벨기에에 오셨다. 결혼식 후, 씨벌개진 눈으로 얼른 들어가라 하며 손을 훠이훠이 저으시던 아버지는 그래도 벨기에에서 어떻게 사는지는 한번 보셔야겠는지 어머니와 함께 오시겠다고 했다. 우리가 당시 살고 있던 곳은, 방한칸에 거실이 있던 아파트로 두 사람의 공간으로는 완벽했으나, 부모님을 모시기엔 프라이버시가 제로였다.


부모님은 결국 벨기에 방문하는 동안 우리 시부모님 댁에서  지내기로 하셨다. ( 어찌나 다행이었던지...) 오랜만에 본 아버지는 어쩜 눈곱만큼의 변화 없이 그대로셨다. 10일을 계획하고 오셨는데, 10일 동안 독일과 네덜란드, 프랑스 파리까지 다녀오는 살인적인 일정이었다.


비행기값도 비싼데 이왕 온 김에 여러 군데 다 보고 와야지라고 생각하는 한국인과는 다르게 유럽사람들은 이것을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 집 남의 편도 왜 이렇게 여러 군데를 가는 거냐고 물었지만, 부모님이 언제 또 오실지도 몰랐고 조금이라도 젊을 때 많이 보셔야 한다고 밀어붙였다.


파리에 함께 가서, 시내구경을 했다. 찌는듯한 더위임에도  에펠탑도 올라가고 노트르담 성당에도 가서 구경을 했다. 그날은 날씨가 더워 나는 랩스커트에 검은색 끈나시를 입고 있었다. 시내구경을 다 하고 호텔에 들어가기 전, 파리의 전형적인 멋들어진 카페테라스에서 커피를 한잔하고 들어가기로 했다.


앉자마자, 생각지도 못하게 조선멘탈 아버지의 질타가 쏟아졌다.


 "내가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너는 외국 나간 지 1년도 안된 놈이 정신까지 벌써 서양화가 된 거냐? 여기 사는 한국 사람들도 많은데 옷을 왜 그렇게 입냐. 다 벗고 다니지 그러냐. 한국사람들이 너를 보면 뭐라고 생각하겠냐! 너는 한국사람이지 서양사람이 아니다!"


내가 너무 방심했다. 한동안 아버지를 보지 못했어도 아버지는 극강 조선멘탈 아버지인데 1년 동안 못 본 사이에 잠시 깜빡한 것이다. 나는 끈나시 하나에 정신이 썩어빠진, 서양 겉물 든  여자가 되고 말았다.


비록 한국말은 못 하지만 분위기 상 싸 함을 감지한 남의 편. 아버지의 일방적인 다그침을 들으며 눈물을 쏟고 있던 내 손을 잡고, 남의 편답지 않게,


얘는 아버님의 딸이지만, 제 부인입니다. 제 부인에게 이런 식으로 대하지 말아 주세요!라고 말하며 내 손을 붙잡고 끌고 갔다. (물론 영어로. 그리고 우리 아버지도 쉬이즈 마이 와이프, 낫 온리 유어 도터 정도는 알아듣는다. )


그렇게 호텔방에 돌아와서 엉엉 울었다. 남편은 그런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아버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왜 그렇게 상처 주는 말을 하는 건지, 그리고 왜 그런 말을 듣고도 울면서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오지 못하는지...


다음날 우리는 호텔로비에서 만나 루브르 박물관에 가기로 했다. 매우 서먹서먹하게 인사를 건네고 아빠는 "아빠가 어제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미안하다."라고 하셨다. 그런데 어머니의 표정이 냉랭하다. 언제나 문제가 있으면 뒤에서 살뜰히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하셨었는데 어쩐지 오늘은 한기가 날린다.


루브르박물관에 가서도 보는 둥 마는 둥, 자꾸 어머니가 신경 쓰인다. 내가 가서 묻는다. "뭐 기분 안 좋은 일 있어요?"


"네가 쟤 부인이면 네 아빠는 내 남편인데, 사위가 내 남편한테 저렇게 버르장머리 없게 대하면 나는 기분이 좋을 것 같니?


맙소사. 조선멘탈아버지의 부인으로 산 엄마를 얕봤다. 산 넘어 산이다... 아유 머리야... 나는 그렇게 하루 종일 서먹서먹한 부모님과 남편 사이에 껴서 아주 불편한 마음으로 돌아다녔다. 다행히도 그 다음날은 서먹한 한결 풀어져서 베르사유궁전은 나름 화기애애하게 다녀왔다.


이날 이후 깨달은 것 두 가지가 있었으니, 조선멘탈 아버지는 어딜 가도 조선멘탈일 것이며, 조선멘탈 아버지의 사모님을 얕보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남편의 매번 남의 편은 아니라는 것, 덕분에 어머니까지 화나셔서 고생을 하긴 좀 했어도 내편을 들어준 어쩔 때는 내편인 남편이라는 것?


일주일 후, 부모님은 집으로 돌아가셨고 나는 날이 더울 때면 다시 아버지를 화나게 했던 그 문제의 옷을 꺼내 입고 다녔다. 앞으로 죽을 때까지 끈나시를 보면 아버지의 호통이 생각 날 것 같지만 그래도 열심히 입고 다녀야지!


이전 12화 외국인 남편은 더 스윗하다는 편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