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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 Mar 22. 2024

크리틱과 나

2022년 어느 날 밤

# Intro

1학년 건축학과 생활을 끝마치며.


1. 건축학과 크리틱

2. 무기력한 마무리

-


[ 작품 만들기 ]

3. 생각도 마음도 없는 거짓말쟁이

4. 애증의 내 작품


[ 발표 ]

5. 기선제압과 멘탈

6. 소통이 언제쯤 쉬워질까


-

[ 인생이야기 ]

7. 정신을 갉아먹는 이상주의

8. 앞으로 내 건축라이프..?





1. 건축학과 크리틱


건축학과에서는 중간고사, 기말고사라는 말 대신

크리틱(Critic)

이라는 단어를 쓴다. 비판한다는 뜻을 가진 criticize를 줄여서 그냥 critic이라고 하는 걸로 알고 있다.



출처 - 네이버 영어사전



뜻 그대로 작품을 만들어내면 비평을 하는 거다.

나는 학생이니까 교수님들로부터 비평을 받게 된다.


    시험 범위가 정해져 있고 책상에 딱 달라붙어 외우고 이해하는 공부를 통해 시험을 보는 것과는 결이 많~이 다르다. 이런 종류의 시험을 나도 처음 겪다 보니 우여곡절이 참 많았다. 교양시험을 준비하면서 크리틱도 준비한다. 교양시험이 전부 끝나면 본격적으로 크리틱 준비에 집중한다. 이때부터 밤샘을 밥 먹듯이 하게 된다. 과연 <건>강을 <축>내는 학과답다. 종강이 늦어진다는 게 아주 큰 흠이기도 하다. 건축을 선택한 내 책임이지 뭐.






2. 무기력한 마무리


1학년 동안의 내 건축학과 생활을 네 글자로 요약하자면

사. 서. 고. 생.



    나는 손이 꼼꼼하지만, 매우 느린 편이다. 마감에 미친 듯이 쫓겨 정말이지 사서 고생하는 편이었다. 흔히들 “그러게 미리 좀 해두지..” 이런 말씀을 하시는데… 불가능했다. 저도 그러고 싶었어요.. 계획대로 열심히 만들어도 언제든지 맘에 안 드는 게 보인다. 이게 한번 거슬리기 시작하면 무조건 뒤엎게 된다. 시간이 매우 부족하지 않은 이상 꼭 계획이 어그러뜨릴 일이 생긴다. 내 만족에 차지 않아서 혹은 교수님과의 미니크리틱 중에 바꿀 게 생기기 때문이다.


    솔직히 2학기 중반부터 정말 힘들었다. 정말 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다른 무언가를 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이걸 왜 하고 있나,라는 생각은 제일 위험하다. 그런데 그 생각이 24시간 내내 들었던 것 같다. 할수록 무언가 쌓이는 느낌이 아니라 내 밑천만 드러나는 것 같은 느낌이 무서웠다. 마음이 떠나가니 힘도 안 나고, 몸은 안 좋아지고. 무기력에 갇힌 기분이었다. 딱 한 번 수업을 아예 안 간 적도 있었고 막판 마무리도 흐지부지, 얼렁뚱땅 지어버렸다. 당연히 성적에 전부 반영되었다. 난 하기 싫으면 못 숨기고 다 티가 나기 때문에...







[ 작품 만들기 ]

3. 생각도 마음도 없는 거짓말쟁이


특히 크리틱에서 거짓말쟁이가 되는 게 가장 싫었다.

교수님: a가 주제인 거네요 그럼?



    난 사실 z에 대해(과장한 표현) 설명하고 싶었는데 어떻게 설명할지 감이 안 오면 결국 아 네..! 하고 얼버무리게 되는 게 싫었다. 어느 정도 타협해서 h라고 말할 수도 있었는데 사실은 나도 a라고 생각했던 걸까? 착각 같은 최면에 걸려 대답한 적도 많았다.  나 자체가 확신이 없는 느낌, 나는 이 작품을 왜 이런 식으로 했나도 잘 몰랐던 것 같다.


    1학년은 파빌리온 설계를 위주로 해서 상상도 못 하는 것들이 나올 수 있다. 나도 모를 정도로.. 그래서 빙하 표면만 생각해 두고 작품을 만들 때가 많았다. 심해에 잠긴 빙하가 어떤 모양일지는 나도 전혀 몰랐다. 그냥 하는 거지. 그런데 그냥 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나는 어떤 일을 할 때 꼭 의미를 찾는 편이다. 이건 내 장점이자 단점이다. 이 일이 나에게 주는 긍정적 감정이나 목적, 보상이 구체적으로 보이면 꿈쩍 않고 굳건하게 일을 해내 간다. 하지만 이것들이 더는 보이지 않게 되면 놀랍도록 빠르게 길을 잃어버린다. 네가 이 일을 왜 하고 있는 거야?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나에겐 추진력을 주는 연료인 셈인데, 그게 없어지니 앞으로 나아가지를 못하는 거다. 작품을 만든다는 건 지식이 쌓이는 걸 체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성적이 구체적인 수치로 평가되는 것도 아니다. 비정형의 무언가를 상상하는 건 자유로워서 좋지만 내 실력은 처참했다. 이렇게까지 상상력이 굳어있었다고?






4. 애증의 내 작품


     수업에서는 교수님의 크리틱을 받아가며 절충안을 찾고 나의 ‘이게 뭐지 모형’에서 건축적 해답을 얻어나가게 된다. 나도 몰랐던 내 모형의 이면을 크리틱 받으면서 의미를 찾아가는 일은 재밌었다. 보물찾기 같았다.


    하지만 교수님 크리틱에서 받은 내용에 의존하다 보니 내 이야기를 자꾸 잊어버리는 거다. 그러니 나 홀로 중간, 기말크리틱을 받을 때 질문공격을 받으면 속수무책으로 찔려버리는 거다. 한 교수님의 스튜에 해당하면 그 교수님의 스타일이 많이 묻어날 수밖에 없고, 그 사이에 나만의 올곧은 확신이 있지 않으면 홀로서기 크리틱을 받을 때 무조건 길을 잃게 된다. 그래서 더더욱 생각을 많이 해야 하고 내 작품과 생각에 애정을 가져줘야 한다. 이름표도 꽂아주고 설명집도 만들고 시들지 않게 열심히 가꿔줘야 하는데… 돌아보면 어느 땐 내 손길이 잔뜩 묻어 너무 소중하다가도, 왜 이것밖에 못한 거지란 생각에 볼품없어 보이기도 했다. 내 실력이 그대로 보여 전시되는 게 부끄러웠다. 성적표를 게시판에 떡하니 붙여놓는 것과 같은 느낌일까.






[ 발표 ]

5. 기선제압과 멘탈


    작품과 내가 나란히 서서 여러 교수님 또는 선배님들 앞에서 발표한다. 여러 사람이 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내 작품을 유의 깊게 들여다보는 건 굉장히 멋진 일이긴 하다. 하지만 긴장이 안 될 수가 없다. 가끔은 내가 만든 모형도 내가 만든 게 아닌 것 같을 정도로 압도당한다. 글은 충분히 생각하고 수정할 수 있지만, 말은 즉흥적인 부분이 훨씬 커서 문제였다. 요즘 말로'조용한 관종' 타입인 나는 발표할 때 모든 이가 나에게 집중한다는 것에 짜릿함을 느끼긴 하나, 즐기진 못한다. 경험이 쌓일수록 나아지겠지만 거의 매번 기선제압을 당하고, 때로 발성이 망가지기 시작하면 염소 마냥 목소리가 떨리거나 헛기침 잔뜩 낀 인간이 되어 발표를 망치고는 했다. 그런 날에는 집에 오다가 갑자기 화가 나서 자주 울었다. 크리틱은 그야말로 전투라던 교수님 말씀이 떠오른다. 그런 것 같다. 그렇다.






6. 소통이 언제쯤 쉬워질까


    사실 모형보다 더 중요한 건 제작자의 설명이다. 허접해 보여도 이유를 듣고 나면 이해되는 때도 있고, 분명 모형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래서 발표가 중요하고 판넬이 중요하다. 슬픈 나의 발표들은 뒤로하고 쨌든 본질이 되는 주제와 그에 따른 이야기들로 넘어가 보자. 내 작품의 스토리를 짜는 건 나름 재밌었다. 워낙 잡생각을 많이 키우다 보니 평소 하던 생각 중 몇 개를 집어가면 말이 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배울 점도 많았던 게 이야기를 짓는 과정에서 설득하는 방식, 즉 내 의도를 전달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게 되었다. 난 분명 이렇게 말하고 싶었고 나름 말도 잘한 것 같은데, 상대방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거나 다르게 받아들여 오해하는 때도 있었다.


    가족들의 대화 방식을 물려받고 자연스레 물들어진 나는 여태까지 나와 대화방식이 맞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편하게 대화해 왔다. 하지만 이젠 넓어진 세상만큼 설득할 사람도 많아진 거다. 더는 내가 대화하기 편한 사람하고만 대화할 수 없다. 나 스스로 여러 사람의 주파수를 경험하고 상황에 따라 그걸 충분히 조절해 가며 대화해야 한다. 사실 주파수를 맞춰 대화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내 영역과 잘 맞는 사람이랑 대화할 수 있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사회에서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정말 행운인 거고 행복한 일일 거다.






[ 인생 이야기 ]

7. 정신을 갉아먹는 이상주의


    사실 난 내가 되게 특별하고 잘난 줄 알았다. 손재주도 좋고 창의력도 좋고, 건축학과만 가면 날개를 펴고 살 줄 알았다. 어렸을 때 가진 생각으로 지금의 나를 끊임없이 속이며 버틴 것 같다. 그런데 현실을 마주하니 나보다 손재주도 훨씬 뛰어나고 열정 넘치는 친구들이 많았다. 재능의 영역일까라는 의문은 내 진로로 삼아도 될까라는 의심이 되었다.


    위로는 내가 그다지 특별하지 않다는 걸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이었다. 지금의 평범함 속에서 나만의 특별함을 만들어가면 되는데,  ’완벽하게 뭐든 잘 해내는 나‘라는 이상적 틀을 만들어 놓고 아직도 도달하지 못했다는 안타까운 생각만 했다. 이 생각이 끊어지지 않는다면 평생을 힘들게 살겠구나 싶었다. 내 부족함을 정확히 인지하고 과거에 대한 후회를 그만하고 싶다. 평생에 걸친 목표가 될 수도 있지만 매 순간 온 정성을 쏟으면 그래도 미련이 덜하겠지. 사실 매 순간을 불태운다는 게 아직도 정확히 뭔지 모르겠지만, 다행히 올해는 일하며 몰입을 한 순간이 꽤 되는 것 같긴 하다.






8. 앞으로 내 건축라이프..?


    결국, 중요한 건 내 마음가짐이다. 글을 쭉 써보면서도 느꼈지만 나는 현재 건축에 대해 매우 회의적인 상태이다. 뭔지 모르겠는데 정말 버겁고 힘든 순간이 많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또 건축이 싫은 건 아니다. 분명 우리 삶에 있어 너무도 중요하고 매력적인 분야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 마음이 갈피를 못 잡나 싶다. 애증에서 ‘애’와 ‘ㅈ’만 써 내린 상태다. 뭐든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복잡하다 하면 한없이 복잡하고 단순하다 생각하면 한없이 단순하다. 아이고 어려워라! 겨울방학 동안 책도 많이 읽고 공간도 많이 돌아다녀 보고, 내 미래에 대한 생각이란 걸 하고 살아봐야겠다.


미래의 나야, 건축 잘하고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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