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 기계 4(완)

총 4회로 나뉘는 에세이입니다

by 새림

4.


내게는 요즘 새로운 걱정거리가 생겼다. 나이를 먹으며 전에 없던 증상이 하나 출몰한 것이다. 잠시의 침묵도 견디지 못하는 이 병의 이름은 아나운서병이다. 어느 날, 신종 병증에 대한 나의 고백을 심각히 경청해 준 고양이-그는 작명이 취미다-가 대뜸 붙여준 이름이다. 별로 친하지 않은 누군가와 단둘이 만날 때 주로 발현되며 증상은 다음과 같다.

내 앞의 상대에게 이것저것 계속 말을 시키고 대화를 진행시킨다. 상대의 대답에 따라 적절한 맞장구로 응수한다. 말이 끊기는 잠시의 어색함을 최소한으로 줄이려 노력하며 그 시간에 대한 책임은 오직 나의 것이라는, 막중한 의무감에 사로잡힌다.

상대가 내성적으로 보이거나 나보다 어리거나 또는 주변머리가 없을 것 같을 때 나의 증상은 극한의 친밀감과 능력을 발휘하는데 최악의 경우는 나의 이런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예'와 '아니요'의 단답형 대답만 하는 매우 거만하거나 수줍은 상대를 만날 때다. 그때의 나는 약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비굴에 가깝다.

"어머나, 회계 일을 하시는군요."


"네."


"수학을 잘하셨나 봐요. 아, 나는 숫자엔 정말 젬병인데..."

"아... 네."

"졸업 후 계속하셨으면 이젠 그쪽 분야에서도 경력자 중 경력자시겠어요."

"아... 네에."

이 중에 꼭 필요한 말이 몇이나 있단 말인가. 그런 날 나는 너무 부끄러워 집에 돌아오자마자 몸져눕는다. 서너 시간쯤 앓고 나서 물만밥에 멸치볶음 한 가지로 혼자 저녁을 먹노라면 사는 게 고되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리고 비 맞은 중처럼 중얼댄다.

'아니 사회를 그렇게 잘 보는데 왜 아나운서가 못 됐어?'

이 병이 깊어지면 상대와는 상관없이 나 스스로 기가 빨린다.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이상한 힘이 있는 병이다. 남에게는, 물어본 적은 없지만, 보나 마나 참 줏대도 없어 보일 게 분명하다. 다시는 하지 않겠노라 다짐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새 또 사회를 보고 있다. 아무래도 죽기 전까지는 고치지 못하려나 보다.

천진난만한 나의 남편조차 나를 걱정한다. 쓸데없는 일을 너무 오래 생각하고 걱정하니 그것이 걱정이란다. 그의 눈에 나는 걱정거리가 없을까 봐 그게 걱정인 사람 같다고도 한다. 고양이네는 좋겠다. 그 집 걱정기계는 똑똑한 남편이라니 말이다. 걱정기계가 겨우 변변찮은 나라니...우리 집이 걱정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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