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 사는 것은 쉽지 않다.
그 나라 언어에 익숙하지 않다면 더욱 쉽지 않다.
가난한 중국인 남자와 결혼을 결심하고, 우리는 한국에서 살기로 했다.
아무리 한국어를 못하더라도 단순 알바도 중국보다 벌이가 낫겠다 싶었다.
중국인 남편이 한국에 처음 온 날, 우리는 베개를 사러 동네 이불가게에 갔다.
"주인아줌마 없어요?"
한 손님이 우리에게 물어보았을 때, 중국인 남편은 씩씩하게 대답했다.
"응! 아줌마 없어."
그때 처음 느꼈다.
이 사람 한국어부터 배우게 해야겠구나.
그래서 집 근처 건국대학교 한국어 어학당에 바로 등록했다.
그렇게 건대 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우기 세 달쯤 지났을까.
남편이 어학당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리고 동네 다문화 가족센터에서 한국어를 배우겠다고 했다.
당시만 해도 지역 다문화 가족센터가 활성화된 것이 아니었기에, 남편이 최소 1년은 어학당에서 한국어를 제대로 배웠으면 했다.
그러나 남편은 단호했다.
당시 20대 후반이었던 남편은 10대 & 20대 초반인 급우들과 어울리기가 불편하다고 했다.
그날부터 남편은 어학당이 아닌, 다문화 가족센터에서 다른 결혼이민자 급우들과 같이 한국어를 배웠다.
남편은 자신이 유일한 남자 학생이라고 했다.
후에 남편이 말하길,
급우들과 어울리기가 힘들어서가 어학당을 그만둔 것이 아니라,
아내인 내가 아등바등 혼자 돈을 버는 것이 미안해서 그만두었다고 한다.
가장으로서 몇 백만 원의 월급을 갖다 주지는 못할망정, 몇 백만 원의 학비가 드는 어학당에 도저히 계속 다닐 수 없었다고 했다.
다행히 남편은 다문화 가족센터에서 잘 적응하였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다문화 센터에서는 한국어가 익숙하지 않은 남편이 일할 수 있는 자리들을 소개해 주었다. 중국어를 가르치기도 했고, 근처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중국인 남편이 한국에 온 지 1년쯤 되었을 때, 정식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중국 업무 관련 회사들에 이력서를 넣었고, 한 미용 기기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한국어를 잘 못하는 남편이 맡은 일은 공장에서 미용기기를 조립하는 일이었다.
낮은 급여뿐만 아니라 출퇴근 3시간 거리에 위치한 회사였지만, 남편은 한 번도 고되다 말한 적이 없었다.
그저 아내인 나에게 자신의 월급을 가져다주는 것에 행복해했다.
그렇게 1달의 수습 기간이 지나고, 회사 사장은 남편에게 회사가 어떤지 물어보았다.
"가..조까타요!"
회사 동료들은 까르르 빵 터졌고, 남편은 바로 정직원이 되었다.
공장에서 조립업무를 시작한 남편은 얼마 되지 않아 부품 수입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중국 해외영업 부서로 이동하여, 공장에 더 이상 출근하지 않아도 되었다.
중국인 남편은 그 회사의 외국인 직원들 중 유일하게 사무실에서 일하게 되었다.
남편은 그렇게 3년간 그 회사를 다녔다.
그 일이 생기기 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