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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llie 몰리 Oct 25. 2024

굿바이 차이나, 중국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위드코로나, 중국에서 살아보니

즐거울 것만 같았던 긴긴 6년간의 중국 주재원 생활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예상치 못했던 발령 소식과 더불어, 혹독한 전염병을 현지에서 3년 넘게 겪게 된 일들로 우리 가족 인생의 삶을 아주 큰 획을 진하게 그었던 시절들이었다. 가족에게 첫 해외 생활을 안겨줌과 동시에 가족끼리 더 단란해지고 뭉칠 수 있는 계기도 되었고, 우리의 사고방식과 생활 습관도 중국 주재원 생활을 통해서 180도로 바뀌게 되었다.


조금 더 진취적이고 도전적이지만, 바닥의 쓴맛을 조금은 찍어보았기에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느끼고 있었고, 여기서 이렇게 버티고 살아남았으니 이보다 더한 험난한 세상에서도 생존할 수 있겠다는 무모한 생각까지 들었으니 말이다. 처음에 '중국'이란 나라의 선입견에 대한 좋지 않은 시선으로, 주변에서 다들 중국 주재원 발령에 대해서 걱정을 하거나, 기피하는 모습도 보였지만, 나름 살아보니 힘들고 다사다난했지만 그래도 사람 사는 곳이라서 깨알 같은 추억도 많고, 정든 동네와 이웃들도 있었다.


물론, 앞선 글에서 써내려 왔듯이 중국어를 모르는 외국인 입장에서의 중국살이가 그렇게 만만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언어의 불편함, 깨끗하지 못한 위생 환경, 다소 옛날스러움이 남아있는 이해할 수 없는 당황스러운 문화, 화통하다 못해 버럭 하는 중국 여자와의 실랑이, 사기, 통제 등 비단 중국살이 뿐만 아니라, 해외 어느 나라를 가도 나의 언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내 나라만큼 편하지는 않겠지만, 그 작은 소통도 안 되는 점들이 답답했고, 폐쇄적인 분위기가 외국인 입장에서는 안전해 보이기도 했지만, 그 화살이 우리를 향할 때는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도 우리는 중국의 수도인 베이징에서 지내서 그런지 오히려 앞선 기술을 많이 체험했고, 지갑조차 들고 다닐 필요가 없는 전자결제 시스템과 무인 택배 차량, 저렴한 물류 배송비,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는 타오바오와 징동 쇼핑, 일요일에도 근무하는 쇼핑몰과 은행 등을 겪으며 아시안 문화지만 다소 개인적이고, 사회주의지만 개인 주장이 강한 언발란스한 매력이 있는 중국 생활을 보내왔다.



코로나만 아니었다면, 중국 전역을 여행도 하고 정말 주재 기간 동안, 제대로 된 해외살이를 했겠지만, 안타깝게도 전체 기간 중 절반의 기간은 숨통을 쪼여가는 중국의 이상한 방역법으로 인해서 말도 안 되는 오해와 GPS 추적으로 인하여 연락을 받기가 일쑤였고, 코로나에 걸리면 임시시설인 팡창이란 곳에 끌려갈 수도 있다는 불안감 등, 그로 인해 그 기간 동안 중국에 대한 미움으로 가득 찬 시간을 보냈다. 엉터리 빅테이터를 가지고 가지도 않은 곳에 간 나를 추적해서 단지로 연락이 오고, 이름과 여권 번호를 제출하라는 등, 백신은 맞았는지, 몇 회를 맞았는지, 모르는 곳에서 중국어로 오는 전화는 정말 공포 그 자체였다. 당장 오늘 PCR 테스트를 하고 결과를 제출하라고 요청받기도 했다.

© Mollie



2022년 12월 초 갑작스러운 중국의 위드코로나로 인해 중국의 의료, 배송, 회사, 학교, 공공기관 등 모든 사회 전반적인 시스템이 붕괴되었다. 더 이상 코로나 통제를 견디지 못한 중국인들은 일제히 조용히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중국 정부는 갑작스러운 위드코로나를 발표함과 동시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제히 코로나에 감염되어 의료시설 마비, 붕괴로 모두가 힘들고 아팠던 절정의 시간을 겪기도 했다. 당시에 내 통증의 이유가 대상포진인 줄도 몰랐고 치료도 안 됐으며, 엎친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까지 동시에 한 몸에 찾아와서, 인생 최대의 시련을 보내기도 했고, 이러다가 고독사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를 시작으로, 남편과 아이까지 코로나에 걸려서, 3명이 모두 집에서 병원은커녕 어떻게 먹고살았는지 모를 정도로 아픔을 함께 했고, 온 가족이 시름 대며 그 시기를 견뎠고, 급한 나머지 한국의 소방청에 SOS 전화를 하기도 했다. 단지에서도 활발하게 진행 중이던 중고 거래도 사람들이 코로나에 걸리면서 픽업을 오지 못하거나, 단지에서 약을 구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들이 펼쳐지기도 했다. 해열제와 약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약을 나누어 이웃의 집 문고리에 걸어주기도 했다.


1년 정도 시간이 걸려 차차 안정세에 접어들며,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났다는 듯한 모습의 일상으로 돌아간 중국이었지만 경제 회복은 쉽지 않았다. 얼마 남지 않은, 끝을 알고 있는 중국 생활을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서 즐길 수도 있었겠지만, 너무 장기간 크게 데인 나머지 우리는 중국과 이 인연을 더 만드는 대신에 얼른 귀국 준비에 돌입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도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지듯, 우리 3인 가족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중국 생존기를 통해서 인생을 한 번 살아감에 있어서 돈 주고 얻을 수 없는 경험과 체험, 그리고 고통의 쓴 맛을 보기도 했던 시간들을 회상해 보니, 한국을 제외하고 가장 오랜 기간 살았던 마음속의 '제2의 고향'과 같은 추억이 묻어있는 곳, 또 시간이 지난 지금은 또 그때가 한 번씩은 그리워지는 그런 생활을 했던 것 같다.


아이 역시 청소년기의 추억과 친구들 역시 지금은 어린 시절의 한국이 아니라 중국 생활을 통해서 만난 여러 인연들과 맺고 있고, 아이의 인생 역시 중국 생활이 기반이 되어 현재 미래를 그려나가고 있다. 즐거웠지만 아쉬웠고, 더 누리지 못해서 아쉬웠던 '애증의 나라'로 떼려야 뗄 수 없는 우리 삶의 일부분이 되었던 이곳 생활기였던, 3인 가족 아찔한 중국 생존기를 마칩니다.


대문사진 출처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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