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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llie 몰리 Oct 24. 2024

중국에서 불안이 낳은 응급실행

벙어리, 그리고 호구

환경 때문이었을까? 나이 탓이었을까? 준비 없는 40대를 중국에서 보낸 나는 참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참 많이 아팠다. 그때의 아픔들은 아직도 신체 곳곳이 기억을 하기에 몸이 안 좋으면 그때의 증상이 나오기도 하고, 지금은 더 나이가 먹은 만큼 또 다른 질병과 증상으로 발현되기도 한다. 나이 듦을 인정하고 내 몸을 돌봐야 하는데, 나의 인생이 흘러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편안하고 안정되게 사는 인생과는 다소 거리가 먼 것 같다.


다소 고지식하고 예민하고 생각이 많다보니, 중국에서 코로나의 발생부터 위드 코로나까지 3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면서 다이내믹한 삶을 경험했다. 주재원이라는 프리미엄 명품옷을 입고, 그렇지 못한 환경에 접하게 되었다. 내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중국 정부의 막무가내식의 통제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몫이었다.


1-2달 출장을 떠나면 4개월이 넘어도 돌아오지 못한 남편과 매일같이 밥먹듯이 강제로 했던 코로나 테스트,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계속 꼬여버리는 끊이지 않는 답답한 상황들, 아파도 제때 치료받지 못하고, 하늘길까지 막힌 상태에서 살아가는 그 불안감과 공포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당시에는 혹시나 코로나에 걸리기라도 하면 임시로 설치된 부스에 그냥 데리로 간다고도 하고, 갑자기 지역의 교통이 끊겨서 발이 묶인다거나, 갑자기 단지가 하루아침에 봉쇄되어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갇힌 경우도 더러 있었다. 늘 감시를 받고, 내가 스스로 해나갈 수 있는게 없었다.


장기전으로 이어질수록 꼼꼼하고 완벽하려 애쓰고,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내 성격으로 인해서 나는 점점 병들어갔고, 안 좋은 신체 증상이 있을 때마다 작은 병원들을 찾아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해외생활에서의 병원은 한국보다 제한적이며, 때로는 내가 그 병원의 의사와 치료 방식이 맞지 않아도 그곳을 갈 수밖에 없는 현실이거나 원치 않는 진료로 과잉 진료를 할 때도 그 치료를 받지 않는 내가 마치 이상한 사람이 되는 느낌도 받았다. 약값은 약값대로, 치료비는 치료비대로 계속 나가고, 말할 때 몸이 떨릴 정도로 기력이 없었지만,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원인 모를 두드러기가 생기기도 하고, 지은 약이 맞지 않아서 아무리 증상을 설명하고, 심장의 빈맥을 호소해도, 약이 바뀌기는커녕 믿고 먹어보라는 말로 먹을 수밖에 없었다. 4번의 약을 짓는 과정에서 증상이 더 심해짐을 느꼈고, 기력이 쇠한 상태에서 왕복 1시간이 넘는 병원을 가며, 나의 불안감과 긴장감은 커져갔고, 한 병원에서 심전도 검사와 심장 초음파 검사도 몇 차례 진행했는지 모른다. 소화가 문제 같다고 해도, 심장을 강하게 해야 한다며 어떤 약을 먹고, 갑자기 심장내과에서 기다리다가 빈맥 발작이 와서 간호사에게 뛰어가기도 했고, 낫지 않는 병에 대한 건강염려증도 커지기 시작했다.

© Mollie

추운 겨울이었다. 이날도 남편이 출장지에서 돌아오지 못했을 때였다. 움직이고 말할 기력조차 없이 겨우 한인업체에서 반찬과 죽을 시켜가며 살아가던 중, 갑자기 밤에 뭔가의 공포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때 나의 스마트워치의 맥박은 가만히 있는 상태에서 150을 시작으로 170까지 뛰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상황을 끊을 수 없는 끝나지 않는 내재된 불안으로 인한 공황 발작 같았다. 너무 겁이 났고, 주위에는 자고 있는 아이뿐 아무도 없었다. 이러다 내가 죽는 게 아닌가 너무 무서웠다.


급한 대로 핸드폰을 켜서 외국인 병원의 Hot line에 전화하여 혹시 구급차를 보내줄 수 있는지 물었지만, 그런 서비스는 없다고 했고, 중국의 로컬 번호를 안내해 주었다. 손은 점점 떨리고, 호흡이 가빠지자 몸은 오그라들고, 중국 120에 전화하여 짧은 중국어로 '나 아프다, 죽을 것 같다, 우리 집 주소는 여기다.'라고 이야기를 해도, 그들이 나의 엉성한 중국어 성조를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무서웠다. 자고 있는 아이를 깨워, 급하게 Didi(택시)를 불러, 외국인 병원을 찍고 가는데, 가는 동안도 내가 어떻게 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덜덜 떨면서 기어서 갔다.


맨발의 슬리퍼에 잠옷 차림에 패딩을 하나 걸쳐 입은 나와 아이는 추위에 시달리다, 도착한 택시를 타고 둘이 병원으로 출발했다. 신호를 지키는 기사에게, 제발 빨리 가달라고 온몸이 말리고 있다고 발악을 하며, 병원에 전화를 걸어서 상황을 이야기해 달라고 번역기를 돌렸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가까스로 언어가 통했는지, 구급차가 병원에서 조금 출발한 곳에 나를 데리러 왔고, 나는 아이와 함께 구급차에 실려 병원을 들어가게 되었지만, 이미 1시간이 넘어서 도착한 병원에서 나는 있는 대로 지쳤고, 빈 병원에서 휴식을 취하며 몸상태를 체크하며 피검사를 했다.


이미 과호흡으로 손가락까지 꼬이고 머리는 산발이 되고 땀으로 흥건한 채 말할 기운도 없었던 상황, 정신이 혼미하고 몸이 떨리는 상황에서, 구급차의 운전기사가 내게 와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위챗페이로 180위안(약 3만 6천 원)의 돈을 결제하라고 했던 일들 하나하나가 너무 스트레스였다. 피검사결과 수치 하나가 정상은 아니지만, 크게 이상 있는 정도는 아니라고 했고, 간밤에 너무 무서워서 택시에서 도움을 청한 지인이 아침에 데리러 와주어서 마음의 빚을 지기도 했다.


중국에서 주재원 가족으로 살면서, 두 번 겪기 힘든 전염병을 겪다 보니 마음의 불안이 신체화 증상으로 나타났고, 거기에 심장의 기운을 주는 처방으로 내 상태는 말이 아니었지만, 결국은 간단한 피검사, 혈압검사, 심전도를 하고 3시간 누워있다가 총금액 6,952 RMB(약 140만 원)에서 할인을 받아, 5,561.63 RMB(약 112만 원)을 결제하고 나오고야 말았다.

© Mollie

강해지자고 마음을 먹어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환경에 놓이니, 너무나 나약하고 무력한 나를 보며 답답하기도 했고, 이런 일을 겪으면서 나이 어린아이가 철이 일찍 들고, 더 단단해지고 나보다 성숙해질 수 있었던 버라이어티한 중국살이를 하면서 가장 힘들고, 아프고 고통스러웠던 그 순간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야말로 내게는 생존의 시간들이었다.


대문사진: UnsplashJan Can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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