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어 전임자는 도망갔다는 바로 그 자리!
아무래도 혈액암인 것 같습니다...
그 날은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12월이 되고나서 긴장이 풀린 탓인지,
거의 매일 아팠던 것 같다.
코로나랑 증상이 비슷했다.
그런데 좀 특이했던 건,
밤이 되면 걸을 수가 없을 만큼 다리가 저리고,
저녁 7시가 넘으면 열이 39도가 넘게 올라왔다.
다리 통증은 당시에 크로스핏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그게 문제인가 생각했고
열은 해열제를 먹으면 낫지 않나
안일하게 생각했었다.
근데 9~6시에는 또 너무 괜찮았고,
마침 유독 큰 문제가 없었던 연말이라서,
2주 정도는 계속 견뎌내고 있었다.
그런데 약을 먹어도 낫지를 않고
무엇보다 연말연시에는 병원에
가는 것도 쉽지가 않다는 와이프의 주장으로
급 대학병원에 진료를 받으러 가게 됐다.
처음에는 약을 잘못 먹어서
그런 것처럼 이야기를 하시면서
3일 정도만 입원을 하자고 하셨다.
그런데 3일이 점점 길어지기 시작...
1주일쯤 됐을 때 퇴원하겠다고
담당 전공의 선생님께 말씀을 드리자,
혈액암일지 모르니, 혹은
SFTS (중증 열성 혈소판감소 증후군)이라는
걸리면 대부분 돌아가시는 병일 수 있으니
계속 입원하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다행히 1개월쯤 됐을 때,
진짜 병명이 확인되었고,
이 역시 희귀병에 평생 약을 달고 살아야 하는
병이라서 슬프긴 했지만,
그래도 일상 생활이 가능해질 거라는
전망으로 희망이 보였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앞으로 회사를 다닐 수 있을까?"
"어떡해야 그걸 확인할 수 있을까?"
"어떡하면 통증을 없앨 수 있지?"
등등...
근데 그와중 일에 진심이었던
나는 일단 회사에 나가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완치가 없는 희귀병이라는 건
어차피 계속 아플 거라는 것이고,
그렇다면 회사 생활에 이 상태로
부딪혀보는 게
장기적인 판단을 하기에
유리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었다.
뿐만 아니라, 입원 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는 하고 있었지만,
내가 처음 맡아서 운영하던 팀이
갑자기 아예 마케팅팀에 흡수되어 버리는
변수가 생기게 됐고,
게다가 그 팀 팀장님이 퇴사하시면서
내가 팀을 맡아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기존 내 팀원들이
거기서 적응을 잘 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책임감도 있어서 더 빨리 복귀를 선택했던 것 같다.
뿐만 아니라 24년의 KPI가 얼마나
폭력적인지 알고 있었기에
마케팅팀이 잘 돌아가야
내가 내 가장 좋은 시절 몇년을 갈아 넣은
우리 국, 본부가 문제가 없을 거라는
책임감도 있었던 것 같다.
(사실 너무 닉값하는 것 같은데,
현재는 후회하고 있는 부분이다.
회사는 나 없어도 잘 돌아가는 법.)
그리고 솔직히 나는 그때 자신이 없었다.
이유는 사실 명확했다.
1. 나는 리더십 경험이 많지 않았다.
꼭 팀장 경험이 아니어도,
나는 항상 작은 그룹으로 일하는 조직에 속해있었다.
그래서 1개의 방식으로만 팀원들과 소통하는 게 익숙했다.
내가 잘 아는 분야에 대해서 나의 전문성과
권위를 바탕으로 상당히 구체적인 피드백을 주는 방식...
그리고 그를 위해서 일 단위로 구성원의
업무를 스프린트 돌리는 구조를 선호했다.
2. 그런데 나는 마케팅 실무 경험이 없었다.
콘텐츠 제작 관점에서 비슷한 것들을
해본 경험이야 당연히 있었다.
2명이서 200명 정도가 들어오는 공연을
매달 1번씩 운영한다던가,
대형 페스티벌에서 부스를 운영한다던가,
오프라인 베뉴를 운영한다던가
마케터랑 오리지널 IP를 기반으로
디지털에서 참여형 (게임형) 프로모션을
구현한다던가...
이런 경험들이 파편적으로는 있었지만,
무언가를 '마케팅'하는 경험은 익숙하지 않았다.
3. 게다가 이전 팀장의 고민을 반년동안 계속 들어왔다.
어떤 부분이 어려운 점인지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전형적인 ISTJ인 나로서는 잘 해결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굉장히 사교적이고 Outgoing한 사람이어야
잘 다룰 수 있는 이슈가 상존하는 팀이었다.
그렇지만 문제를 파악하고 대응하지 않는 것은
소위 '기획'을 하는 사람으로서
용납되지 않는 일...
그래서 다음의 조치들을 취했다.
1. 뻘쭘해도 들이대보자.
누구보다 내성적이고 사람들이랑
뭘 하는 게 어색하지만, 그래도 자주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기로 하자.
2. 마케팅 실무에 대해 미친듯이 공부하자.
책의 양을 가지고 공부의 질을 따질 수는 없지만,
오늘 글을 쓰려고 대충 세어보니,
마케팅 관련 서적을 속독한 건 120권 정도,
여러 번 읽고 메모를 한다거나,
별도 노션 문서로 정리한 것은 30권 정도
되는 것 같다.
실무에 관련해서도 최대한 들여다보려 했는데,
말만 마케팅팀이지 워낙 다루는 직능이
많은 팀이어서, 내 나름의 우선순위를 정해서
오래걸리더라도 딥하게 살펴봤다.
(스포하자면, 사실 여기서 크게 실패했다.
뭘 모르면서 우선순위를 정하지 말았어야 했다.)
주변 마케터들이나 유명한 분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의견을 구하기도 했다.
(이것도 이슈가 됐다.
내가 마케팅 '불모지'에 있다는 걸
한참 지나서야 깨닫게 됐다.)
3. 내 편을 확실히 만들자.
지지해주는 친구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모르는 일을 낯선 친구들과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닐테니까.
여기까지 이야기만 들으면,
그래도 아주 무난한 1년을 보냈을 것
같지 않은가?
그렇지만 내 24년을 돌아보면,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1. 그래도 KPI는 잘 소화해냄 (근데 내가 잘해서 된 건 아님)
2. 360 평가 (상사평가) 최악
(인터넷 악플만큼 강렬한 주관식 답변은 덤)
3. 회사 내 신뢰자산을 소진
4. 본인 스스로도 근로 의욕 상실
무엇이 문제였고 왜 실패했을까?
왜 내가 생각하고 의도하고
심지어 이뤄졌다고 하는 부분에 대한
인지가 팀원들과 정반대로 나타났을까?
2달 정도 고민해 본 결과를 바탕으로
다음 회차에서 답을 내리고자 한다.
대부분 책임은 팀장인 나에게
있겠지만, 분명히 문제의 원인은
각 담당자나 나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마 이 이야기를 읽게 된다면,
꼭 마케터가 아니어도 현재 조직 관리에
대한 고민에 대한 해답을 일부 얻으실 수 있을 거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