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감상 후기
영화가 시작되고 한참 동안 검은 화면 상태에서 어딘가 불길한 느낌의 음악만 흘러나옵니다.
화면에 왜 아무것도 안 나오지? 뭔가 잘못된 건가? 할 때쯤 강가에서 소풍을 즐기고 있는 단란한 가족들을 멀리서 비춥니다.
평화로워 보이는 소풍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가족들의 일상이 이어집니다. 집이 꽤 큽니다. 넓은 마당 밖 길 건너에는 철조망이 쳐진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공장 같아 보이는 벽돌 건물들이 줄지어 있습니다.
집안일을 돕는 가정부도 있고 마당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는 일꾼들도 있습니다.
집주인 남편이 퇴근하고 돌아오는데 복장을 보니 군인인가 봅니다.
부인은 성실한 직업군인 남편과 널찍한 집에 3명의 아이들, 잘 가꾼 정원과 수영장까지 딸린 큰 집을 마련해서 자신이 꿈꾸던 삶에 만족하며 살아갑니다.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나름 성공한 군인가족의 평범해 보이는 일상을 보여줍니다.
남편은 출근했다 퇴근해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종종 전근이나 진급에 대한 고민을 합니다.
부인은 가정부와 일꾼을 부리며 나름 다복한 가정에서 때론 살림에 바쁘고 때론 취미인 정원을 가꾸며 집에 찾아온 친정어머니에게 자신이 시집을 잘 갔음을 뿌듯하게 자랑합니다.
가끔 집에 헌 옷 등이 들어오는데 자신은 모피코트를 챙기고 선심 쓰듯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골라 가지라. 합니다.
평범한 가족 같지만 조금 달라 보이는 것도 있습니다. 일꾼이 집주인의 벗어놓은 부츠를 물로 씻는데 피를 씻어냅니다. 부인이 챙기던 옷가지는 집 건너편 담장 안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집주인은 나치 친위대(SS) 중령인 루돌프 회스로 실제 2차 대전 중 악명 높았던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장입니다. 남편의 부츠에 묻은 피는 아마도 즉결 처형한 유대인의 피일 것이고, 아내가 챙기던 옷가지는 죽은 유대인들의 옷일 겁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장은 아주 유능하고 성실해 계속 소장직을 수행하고 싶어서 로비도 하지만 상부에선 다른 곳으로 승진발령을 냅니다. 아내는 가족과 함께 살던 집에 그대로 남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나치 장교 가족이지만 별다른 잘못을 저지르는 모습이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처형의 대상인 유대인들 몇 명을 고용해서 목숨을 부지하게도 해줍니다. 하지만 이러한 평범한 가정의 뒤편엔 잔혹한 비밀이 숨어있음을 음향과 가끔 보이는 굴뚝의 연기(아마도 유대인의 시체를 소각하는)로 보여줍니다.
가정적인 아버지는 강에서 아이들을 보트에 태워주다가 강에 떠내려온 사람의 두개골을 보고 서둘러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마도 그 두개골은 죽은 유대인의 것이 아닐까요? 아이들에게는 잔인한 현실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이겠지요.
잔혹한 현실이 너무나 가깝게 있지만 길 건너 소장의 집 안에서는 평범한 일상이 이어집니다. 이 상반된 2개의 현실 중 잔혹한 면을 최대한 감춤으로써 오히려 잔혹한 현실을 상상하게 만듭니다.
이 영화는 제76회 칸 영화제 그랑프리와 사운드트랙 수상작이면서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 장편국제영화상, 음향상 수상작입니다.
제목인 <존 오브 인터레스트(The Zone of Interest)>는 '관심구역'이라고 해석해야 하나 했는데 찾아보니 독일어 단어 "das Interessengebiet"를 번역한 것이라 합니다. 독일어 Interesse(영어 Interest)는 관심이 아니라 금전적 이득, 이자에 가깝다고 합니다. 폴란드 지주들의 땅을 몰수해서 수용소를 만든 뒤 유대인들에게 강제 노역을 시켜 경제적 이익을 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대문에 걸린 유명한 문구가 "노동이 그대를 자유케 하리라(Arbeit macht frei )" 였지요.
이 영화는 잔혹한 장면도 없이 보는 내내 불편함을 참기가 쉽지 않습니다. 특히 가족들 간의 대화 중에도 집 밖수용소에서 나는 비명, 기계소리, 총소리 등의 소음이 아무런 여과 없이 마구 들어옵니다. 그 소음의 정체를 알고 나면 가족들의 평범한 일상이 사실은 소름 끼치는 잔인함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생각에 미치게 됩니다. 여기에 뭔가 불길한 느낌이 나는 음악 역시 보는 내내 불편함을 가중시킵니다. 영화를 보고 나면 극장에서 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입니다.
화면비율은 시네마스코프의 2.35:1와 달리 16:9 정도 거나 4:3 정도로 보일 정도로 가로 비율이 짧습니다. 이런 화면에서 카메라 앵글은 집안이나 정원을 좌우 대칭으로 잡고 거의 움직이지 않습니다. 주인공이 이동할 때도 카메라는 고정되어 있고 컷이 바뀌고도 계속 고정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얼굴을 클로즈업하지도 않고 일정거리를 두고 보여줍니다. 다시 한번 찾아보니 벽 뒤에 소형 카메라를 숨기로 촬영했다고 합니다. 이런 관찰 방식의 촬영기법으로 인해 관객들이 주인공 가족의 평범한 일상에 감정적으로 동화되지 못하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중간중간에 열화상 카메라로 촬영한 영상이 삽입되어 있는데 밤에 어떤 소녀가 강가 비탈에 사과를 박아 넣습니다. 아무 설명도 없는데 흑백의 화면 속에서 음향과 음악만으로 표현되는데 음산하면서도 뭔가 있을 것 같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킵니다. 혹시 도망친 유대인을 위해 식량을 제공하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암호를 남기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끝까지 설명이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희망을 상징하는지 모르겠지만 그 희망이라는 게 너무 어둡고 위험해 보이기도 합니다.
영화의 초중반까지는 그냥 평범해 보이던 부부는 조금씩 본색을 드러냅니다. 아내는 유대인의 버린 모피코트를 아무렇지도 않게 전리품처럼 챙깁니다. 남편이 전근을 가야 한다고 하니 아내가 짜증을 내며 유대인 가정부에게 화풀이를 합니다. 내가 널 살려두고 있는데 일을 이렇게 밖에 못하냐고 하죠. 남편은 (유대인) 소각을 훨씬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시스템을 소개하는 업자들과 회의를 하고, 전근을 가서 고위급 회의 때 아이히만의 수송계획을 언급하며 국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더 빨리 더 많이 죽여야 한다고 담담히 제안을 합니다.
그가 언급한 아이히만은 바로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에서 다룬 아돌프 아이히만입니다. 영화의 주인공 회스 중령은 너무나 일을 잘해서 결국 아우슈비츠 수용소장으로 복귀합니다.
우리는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보면서 잔혹함에 치를 떨고 한편으론 홀로코스트를 수행한 수많은 군인과 공무원들이 얼마나 성실히 자신의 할 일을 했는지도 알려져 있습니다. 국민들 역시 너무나 쉽게 선동을 당해 나치당을 선거에 뽑고 어제까지 이웃이던 유대인들 가슴에 별을 달고 박해를 넘어 학살로 몰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런 역사를 잘 알고 있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상식 밖의 인종차별과 정치적 선동에 의한 갈라 치기로 서로 싸우고 죽이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역시 군인과 공무원들은 그저 명령에 따라 성실히 일을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한나 아렌트의 말대로 '무사유(thoughtlessness)'가 평범한 악을 길러내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 봤습니다.
꼭 인종차별과 전쟁 같은 거대한 문제 말고도 이런저런 정책을 결정할 때론 다수의 행복을 위해서 소수가 양보(사실은 희생) 해야 한다고도 하고, 대통령이나 시장이 바뀌면 공무원들이 바뀐 정책에 따라 충실히 일을 하기도 합니다.
꼭 공무원들만이 아닙니다. 회사원들도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일을 해야 할 때도 있고 학생들도 자신에게 피해가 올까 봐 학교 폭력이나 학교의 부조리에 눈을 감기도 합니다. 평범한 사람들도 집값 떨어질까 봐 사회적 약자를 위한 시설 건립에 반대하기도 합니다. 여전히 종교적인 이유로 타 종교인을 일방적으로 배척하거나 성소수자를 죄인 취급하기도 합니다.
이 영화의 감독인 조나단 글레이저는 스스로 유대계임에도 불구하고 오스카 시상식 소감 중 '그들이 그때 무엇을 했는지 보세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하는지 보세요'라고 말하는 것이며, 가자 전쟁의 "비인간화"에 어떻게 "저항"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라고 호소하며 민간인 희생에 대해 비판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비판했던 악을 지금은 우리가 저지르고 있는 것 아닌가라는 비판이었겠죠.
(미국 홀로코스트 생존자 재단은 수상소감을 공개비판했다고 합니다)
https://isplus.com/article/view/isp202403130190
이 영화는 모두가 알고 있는 나치의 전쟁범죄를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각으로 보여줍니다. 아니 보여주지 않기에 더 드러나게 해 줍니다. 영화를 보고 나면 그들을 비판하는 것은 물론 우리 스스로도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안겨줍니다. 정말 보기 불편하지만 잘 만든 영화였습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너무 힘든 시대입니다. 분명히 예전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고 편리해졌지만 경쟁은 더 치열해지고 살기 더 팍팍해졌다고 합니다. 작은 일에도 충돌이 벌어지고 불필요할 정도로 분노하기도 합니다. 점점 포용력이 사라져 가고 있다고 느낍니다. 그래서인지 각자도생의 시대라고 합니다.
그렇기에 어쩌면 우리 스스로 성실하고 평범하게 악을 수행하고 있지는 않은지
틈틈이 돌아봐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