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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ONY May 22. 2024

포부와 책임감 사이의 저울질

꿀물이 혀에 닿기 직전

  꿀물이 혀에 닿는 순간이 좋을까, 꿀물이 혀에 닿기 직전이 좋을까. 뇌신경학적 실험에 따르면 꿀물이 혀에 닿기 직전에 기분이 제일 좋다고 한다. 막상 혀에 단물이 닿으면 쾌락적 동기를 유발하는 도파민의 수치가 기준치 아래로 떨어지면서 예상했던 만큼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 꿈꾸고 바라는 어떤 성취를 쟁취하고 난 다음을 미리 생각해 보면, 자신을 기쁘게 할 엄청난 일이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다.


  초반에 잠깐 번쩍하는 놀라움과 즐거움, 그게 전부다. 그래서 크게 보면 얻기 전과 얻은 후의 느낌 차이는 별반 다를 바가 없어진다. 폭죽놀이가 끝난 다음에 오는 공허함, 창업을 한 초보 사장님의 고뇌, 일을 그만둔 뒤에 몇 달 혹은 몇 년은 즐거워도 곧 다시 휘말리는 불안감 등, 로망이 만개했던 세계에 막상 진입하면 그 세계만의 힘듦을 마주한다. 심지어 뭔가를 하나 이루고 나면 이제는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하는 일이 생긴다. 꿀물이 떨어지는 순간을 기다리며 마냥 좋아라 하던 그 환영 속에, 내가 있었다.   


  2021년 8월 30일, 오전 9시 20분이 다 되어 갈 때쯤, 문자 한 통을 받았다. 행정조교 신청서를 메일로 보내고 일주일이 지나서 도착한 면접 안내 문자였다. '학생서비스팀 조교 면접은 9.1(수)에 있습니다. 9시 45분까지 학생서비스팀으로 방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형식적인 문자에 설렘을 느낄 일인가. 지금 생각하면 의아한 일이다. 남들보다 뒤처진 것 같은 불안감, 공부 이외에 특별한 경험이 없는 나이로 남겨질 것 같은 부끄러움, 돈까지 없는 현실이 두려움이 섞인 마음은 면접을 코 앞에 두고 조교가 되고 싶은 바람에 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 


  조교 일이 쉽고, 편하고, 할 일 없다고 생각될 수 있다. 정규직 직원 보다 업무 강도는 낮은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매사 마음 편한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행정 조교는 샌드위치 사이의 '햄'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학생과 교수, 외부인사, 그리고 학부모까지 불특정 다수 사이에 끼어 이들의 요구 사항을 해결해 주기 위해 존재한다. 응대는 기본이요. 봉급은 작고, 윗사람들은 하지 않는 번거로운 일을 해야 하고, 운이 안 좋으면 악질 교수님한테 가스라이팅을 당할 위험이 있으며, 교수들 사이의 싸움에 끼여 타인의 감정적 고통을 대신 감내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을 마주할 수 도 있다. 감정 노동에 관한 업무는 여기까지다. 나머지는 모두 행정 영역이다. 나는 한 달있다가 나가고, 심지어 하루 왔다가 그다음 날에 바로 못하겠다고 통보하고 자취를 감춘 황당한 사례도 본 적 있다. 조교도 엄연한 근로자지만, 조직의 수직 관계에서 제일 하바리에 위치하기 때문에 몇몇 인격이 덜 형성된 어른들의 노동착취에 의해 좋은 먹잇감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나는 지원한 부서의 업무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 나한테 맞는 업무인지 아닌지, 그 어느 것도 고려하지 않았다. 곧 맡게 될 업무가 무엇인지 모르고 마냥 돈 벌 생각에 유토피아를 꿈꿨다. 당장의 일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더 중요했다. 일을 하고픈 그 동기는 어디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책 한 장 넘길 정신적 에너지도 없이, 될 리가 없는 공부를 부여잡으면서 일도 하지 않고 있는 내 현실에서 작은 일이라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부러운 그 마음에서 시작한 것이다. 일을 하고 있는 남들을 부러워했던 비교심리가 일을 배우고 싶은 욕구로 포장된 것이었다. 


  2021년 9월 1일, 예정된 일정에 맞춰 면접을 보았고, 이틀 정도 지나서 인수인계를 받으러 오라는 최종 문자를 받았다. 일에 대한 기대심을 가득 충족시켜 주던 꿀물의 효용가치 얼마 지나지 않아 점점 추락할 것이다. 사회경험 부족과 업무적 무지, 그리고 잘하려는 마음이 합쳐진 화려한 카오스를 목전에 두고 사라져 갈 것이다. 마냥 좋아 보이기만 하는 타인의 삶을 꿈꾸길 원한다면 그 꿈에서 머물렀을 때가 제일 좋을 법이다. 막상 타인은 실제로 행복하지 않을 수 있고, 설령 만족스러운 인생을 산다고 해도 그건 타인이 만족스러운 것이지 내가 만족스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행복 자체도 영원하지 않은 법인데, 남을 모방한 행복은 오죽할까. 


  가까이 있었던 대학원은 비극이었고, 멀리서 보이는 돈과 직장을 가진 사람들의 삶을 희극으로 봤던 어리석음. 혀와 꿀물 사이의 작은 공간에서 저울질을 경험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꿀물의 달달하고 끈적한 질감은 아직 혀에 착지하기 직전이다. 내일이 돼서야 그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맛을 알게 되면 어려움을 얼마든지 감수하겠다던 그 포부는 어디까지 허용이 될까. 꿀이 혀 전체를 감싸고 식도를 넘어 사라질 때까지의 과정을 펼쳤을 때 대체 어디까지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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