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북인포레스트 Jul 07. 2024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절망감을 느끼는 지점에 대하여

  입에서 거짓된 문장들이 반복된다. 감사할 일이 아닌데 ‘감사합니다’. 가해자도 아니면서 가해자인 양 코스프레를 하며 ‘죄송합니다’. 혀끝으로 방출되기를 기다리는 희미한 단내를 조용히 삭히며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거의 비슷한 상황에 사람만 다를 뿐 종일 내도록 똑같은 말만 해야 하는 버거움을 겨우 짊어지고 얼얼한 입안의 감각을 느끼며 이름도 얼굴도 모르지만 ‘상담직’에 종사하는 아무개들이 떠올랐다.     


  입에 담지 못할 폭언과 협박, 조롱을 견디다 못해 정신적 피해와 고통을 겪는 상담 직원의 이야기는 너무 아프다. 보이지 않고 느껴지기만 하는 무자비한 음파가 잔인한 칼날이 되어 상처를 내고, 상처받은 사람이 되려 죄 없는 자신을 나무라고 자책하는 방법으로 문제를 돌파하다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는 현실은 매우 암담하다. 분명 그들의 주변에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혼자가 아니었을 텐데 가장 괴로운 순간에 홀로 남겨진 결말과 냉혹한 현실은 한편으로는 무섭게 다가오기까지 한다. 그들은 분해되어 잘게 쪼개질 수 없는 무게를 지닌 특별한 물질을 마음에 짊어지고 있었던 것일까.     

 

  역설처럼 들릴 수 있겠으나 한편으로는 내가 그들의 입장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틈을 가지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들에 비하면 조교를 하면서 겪은 경험은 초라한 빙산이고, 조그마한 열에도 사라질 여지가 다분한 작은 얼음덩어리에 불과하겠지만, 그들과 비슷해 보이는 경험이라도 있어서 이해의 여지가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했다. 친절이 멸종되어 가는 서글픈 현실이 정상화되어가는 사회 속에서 무리한 요구에 파묻히는 심정은 버려진 마음과 닮아서 함부로 대해도 되는 어떤 것으로 전락하곤 한다. 마음이 버려져서 나뒹굴고 있다면 절망감을 느끼는 것이다. 피로와 인내가 시간을 두고 서서히 누적되다가 중력을 벗어나 터지는 단계, 그것이 절망이다.   

  

  전화 응대를 받다가 참았던 설움이 봇물 터졌던 날이 있었다. 계약이 끝나기 한 달 전의 일이었는데, 맨 정신으로 그 자리에 앉아서 응대를 받아낼 용기가 없었고, 결국 일하지 못할 것 같다고 통보를 했었다. 며칠간 자리를 비웠지만, 결국 계약 기간을 다 채우고 인수인계까지 다 해주고 나왔었다. 어디서 ‘절망감’이라는 용어를 집어 들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니 매일 같이 얼굴을 보고, 같은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고, 점심시간만 되면 ‘밥 먹자’라고 먼저 말을 건네는 사람이 정작 나의 실수에 가장 먼저 매몰차게 등을 돌아서는 내면의 잔인함 때문인 것 같다. 차라리 모르는 사람이라면 더 나았을 터, 피곤한 인간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면 최악의 상황에서 결국 자신의 본색을 드러낸다. 결론은 지켜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있어도 나에게 없으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 감당하기 어려운 아득함 잠식되어 버틸 힘이 소멸한다.      

  참을 수 없으면 터진다. 절망감은 마치 터질 것을 알고 있지만, 위치를 모르는 다이너마이트와 비슷하다. 타인의 마음에 잠재된 다이너마이트를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뒤늦은 발걸음과 먹먹한 감정을 마주하는 일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이해란 나의 의지대로 하고 싶다고 도달 가능한 경지가 아니라, 이해는 오는 것이다. 어느 타이밍에 타인의 세계와 맞닿을지 모르고 어쩌면 눈 감는 순간까지 알지 못하는 세계일 수 있다. 이유 없는 혐오와 갈등은 이해할 시도도, 궁금증과 호기심도 없으며, 이해할 여지를 가질 인연이 닿지 않아서 생긴 일임을. 절망감에 도달함을.

매거진의 이전글 만 스물여덟의 단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