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 한다, 되어야 한다
절판된 책 중에 다시 출간되었으면 싶은 책이 있다. 미국에서 불교 명상을 연구한 1세대 학자, 대니얼 골먼(Daniel Goleman)이 엮은「마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인데, 신경학자, 생물학자, 심리학자 등 학계의 저명한 학자들과 티베트에서 살아있는 부처로 칭송받는 달라이 라마가「마음」이라는 다소 광범위한 주제를 토론한 내용을 골먼 박사가 엮은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을 사려고 검색을 해보니 무슨 이유에서인지 시중에 구할 수 없어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정신·신체 관한 책들이 우후죽순으로 쏟아지는 지금, 만약 개정판으로 다시 나오면 분명 찾을 사람이 있을 것인데 말이다.
나는 내면 소통이 좋지 못한 방향으로 치우쳤을 때 생기는 문제와 왜 인간은 부정적 소통을 번복하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품으며 이 책을 읽었다. 신경과학과 생명과학, 불교 간의 담대한 논쟁으로부터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으리라, 미래에는 그럴 것이라는 부푼 기대감으로 말이다. 책의 내용 중, 대니얼 골먼이 긍정적인 마음 상태의 조건에 대한 한 실험 결과를 설명한 단락에서 무엇이 죽지 못해 안달인 사회를 만든 건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왜 살아있는 사람에게 죽음의 의미로 가득한 말들이 더없이 어색하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는지, 그 이유의 답인지도 모르겠다.
「하얀 쥐 두 마리에게 똑같이 전기충격을 가하고, 한 쥐는 스스로 지레를 눌러서 충격을 멈출 권한을 주고 다른 쥐에게는 지레 없이 계속 전기충격을 가했다. 실험 결과에서 전기충격을 통제할 지레가 없는 쥐에게만 위궤양이 생겼다.(p.59)」
충격을 멈출 지레를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믿었던 쥐는 죽기 직전까지 다리를 허우적거렸을 것이다. 그러나 흰 쥐는 끝내 숨을 거두었고, 실험을 진행한 연구진들은 실험을 통해 자신의 삶을 자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권한을 많이 가질수록, 통제 감각을 가진 사람일수록 긍정적 사고를 할 확률이 높고 사망률이 적다는 결과를 얻었다. 이는 자율적인 통제로 운영되지 못한 삶은 단명(短命)에 이를 확률이 높고, 나를 둘러싼 세상의 잣대에 너무 순종하며 사는 것이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다는 의미를 넘어서 죽을 수도 있다는 의미가 된다. 나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어쩌면 실험 속의 흰 쥐가 그렇게 밟고자 했던 지레를 누르지 못해 죽어가는 모습과 비슷하지 않나 생각했다.
있어야 한다. 없어야 한다.
먹어야 한다. 배설해야 한다.
입어야 한다. 씻어야 한다.
들어가야 한다. 나와야 한다.
자야 한다. 일어나야 한다.
움직여야 한다. 멈춰야 한다.
쉬어야 한다. 일해야 한다.
답해야 한다. 조용히 해라.
완벽해야 한다. 대충 해라.
잡아야 한다. 놓아줘야 한다.
낳아야 한다. 키워야 한다. 공부시켜야 한다.
입학해야 한다. 졸업해야 한다. 취업해야 한다.
벌어야 한다. 모아야 한다. 써야 한다. 사야 한다.
걱정하지 마라. 불안하지 마라. 죽지 마라.
기억해라. 잊어라.
과도하게 학습된 의무감에 의해 우리는 자율을 잃고 심신의 건강을 잃어가고 있다. 「해야 한다」와 「되어야 한다」, 그리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식의 주문 밑에서 어린 친구들은 자라고 선택하고, 방황하고, 무너지고, 다시 생각한다. 무엇을 해야 하는 건가. 정녕 무엇이 되어야 하는 건가. 무언가를 해야만, 또는 하지 말아야만 커다란 재앙으로부터 피해서 생존할 수 있는 것처럼 일련의 사회적 주문들은 메시지를 던진다. 참고하면 좋을 말임을 부정하지 않지만, 주입식으로 듣고 말하다 보면 참고할 수준에서 의무감으로 의미가 변질되곤 한다. 외력에 의해서 마음에 없는 선택을 억지로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미완의 선택들과 간혹 밀려오는 불확실성을 대면하며 염원하던 자리로 다가가는 길을 걸을 수 없는 걸까.
성취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보통 쌓는 행위의 중요성만을 강조한다. 하지만 높이 쌓는 그 자체에만이 성취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 어떤 때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다른 길로 우회하는 과정에서 만난 새로움이 도움을 줄 때도 있고,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고자 다짐했던 그 마음이 되려 일을 지속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만두는 것을 꿈꿨지만, 마음 저편에 그만둘 용기가 없어서 계속하는 것이고, 그러면 언젠가는 도달할 날이 오지 않을까. 앞으로 무엇을 시도할 수 있는 사람인지 그 앎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흔히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자 떠난 여정은, 어쩌면 이러한 은연중에 만난 선택으로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힘들고 막막할 때는 억지로라도 이런저런 선택권을 자신에게 줘야 한다. '그렇게 살아도 된다', '늦어도 된다', '하면서 수정하고 바꿔도 충분하다'라고. 위의 쥐 실험처럼 선택할 권한이 많아지면 힘든 순간에 숨 쉴 수 있는 숨구멍들을 확보하게 된다. 인간이 만들어 낸 것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의문을 품기도 하고, 전혀 할 수 없을 것이라 믿었던 일에 몸담아 보기도 하고, 가까이든 멀리든 떠나보기도 하고, 지난 하게 머물러도 보면 그 속에서 얻어지는 구슬들이 한 개, 두 개 늘어날 것이다. 어떤 갈래라도 좋다. 여기저기 펼친 흔적의 너비를 세로로 세우면, 나름의 깊이가 되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