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소재가 된다
어떻게든 오지 않았으면 하는 일을 기어이 내 편으로 만드는 건 정말이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긍정의 힘과 플라시보(placebo) 효과를 믿는다. 그러나 긍정을 발휘할 힘을 모으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고, 위약 효과를 경험할 가짜 약이 없는 상황이라면, 당장 마주할 어려운 장벽을 넘어갈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벽을 벽으로 보지 않는 주문에 걸리는 것보다, 벽을 넘어가는 것을 목적으로 두는 것보다 더 유연하고 효과적인 방법은.
신발 끄트머리로 벽 밑면 어딘가를 그냥 툭, 고개를 숙이며 별 의미 없이 건들었다. 한참을 발로 벽면을 가볍게 차다가 말다가를 반복했는데, 문득 쓰고 싶은 욕구가 올라왔다. 기록하고 싶은 조그마한 열망 같은 것이었다. 입에 밥을 넣기 위함이 아니라 그냥 ‘써야겠다’는 무언의 이끌림으로, 문장에서 다음 문장으로 이어 나가고 싶은 순수함 덩어리로 그렇게 노트북 자판에 손을 올렸다.
카페 창가에 앉으니 하루의 시작이 참 낭만적이랄까. 커피를 마시고 약간 들뜬상태에서는 뭐든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를 것 같은 느낌에 양껏 취하게 된다. 분위기가 아름다우면 내가 하는 일도 재미있고 의미 있는 일이 되곤 한다. 그렇게 글 쓰는 일이 잠깐이나마 의미 있는 작업으로 변모했을 때쯤에 글을 써야 할 이유가 한 가지 떠올랐다.
때론 목적보다 수단이 더 중요할 때가 있다. 나한테는 그게 글이라는 생각이 번뜩 속을 밝혔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글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멈추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는데, 좀 운이 좋게도 작은 글이라도 써야 할 이유를 찾은 것이다.
글을 쓰는 일은 작품을 만드는 것, 그 이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일단 세상과 타인을 대하는 태도가 변한다. 세상에 벌어지는 사건과 나의 경험에 전보다 귀를 기울이게 된다. 작가한테는 소재 구하는 일이 제일 관건이라, 글을 쓰다 보면 내가 싫어하는 일, 혹은 피하고 싶은 상황과 사람. 채 떨치지 못한 기억과 현실의 어려움이 아이러니하게 참 소중하고 애틋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불편하고 낯설고, 잘못으로 빚어진 일에 자책할 법한 일들이 이상하게 고마운 인연이 되어버린다. 소재가 고갈되었다 싶으면 그렇게 뭐라도 경험해 보고 싶다던 한 가수의 심정이 참으로 이해된다.
쓰는 글들이 훗날 에세이가 될지, 소설의 스토리를 구성하는 중요한 뼈대가 될지, 수필의 추상적인 의미로 남을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소재를 낚는 글쟁이들한테 세상 그 자체로 선물이라는 사실이 어쩌면 더 중요할지 모르겠다. 뭐가 되었든 이 세상에 벌어지는 사건과 경험이 글로 말미암아 나에게 선물 같은 경험이 되어 주었다는 것이 참 감사할 따름이다.
슬픔이 특별해지는 것. 직진보다 우회전의 지혜가 돋보이는 것. 수단이 목적보다 중요한 것. 글을 목적 삼아 불편한 경험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 그렇게 모든 것은 소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