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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인포레스트 Oct 28. 2024

만 열여덟의 단상

엄마의 요람

  서서히 숨 죽어가는 겨울을 하늘은 견디지 못했다. 한기를 토해내는 비명 같은 바람결에는 을씨년스러운 기색을 감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무에서 시작한 바람은 주차장을 거쳐 건물의 주변에 밀착했다. 그러다 곧장 다른 곳으로 방향을 틀고는 지표도 없이 싸돌아다니기 급급했다. 백로 군락지가 자리한 낮은 산자락에는 백로의 울음소리를 대신한 스산한 서러움으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인적도 없는 한산함이 공허함으로, 묘한 서글픔으로 얼굴을 바꿔가던 넓은 교정(校庭) 사이로 괴이한 신음이 군데군데 피어났다. 이토록 수선스러운 찬 공기의 품속에 어떤 모녀(母女)가 있었다. 

  가랑이 사이를 물고 늘어지는 매서운 바람이 곧장 얼굴로 올라와 때릴 기세면, 모녀(母女)는 무언가에 저항하듯 안면을 바닥으로 향하여 숙였다. 살갗을 베는 공기 날을 온몸으로 감당해야 했지만, 생각대로 바람이 멈출 것이란 요행은 감히 바라지 않은 채, 느린 속도로 한 발, 한 발 묵묵히 내밀었다. 바람에 몸이 밀려 뒤로 넘어질 것 같으면 각자 점퍼 속으로 파묻고 있던 언 주먹을 꺼내어 굳은 손가락을 펴고는 서로의 손을 다시 맞잡았다. 그 어디에도 모녀(母女)를 반겨주는 이는 없었지만, 그렇게 걸었다. 

  그때는 몰랐을 거다. 오히려 보이는 게 이상한 일이다. 딸에게 엄마가 있었다는 걸. 엄마가 자신의 옆에서 함께 걷고 있었단 사실을. 몇 분이나 지났을까. 아니, 몇 초에 불과했던 것일까. 딸은 잘 잡고 있던 엄마 손을 놓아 버렸다. 그러고는 모로 부는 세찬 바람에 호피 무늬의 갈색 뿔테 안경알 뒤로 떠지지 않는 눈두덩이를 터실터실한 맨손바닥으로 비비적거리랴, 두 손으로 언 콧잔등과 두 뺨을 어루만지랴 정신이 팔렸다. 그사이 딸 옆에 가만히 있던 엄마는 부르튼 얇은 입술 사이로 하얀 입김을 후-하 내뱉으며 번민의 굴레로 조용히 노선을 바꾸고는 홀로 걷고 있었다. 

  엄마는 당신이 낳은 첫 딸아이가 대학생이 되어 곧 자신의 곁을 떠나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거제도 섬 안에서 자라 특별히 가족 여행도 많이 못 다녀준 어린 딸이 약 3주 뒷면 섬을 벗어나 타지 생활을 시작하는 현실이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괴괴한 하늘과 기이한 바람은 여전했다. 엄마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 뒤를 돌아서는 걸어온 길을 돌아보았다. 불그스레한 얼굴에는 본디 쾌활했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정작 딸도 관심이 없는 딸에 대한 걱정 한 바가지를 머리에 이고 가던 엄마는, 그 답 없는 무게를 감당하기 벅찼는지 잡고 있던 딸의 손을 놓았다. 그 대신 딸의 오른쪽 어깨 위로 당신의 왼쪽 팔을 조심스레 올렸다.

  고요함과 그다지 어울리지 않은 그녀의 모습에 이상한 생소함을 느낀 딸은 얼굴을 감싸던 작은 두 손을 빨간 바람막이 잠바 호주머니로 각각 집어넣었다. 엄마의 반쪽 어깨동무에 모녀(母女)의 몸은 거의 붙어있었다. 그때에야 비로소 딸의 귀에 어머니의 목소리가 쨍하니 박혔다. 딸은 자신의 오른쪽부터 왼쪽 목덜미까지 연한 곡선을 이루는 하얀 실을 따라 짜릿한 전류가 흐르는 것을 알았다.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딸이 꼭 쥔 엄마의 손을 자신의 빨간 오리털 파카 소매 안으로 쏙 집어넣었다. 이제부터는 그렇게 힘들지 않을 거야. 딸의 작은 손이 파묻힌 파카 속으로 자신의 따뜻한 온기를 건네주던 엄마는 읊조렸다. 비로소 어린 딸은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한기에 적응된 감각이 다시 곧추서며 살아나기 시작했다. 엄마는 딸과 하나로 연결된 팔을 아무 말 없이 살랑살랑 앞뒤로 흔들어주었다. 요람 같았던 움직임, 그것은 딸을 위함이었을까, 당신을 위함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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