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지능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돌아오는 길, 마음이 충만해지는 날이 있는가 하면, 마치 오물을 뒤집어쓴 듯 기분이 찜찜한 날이 있습니다. 그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요? 저는 그것이 '질문의 온도'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래 질문이란,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에서 피어나는 호기심의 꽃입니다. "당신의 생각이 궁금합니다"라는 말 속에는 겸손과 존중이 배어 있어야 하죠.
하지만 살다 보면 '질문'이라는 가면을 쓴 '검열'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그들은 궁금해서 묻지 않습니다. 이미 자신의 답안지에 정답을 적어두고, 당신이 그 답을 맞히는지 못 맞히는지 채점할 준비를 하고 묻습니다. 당신이 다른 의견을 내놓으면,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 빨간 펜을 꺼내 듭니다. "그건 틀렸어. 내 말은 말이야..."라며 시작되는 일장연설. 결국 그 질문은 대화가 아니라, 자신의 우월함을 확인받기 위한 도구였을 뿐입니다.
이런 대화는 폭력입니다. 상대를 동등한 인격체가 아니라, 자신의 지적 허영심을 채워줄 수단으로 여기는 태도니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이 불쾌한 채점관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그 질문의 의도를 향해 되물으십시오. "그게 왜 궁금하신가요?" 이 짧은 물음 하나가 상대의 숨겨진 의도를 수면 위로 끌어올립니다.
둘째, 과감히 유예하십시오. 우리는 착한 학생이 되어 꼬박꼬박 답을 제출할 의무가 없습니다. "지금은 답하고 싶지 않네요.", "생각해보고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기억하십시오. 답을 할지 말지, 언제 할지를 결정할 권한은 오직 답변자인 당신에게 있습니다.
진정으로 지혜롭고 배우려는 사람은 말로 상대를 시험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질문은 입 밖으로 나오기 전에 이미 그들의 눈빛과 행동에 서려 있습니다. 삶으로 질문하고, 행동으로 배우는 사람. 그런 사람 앞에서는 굳이 많은 말이 필요 없더군요.
특히, 직장은 군대가 아닙니다.
많은 상사들이 착각합니다. 자신이 부하직원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지만 직장 동료는 '동등한 인격체'이며, 단지 맡은 바 '책임의 크기'가 다를 뿐입니다. 상사는 명령하는 사람이 아니라, 더 큰 책임을 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지금은 2025년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쌍팔년도' 식의 수직적 위계와 강압적인 질문으로 조직을 굴리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수많은 데이터와 경험을 통해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과거의 망령을 붙들고 2025년의 인재를 다스리려 했던 기업들이 어떻게 무너져 내렸는지를.
그런 조직은 필연적으로 망했습니다. 질문이 사라진 곳에 혁신이 머물 자리는 없으니까요.
그러니 오늘 누군가가 구시대적인 질문으로 당신을 평가하려 든다면, 너무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그 무례한 시험지에 답을 적느라 당신의 소중한 에너지를 낭비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채점 대상이 아니라, 존중받아야 할 대화의 주인입니다.
그리고 당신을 괴롭히던 그 낡은 방식들은,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습니다.
© 2025. Digitalian. (CC BY-NC-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