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 <인어공주>
바다 깊은 곳에서 유영하는 장면을 빠뜨릴 수 없을 텐데, 대체 어떻게 보여줄까. 티켓오픈을 기다리면서 궁금증이 끊이지 않았다. 예매하고부터는 상상 속에서 안무가가 되어 여러 방법을 궁리하기에 이르렀다. 설마 지극히 사실적인 꼬리지느러미 의상을 입고 등장하여 상체 위주의 안무를 보여주진 않겠지?
국립발레단 200회 정기공연작 <인어공주> 무대와 마주 앉고서도 관람 직전까지 상상은 멈추지 않았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에서처럼 무용수를 공중으로 끌어올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비상의 자유로움은 유영을 닮아갈 수 있을 테니까.
존 노이마이어 안무로 재탄생한 인어공주의 움직임은 무대를 바다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물결 형태의 장치가 작동하지 않더라도 바다가 아닌 다른 곳이 될 수 없었다. 하체 길이 두 배는 됨직한 길이의 통 넓은 바지 의상이 파랑이었기 때문이다. 승무를 추는 여승의 기다란 소매가 허공을 휘감듯이 인어공주의 의상은 세 명의 남성 무용수에 의해 거대한 지느러미가 되었기 때문이다. 때때로 그것은 물결이 되었다.
인어공주와 관객의 눈에 잘 들어오지 않도록 검정 의상을 착용한 남성 무용수들은 하나의 유기체마냥 정확하면서도 재빠르게 이동하면서 춤을 추었다. 머잖아 다가올 땅 위에서의 움직임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고통의 크기만큼의 희열을 미리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에서 주목할 점은 원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시인이 등장한다는 거다. 중절모와 검정 연미복을 차려입은 시인은 사랑하는 이의 선상 결혼식을 목도한다. 인어공주처럼 모든 것을 다 바쳐 사랑할 것 같은 시인은 작가인 안데르센의 분신이라고 하는데, 시간에 따라 달리 보일 수 있을 듯하다. 이야기 안으로 들어간 관찰자 같다가도, 무대에 오를 수 없는 관객의 시선 같다. 마지막에 가까울수록 인어공주의 또 다른 자아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끝내 왕자를 죽이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한 인어공주와 그 옆자리를 채운 시인. 하늘에 가까워지더니 그들의 머리 위로 별 무리가 쏟아진다. 그녀의 슬픔이 별빛처럼 너무도 선명하게 반짝였다. 시인의 눈에서도 반짝였다.
사랑하는 이의 결혼식을 지켜봐야 했던 안데르센의 경험이 동화를 완성케 했다면 노이마이어 안무는 고전적인 캐릭터를 현대적인 인물로 탈바꿈하였다. 흰 벽으로 둘러싼 방 안에서 몸부림을 치는 동작은 소실점을 잃어가는 그림 같았다. 특히 핑크빛 드레스를 우스꽝스럽게 보이도록 유도하는 동작, 흡사 노파를 떠올리게 하는 걸음걸이는 신체의 고통으로 사랑받지 못한 자의 아픔을 극렬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얼굴이 아니라 온몸으로 비극의 주인공 가면를 쓴다면 이러한 무대가 가능할 터다. 발레리나 조연재에게 먼저 박수를 보내고픈 까닭이다.
의미를 부여하기 좋은 200회 작품으로 선택한 <인어공주>는 국립발레단의 앞날을 짐작하게 한다. 다양한 레퍼토리를 확보해 나가면서 변화에 게으름을 피우지 않겠다는 의지. 이 메시지를 읽은 상당수의 관객은 얼마만큼의 시간이 흐른 후에 인어공주와 다시 마주하길 바라겠지. <백조의 호수>나 <돈키호테>를 반복 관람할 때처럼 매번 새로움을 찾아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