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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뛰르 Jul 02. 2024

임윤찬, 열 손가락 끝으로 그리는 화가

임윤찬 피아노 리사이틀 20240622

ⓒ 목프로덕션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까지다. 로비에서 음악당 콘서트홀 출입은 불가. 내게는 티켓이 없다.


  30분 전부터 PC와 스마트폰 양쪽으로, 예술의전당 홈페이지와 티켓 공식 판매처에 접속하여 여러 경우의 수를 대비하면서 학습했다. 그러나 표준시에 맞춰 클릭하자마자 순식간에 내 앞에 칠천여 명과 만 이천여 명이 등장했다. 경쟁자의 숫자가 조금씩 줄어드는 모니터와 액정을 번갈아 봤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고 새로 접속하려고 시도하면 작은 운마저 기대하기 어렵다. 일시적 먹통이 되거나 대기자 수만 늘릴 게 뻔하다. 결제 시한에 성공하지 못한 누군가의 불운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행운이 되기도 하므로, 아직 내게도 기회는 있었다. 확률이 제로에 가까울 뿐 아직 제로는 아니므로 끈질기게 기다렸다.


  국내 가장 많은 객석 수를 자랑하는 클래식 전용 공연장이 이때만큼 작아 보였던 적은 없었다. 세상에, 예매 성공한 지인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사이 나빠지지 말라는 배려였을지도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결제 단계를 완료한 친구는 원하는 대학교에 등록금을 납부한 기분일 테니까. 반면 실패한 친구들은 자기네들끼리 뭉쳐 인생의 쓴맛을 운운하면서 서로 위로하기 바쁠지도. 최소한 하루 정도는.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곧 피아니스트가 무대에 오를 텐데, 로비에 꽤 많은 이들이 무리 지어 있었다. 서두르는 기색도 없었다. 입장 지연이 아니라면, 설마 나처럼?


  그들 뒤에 서는 것으로, 나 또한 한패임을 확인시켰다. 한때는 경쟁자였으나 현재는 동료애를 과시해도 무방할 거리를 유지하며 서 있었다. 경쟁에 밀린 것으로 더이상 행동하지 않는 다수와 달리 우리는 어떻게든 공연을 함께한다는 자부심이 여기저기서 고개 들었다. 미어캣처럼.


  모든 일에는 일장일단이 있기 마련이다. 물론 감상하기 적합한 객석에 앉아야 음악에 몰입할 수 있겠지만 피아노와 피아니스트를 확대하여 고정 촬영하는 실시간 영상도 나쁘지 않았다. 맨 앞자리보다 시야가 좋긴 했다. 연주에 집중하면 다리 불편쯤이야 잊을 수 있는 일이다. 저 멀리 카페테리아에서 원두커피 갈아 내리는 소음이 거슬린다는 것은 그만큼 음악에 빠지지 못했음을 방증하는 꼴이다. 나를 다그치면 될 일이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여 임윤찬이 내게 어느 계절을 좋아하느냐고 물어온다면 가을, 더 정확하게는 시월을 좋아한다고 대답하겠다. 한기가 기지개를 켜다가 재빨리 그늘에 숨어버리는 시월의 아침 길을, 신산스러운 기억이 흩어지는 저물녘 시월의 하늘을 좋아한다고. 시월을 유월의 건반에서 볼 줄 몰랐다고. 당신으로 인하여 시월을 조금 더, 좋아하게 될 것 같다고.


  차이코프스키의 《사계》를 연주하다가 한참 숨을 골랐다. 피아니스트는 〈시월〉 ‘가을의 노래’을 앞두고 청중에게 정적을 먼저 들려주었다. 이어 〈시월〉의 첫 타건을, 그 첫 음을 명징하게 보여주었다.


  어느 인터뷰에선가 임윤찬은 이렇게 말했다. “첫 음을 누를 때 심장을 강타하지 않으면 그건 연습이 아니잖아요.” 그가 말한 첫 음이 이런 거였구나 싶었다. 두 번째 음도 첫 음처럼 눌렀겠지만 그처럼 피아노 건반과 마주하지 못하는 탓에, 그저 계절이 쌓여가는 선율에 귀를 바짝 가져갔다.


  다시 세상이 티켓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나뉘는 인터미션이 지난 후, 2부 공연이 시작되었다. 엉덩이는 의자에, 두 손은 건반에 동시에 앉으면서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을 연주했다. 벗의 유작 전람회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한 음악이 무대를 가득 채우더니, 이내 객석으로 쏟아졌다. 한 대의 피아노와 한 명의 피아니스트가 만들어 내는 장중함이란. 이를 영상으로 온전히 담아낼 수 있을까.


  타건의 반동에 들썩이던 엉덩이가 건반을 내리치는 지경에 이르자 허공에 잠시 머물다 내려왔다.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지던 머리칼이 고개를 들어 올리는 순간, 일제히 한곳을 가리켰다. 그곳에 피아노 건반이 있었다.


  다 뱉어내지 못한 감탄으로 입을 다물지 못한 청중을 그리고 있었다.


  임윤찬은.


  그랜드피아노 건반을 팔레트 삼아 열 손가락으로.


  유리문을 밀고 들어갔으나 콘서트홀 게이트에서 멈춰야 했다. 그러나 스무 살 피아니스트가 막 그려낸 그림 안으로는 들어갈 수 있었다. 들어가서 무대가 정면으로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무대 위 조명이 밝아졌다. 리스트의 〈사랑의 꿈〉이 흘렀다.          



     

* 리스트의 〈사랑의 꿈〉은 앙코르곡.     


피아니스트의 존재를 알려준 임윤찬 첫 음반(2020년 출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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