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편지에 부디 놀라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안녕하세요, 은연주입니다.
답장은 부끄러울 것 같아 보내지 말라고 하셔서 꽤나 고민했지만 이메일 답장 대신 브런치에 쓰는 것이니 이건 답장이 아니라 새 편지라고 우겨볼게요.
오늘은 이직하고 처음으로 회식을 했어요. 팀원 한 분이 나가게 되셔서 송별 회식이었지요. 아시다시피 지난 3개월 간 밤낮없이 잠도 못 자고 일만 했어요. 회사가 바쁘고 일이 많은 것도 맞지만 이 현실을 잊을 구실이 필요했어요.
남편과 정상인처럼 마주 앉아 대화하는 건 꿈도 못 꿀 현실이라는 걸 알기에, 이혼조차 제 뜻대로 하지 못하는 게 너무 답답하고 숨이 막혀서 계속 일로 도망쳤어요. 그랬더니 제 몸과 마음이 더 망가지더라고요. 그래서 최근 퇴사를 고민했는데 다른 분이 저보다 먼저 나가게 되어서 저는 말할 타이밍을 놓치고 얼떨결에 떠나는 이에게 손 흔들어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회식 도중 제 옆자리에 앉은 동료분이 묻더군요. "연주님, 근데 연주님은 왜 결혼반지 안 끼세요?"
저는 자연스럽게 제 맞은편에 앉은 다른 기혼자분께 화제를 넘겼어요. "근데 땡땡님도 안 끼시네요?" 맞은편에 앉은 땡땡님은 아기 키우면 반지 같은 건 낄 수 없다고 답했어요. 저는 그럼 애도 없고 신혼인데 롱디 한다고 했으니 뭐라도 둘러대야 했어요. 같은 테이블에 앉은 분들이 제 허전한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시선을 고정하는 게 느껴졌어요.
"아 저는 귀걸이도 안 하잖아요. 몸에 뭐 걸리적거리는 거 불편해서 싫어해요. 액세서리는 진짜 못하겠더라고요. 결혼반지도 그래서 집에 모셔만 놔요."
사실 정말 오랫동안 큰 그림을 그린 거짓말이었어요. 원래 저는 작고 반짝이는 걸 좋아해서 주얼리에 관심이 많았어요. 가방보다 보석이 더 좋다고, 금붙이가 좋다고 말하는 까마귀였지요. 그래서 결혼 준비할 때도 반지 고를 때가 제일 즐거웠던 기억이 나요. 하지만 이 거짓말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회사에 단 한 번도 귀걸이조차 하고 간 적이 없어요. 의도하지 않았어도 결국 매일 거짓말을 치면서 살고 있는 제 자신이 너무 싫었어요. 저는 반짝이는 목걸이, 반지, 귀걸이 다 너무 좋아하는데 말이에요. 오래 준비한 거짓말 덕분에 "아 그러고 보니 연주님은 진짜 악세서리한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네요"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 있었어요.
회식을 하다 보면 아무래도 편안한 분위기에서 개인적인 이야기가 오고 갈 것 같아서 강아지 핑계를 대고 자리에서 일찍 빠져나왔어요. 괜히 결혼반지 때문에 불편해진 마음으로 집에 가는 길에 지호 어머니의 긴 편지를 받았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필명까지 만들어서 사생활을 팔고 있지만 사람들은 사실 자기 속마음을 이야기하는 게 쉽지는 않은 걸까요. 하루에 한 통 이상의 이메일을 받고 있어요. 저는 처음에 그런 공감과 위로의 글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한 뒤로 비슷한 남편을 만나서 상처받은 마음을 어디에도 꺼내지 못하는 분들의 피멍 든 절규를 많이 듣게 되었거든요.
하지만 제 시어머니와 같은 입장이라고 하시니, 그리고 아드님이 아직 한창 어린 사춘기 소년이라고 하시니 또 다른 마음으로 읽게 되더군요. 제가 감히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타인의 세계를 잠깐 여행하고 온 기분처럼 깊게 빠져서 읽었습니다. 혼자서 가정을 붙잡고 애쓰셨을 모습이 눈에 그려져서 눈물이 났어요. 시어머니도 이런 마음이셨을까 하는 마음으로 읽었어요.
솔직히 제 시어머니는 남편을 키우면서 이상한 낌새조차 느끼시지 못해서 지금 늦은 나이에 더 세게 후폭풍이 오신 것 같아요. 시부모님도 아들이 마흔 돼서야 이 지경인 걸 아셨으니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 얼마나 안타까울까요. 얼마 전 남편의 풀배터리 검사 결과가 나왔다는데 의사도 진단 내리기 어려운 가봐요. 그의 정신세계가 어떻게 엉키고 꼬여있는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단순히 제 이혼 과정이 막막하고 제 상황이 참담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요. 그는 제 옆에선 항상 편안한 모습을 보여준 좋은 사람이었거든요. (만약 그게 전부 연기였을 지라도.)
또 어쩌면 제 남편 홍길동의 치료와 각성을 그의 부모만 바라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뜻밖에 처음으로 해보게 된 것 같아요. 이 글을 읽는 모든 아들 엄마들도 엄마라서 그리고 여자로서 간절히 기다리고 응원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요. 애석하게도 홍길동 씨는 치료가 조금 되더라도 제게 사과할 것 같지는 않아요. 자기 인지와 사회화가 학습될 수는 있어도 사랑은 머리로 배워서 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기만 당한 제 사랑에 대해서 사과를 받아야 하지만 남편이 마음을 나누고 느끼는 걸 진짜로 이해할 것 같진 않아요. 물론 어느 정도 병식이 생기고 자기 자신과 타협하고 포기하듯이 받아들여서 사과하는 장면을 연출할 수는 있겠죠. 어디까지나 평생 마스킹하면서 사회생활을 해온 사람이라서 그런 그림은 저도 예상했고,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제가 어떻게 반응할지 시뮬레이션도 여러 번 상상해 보기도 했지요.
그렇게 갖은 상상을 해봐도 저 역시 여전히 어리석은 사람이라서 찰나의 감정에 놀아나곤 해요. 마음 같아서는 홍길동 씨의 실명과 그의 집안에 대해서 세상에 낱낱이 까발리고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로 처벌받고 싶을 정도로 울화가 치밀 때도 있어요. 그게 진정한 복수도 아니고 오히려 저도 잃는 게 많다는 걸 아는데도 말이죠.
'그래도 어떻게 자기가 좋아하는 걸 찾고 나중에 커서 자기 앞가림은 하면서 살다가, 결혼은 기대도 안 하지만 기적같이 사랑 많이 받은 여자를 만나서 사랑이 많은 그녀의 가정 일부분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다. 열심히 키우면 그럴 수 있을 거야.' 했던 어머니의 꿈을 제가 깨버린 것 같아서 너무 마음이 아프고 죄송했어요. 제 브런치를 알게 된 후에 충격 혹은 절망을 알고 모든 희망을 더 잃고 점점 말라비틀어진 식물처럼 변하셨다는 부분말이에요. 제 글이 불러올 파장을 생각하지 못한 건 아닐까 잠시 자책도 했습니다.
하지만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 안다는 말처럼 마지막에 제 글이 결국 지호 어머니에게 진주로 다가가서 반짝인다는 사실에 저도 순식간에 다시 천국과 지옥을 오가듯이 안도했어요. 비록 제 삶은 처참히 망가졌고 부모님까지 고통받으며 친척들에게까지 온 가족이 거짓말하느라 지치지만, 저는 정말로 제 눈물이 진주가 되고 있다고 믿고 있어요.
우아한 척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무슨 일이 생기든 받아들이기 나름이잖아요. 저는 사람은 경험한 만큼 그 세계가 넓어진다는 말을 믿는 경험주의자예요. 이 경험을 어떻게 쓰냐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약으로 쓰일 수 있고 등을 토닥여주고 성장시켜 준다면 그걸로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시간이 몇 년 걸릴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그래도 나 진짜 잘 살았다, 잘했어.' 하고 스스로 칭찬해 줄 거예요.
저는 결혼식이라는 교통사고를 당했지만 대신 마음이 더 넓어진 것 같아요. 저를 구원하기 위해 혼자서 글을 쓰기 시작했더니 저도 모르게 글을 통해 많은 사람들과 닿아있더라고요. 사람은 역시 고독하게 모든 걸 끌어안고 혼자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걸 다시 깨닫게 되었지요. 그리고 우리 사회가 얼마나 자아성찰할 기회가 없는지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걸 '성격 차이' 한마디로 치부해 버리잖아요. 아마도 제 이혼 사유 역시 종국에는 성격 차이로 정리되겠죠. 하지만 그 성격 차이라는 네 글자가 주는 압박감에 제 남편 홍길동 씨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잃어버리고 긴 세월 방황하다가 이제는 아예 자아가 없는 괴물이 되어버린 건 아닐까 생각해요.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옳고 그름, 맞고 틀림만 말하는 세상이라면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들은 외부 세계에 더 크게 휘둘리고 상처를 받게 되겠지요. 돈을 쓰는 것보다 마음을 쓰는 게 더 당연해지는 세상이 오면 좋겠어요.
브런치 작가에게 제안하기 버튼으로 이메일을 보내면 '누구누구님께서 제안하셨습니다.'라고 실명이 떠요. 그래서 제 브런치는 가상의 공간이고 어차피 아무도 지호가 누군지 모르니 제목에 누구누구님께 하고 이름을 쓸까 잠시 고민을 했습니다. 솔직히 저는 저희 엄마도 이름이 있는데 '연주 엄마'로 불리는 게 너무 싫고 아쉽거든요. 하지만 편지를 두 번 읽고 세 번 읽고 결국 지호 어머니에게 라고 쓰기로 마음을 정했어요.
왜냐하면 저는 편지 마지막에 써주신 '지호 엄마 드림'이라는 부분에서 희망과 사랑을 강하게 확신했거든요. 지호라는 이름을 한 번 더 불러줘야 용기도 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머니도 지호도 각자의 세계에서 모두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하다는 말처럼 어머니가 지호에 대해서 바르게 인지하고 도와주시면 지호는 행복한 어른이 될 수 있을 거예요. 지호의 세계는 정말로 엄마가 전부이니깐 그 세계를 조금 더 키워주는 것도 엄마에게 달렸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디 어머니의 마음에도 연꽃이 만개하기를. 그리고 말씀해 주신 대로 홍길동 씨가 불태워버린 제 마음속 꽃밭도 오히려 불이 났기에 옥토가 되어 더 예쁜 꽃이 만개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 자 한 자 열심히 쓰며 진주알을 꿰는 작업을 해나갈게요. 지호 어머니께서 제게 건네주신 따뜻한 마음 덕분에 저도 버스에 내려서 집에 오는 길에는 벚꽃을 봤어요. 매일 다니는 길인데 이제야 처음으로 꽃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아무리 사람에 상처받고 힘들어도 결국 다시 치유받는 것도 사람인 가봐요. 저는 지옥까지 끌려가는 우울이 뭔지 알았으니 그럼 사랑의 힘을 더욱 믿을래요.
우리 둘 다 수면제 없이 푹 잘 수 있는 밤이 어서 오기를 바랍니다. 오늘밤은 좋은 꿈 꾸시고 글벗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편지 주세요.
은연주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