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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이는 커서 시인이 될 거예요.

인생이 시라면 저는 시인처럼 살고 있어요 선생님.

by 은연주



나는 분명 기억력이 좋은 편인데 포괄적인 기억력보다는 다분히 주관적인 영역에 대해서 엄청 자세히 기억한다. 예를 들어 중고등학교 시절 몇 학년 몇 반이었는지도 기억이 잘 안 나고, 담임 선생님들 성함은 더 기억이 안 난다. 그러니 초등학교 시절은 훨씬 먼 옛날이라 뭐 하나라도 제대로 기억하면 용하다는 생각이 든다.




초등학교 6년 중 유일하게 기억나는 선생님 성함이 있는데,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었다. 최미숙 선생님. 하나뿐이던 딸이 이미 대학생이었던 선생님은 엄마보다 훨씬 나이가 많으셨다. 아마 지금쯤 칠십 대 중반 할머니가 되셨겠지.


5학년때 많이 틀려도 된다고, 공부 잘하는 것보다 왜 틀렸는지 아는 게 훨씬 중요하다고 멋있는 말을 했던 남자 선생님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데 왜 3학년 때 담임 선생님 이름은 생생히 기억나는 걸까.


선생님은 어깨를 살짝 넘게 기른 파마머리를 항상 반묶음하셨고, 단정한 투피스 치마를 자주 입으셨다. 어린 마음에 선생님이 바지 입는 모습을 한 번도 못 봐서 우아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어느 봄날, 교내 동시 대회가 있었는데 나는 선생님을 관찰하고 <나비 선생님>이라는 동시를 써서 냈다. 선생님이 자주 입었던 발목까지 오는 긴 다홍색 플리츠스커트는 꽃잎이 움직이듯 하늘하늘거렸다. 마치 나비의 움직임 같아 보였다.


선생님이 칠판에 글씨를 쓸 때면 손 끝에 블라우스 소매가 나풀거렸다. 선생님 등에 곧 날개라도 달릴 것 같았다. 선생님은 항상 우리에게 너희가 이렇게 모여있으니 꽃밭처럼 환하고 예쁘다고 말씀하셨다. 그럼 선생님은 진짜 나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쓴 동시는 교내 동시대회에서 1등을 하고 교육청까지 올라갔다. 선생님은 학부모 상담이 있던 날 우리 엄마를 보고 그런 말을 하셨다.


“어머니, 이 아이는 커서 시인이 될 거예요.”


학원 대신 맨날 소파에 누워서 책 읽고 침대에 엎드려서 책 읽던 아홉 살 꼬맹이가 시에 대해 뭘 안다고 선생님은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엄마는 그날 난생처음으로 내가 글쓰기에 재능이 있는 것 같다는 말을 듣고 집에 와서 왜 엄마한테는 시 쓴 거 안 보여줬냐고 물어봤다.


"선생님이 너 시에 재능 있대. 엄마한테는 왜 칭찬받은 거 말 안 했어?"

"몰라. 그냥 글이랑 그림 같이 그려서 내라고 한 건데. 엄마 근데 시가 뭔데?"


아쉽게도 엄마가 시를 뭐라고 대답해 줬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엄마의 답변도 충분히 시 같았을 것이다.


시인이 될 거라는 칭찬을 받았다고 그 후에 계속 글을 쓰거나 정말 작가를 꿈꿨던 건 아니다. 인생 첫 시였던 나비 선생님 이후에는 더 이상 시를 써본 적이 없다. 공부를 왜 해야 되는지 모르겠어서 공부에는 흥미가 없었다. 동기부여는 안 되지만 머리빨로 성적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인생 두 번째로 쓴 시는 대학교 입학 때였다. 나는 수능을 보고 정시로 대학에 들어갔지만 시를 썼다. 합격과 불합격만 있는 대학 입시에서 내 시가 도대체 어땠는지 피드백 받을 기회는 없어도 어쨌든 합격했다.


시를 써서 대학에 들어갔는데 그 후로 단 한 번도 시를 쓰지 않았다. 시가 뭔지 몰라서. 시를 써보겠다며 시 수업을 들어본 적도 없고 문학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스펙 쌓겠다고 쓸데없이 인턴이나 하고 토익 공부만 했다. 돈이야 평생 벌텐데 왜 그렇게 조바심 내며 취업 준비만 했는지 모르겠다. 어렸을 때부터 책을 많이 읽었으니 ‘자소설’ 하나는 기깔나게 잘 쓰는 편이었다.




인생에 단 두 편의 시를 썼다. 아홉 살에 썼던 나비 선생님이라는 동시와 제목도 소재도 기억나지 않는 대학교 입시용 시. 그 뒤로는 항상 딱딱하고 틀에 박힌 이야기만 썼다. 매출이 어쩌고 성장률이 저쩌고 판관비는 또 어떻고. 그렇게 취업이 하고 싶었는데 막상 돈을 벌 때 쓰는 글은 하나도 아름답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회사를 다니고 나서부터 시집을 자주 찾아 읽었다. 이미 너무 먼 길을 돌아와 버렸지만 그래도 심장이 더 차가워지기 전에 미지근함이라도 유지하고 싶은 마음에. 퇴근길에 교보문고에 들러 문학과 지성사 시집 코너를 기웃거리면 나도 아직은 따뜻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런데 며칠 전 '작가에게 제안하기'로 이메일이 왔다. 내 글을 매일 밤 자기 전에 읽기 위해 기다리는 독자인데, 브런치에는 비밀 댓글 기능이 없어서 공개 댓글을 달기엔 부끄러운 마음에 이렇게 이메일을 쓴다고. 그분은 나와 비슷한 일을 미리 겪은 사람이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돌변한 남편 때문에 크게 충격받고 몇 년을 마음 고생하다가 겨우 도망치듯 이혼했다고 하셨다. 이쯤이면 결혼하자마자 돌변하는 두 얼굴의 남편 이야기가 도시 괴담이라도 되는 걸까.


시간이 꽤 흘렀고 전남편에게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행복하지만 솔직히 알게 모르게 피해의식이 생긴 것 같다고 하셨다. 살기 위해 이혼을 했어도 결국 예전의 밝았던 자기 모습은 영영 사라진 것 같다고. 이혼녀라는 주홍글씨도 힘들지만 더 이상 사람을 믿지 못하는 자신이 제일 싫다고. 우연히 브런치 메인에 떠서 읽게 된 내 글은 자기랑 너무 똑같은 상황인데 그래도 희망을 노래하는 것 같아서 좋다고. 은연주 작가님 글은 섬세해서 마치 시 같다고. 무사히 안전이별 하시길, 이혼하고 나서도 계속 글 써달라는 내용의 긴 응원 편지였다.




유쾌한 경험도 아니고 행복보다는 불행 타령에 가까운 내 글이 시 같다는 말을 들으니 문득 기억 저편에서 최미숙 선생님이 떠올랐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 말씀대로 시 쓰는 사람이 되진 않았지만, 인생이 시라면 제법 시인처럼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선생님을 향해 동시를 썼던 아홉 살 어린이는 청년과 중년의 중간 어디쯤에서 기꺼이 아파하고 슬퍼하고 있어요.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려 꼭꼭 씹어먹으며 음미 중이에요. 건강히 잘 지내고 계시죠? 할 수만 있다면 한 번쯤 뵙고 싶어요.




나는 여전히 시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번외]

생각난 김에 혹시 최미숙 선생님을 찾을 수 있을까 궁금해서 검색해 봤더니 교육청 홈페이지에 스승 찾기 서비스가 있지만 퇴직한 경우에는 불가능하다고. 그래도 요즘은 인터넷으로 학교 생활기록부도 수 있는 세상이라길래 호기심에 내 생활기록부를 확인해 봤다.


근데 1학년 '외모에 관심이 많음' 뭐죠? 그냥 나 예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지. (ㅋ)

오..! 나도 처음 알게 된 사실. 고등학교 3년 내내 계속 글쓰기 칭찬을 받았다. 뛰어난 모범생은 아니어서 선생님들은 나를 기억 못 하겠지만, 그래도 지금의 은연주를 있게 해 준 선생님들이 생각난다. 최미숙 선생님 말고도 매 학년마다 나를 예뻐해 준 국어 선생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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