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은 나보고 좀 더 이기적으로 살아도 된다고 했다.
나는 태어나보니 첫 아이여서 엄마 아빠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그때는 아낌없는 사랑만 받았다. 다만 애석하게도 나의 최고 전성기는 얼마 가지 못해서 끝났는데, 엄마가 연년생으로 애들을 낳느라 나는 만 2살이 되기도 전에 언니 노릇을 해야 한다는 중대하고도 숭고한 임무를 받아야만 했다. 물론 덕분에 지금도 내 평생의 베프라는 여동생을 얻었지만.
엄마는 최근까지도 항상 나한테 ‘넌 첫째라서 사랑과 관심을 독점한 애’라고 표현하곤 했다. 정작 내 기억 속에 나는 어릴 때부터 항상 동생 몫까지 억울하게 혼났던 기억 밖에 없는데.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던 해에 주위 어른들에게 많은 축하와 선물을 받았다. 근데 내가 선물 받은 공책 세트와 필통을 동생이 갖고 싶어 한다는 이유만으로, 난 써보지도 못한 채 몽땅 뺏겼던 기억이 제일 강렬하게 남아있다.
“입학하는 건 난데 왜 아직 한글도 쓸 줄 모르는 동생한테 깍두기공책이랑 그림 일기장이 왜 필요해?“ 7살 어린이 치고는 꽤 논리적으로 따졌지만 엄마의 대답은 너무 간단하고 쉬웠다. ”네가 언니잖아. 그러니깐 동생한테 양보해야지. 넌 이제 유치원생 애기도 아니고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애가 왜 이렇게 이기적이니?“ 였다. 내가 좋아했던 캐릭터가 그려진 그 공책 세트의 그림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걸 보면 정말 억울했었나 보다.
그 후에도 나는 동생 대신 억울하게 혼난 일이 많았다. 내가 혼났던 이유의 90%는 동생 때문이었다. 다 같이 잘못해도 언니인 나만 대표로 혼났고, 동생이 잘못한 거는 내가 언니라서 대신 혼났다. 동생은 받아쓰기 50점을 맞았는데 너는 혼자 100점 맞으면 좋냐고, 왜 동생한테 받아쓰기 하나 제대로 가르치지 않냐고 손바닥 맞은 적도 있고, 동생이 실내화 주머니를 1주일에 두 번이나 잃어버렸을 때 너는 왜 동생을 제대로 챙기지 않았냐고 혼난 적도 있다.
이렇게만 말하면 내 유년기가 왠지 매우 불우하게 들리겠지만, 사실 첫째라는 이유로 주변의 사랑과 부모님의 기대를 많이 받은 것도 사실이므로 마냥 억울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친척들이나 동네 이웃들은 우리 엄마, 아빠를 부를 때 OO엄마, OO아빠라고 항상 앞에 내 이름을 붙였다. 그것뿐일까. 우리 집에서 제일 먼저 중학교에 들어가는 것도 나였고, 제일 먼저 수능을 보는 것도 언제나 나였기 때문에 항상 그만큼 더 많은 축하와 주목을 받은 것도 맞다.
맨날 언니, 형 옷을 물려 입어서 억울한 전국의 동생들이 있듯이 그만큼 내가 먼저 입은 새 옷의 개수도 동생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을 것이다. 그 밖에도 내가 미처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첫째의 특장점이 분명히 더 있겠지. 부인하지 않겠다.
게다가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동생과 점점 더 가까워지면서, 지금도 동생에게 많이 의지하고 고맙다.
심리 상담이 50회기 이상 진행되면서, 상담 주제는 점점 남편과 나 > 남편에 대해서 > 나에 대한 것으로 변해가고 있다. 부부 관계가 나와 남편의 상생이라면,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는 누구인가, 나의 내면과 뿌리에 대해 살펴보는 것 역시 중요하다.
어차피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의 방향이 이혼으로 정해졌다면, 이제 남편에 대해서 파헤치는 것보다 나도 몰랐던 나에 대해 더 많이 알아가는 것이 오히려 다시 혼자가 될 나에게도 더 피가 되고 살이 될 것이다.
애들 많은 집 첫째 딸들은 주로 엄마 대신 엄마 역할을 수행하듯이, 우리 엄마도 내게 약간 그런 역할을 기대했던 것 같다. 엄마는 부잣집 막내딸 포지션으로 자랐고, 엄마의 가족은 그 시절 평균적이었던 5남매, 6남매보다도 훨씬 더 많은 대가족이었다. 그러니깐 엄마한테 익숙한 큰딸이란 자리는 아마도 엄마와 거의 20살 넘게 차이가 나는 한국전쟁 전에 태어난 나의 큰 이모일 것이다.
하지만 큰 이모와 달리 나는 세월이 흘러도 한참 지나서 ‘요즘 애들‘로 태어났다. 그래서 나는 6.25 때 엄마 대신 동생들을 키우던 그 첫째가 아니었고, ’내가 첫째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동생 낳아달라고 요청한 것도 아닌데 왜 나한테 강요하냐‘고 엉엉 울면서 따지는 되바라진 첫째였다.
나도 동생들도 모두 어느 정도 자란 후에는 엄마한테 혼날 일이 없었고, 더 이상 동생 대신 내가 혼나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엄마에게 부채감을 느끼고 있는 어른아이로 자랐고, 집 밖에선 아무리 천진난만해도,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처럼 집안에선 의젓한 큰딸이었다. 주위 어른들이 다들 인정하고 칭찬하는 잘 자란 큰딸.
물론 나도 엄마가 시켜서 싫은데 억지로 엄마 말을 듣는 건 아니었다. 엄마가 원하는 것들의 대부분은 내가 하기 싫어하는 것들이라서 오히려 거의 다 안 했다-결혼 빨리 할 것, 여행 다니지 말 것 등등-
나는 태생부터 정이 많기 때문에 내가 좋아서 효도하는 것들이 더 많았다. 내돈내산으로 엄마 아빠 모시고 국내며 해외여행 다니고, 소형가전부터 75인치 TV에 안마의자까지 집에 바꿔주지 않은 가전이 없다. 환갑 때는 서프라이즈 파티로 특급 호텔 레스토랑을 예약하고 케이크 토퍼를 뽑으면 현금다발이 줄줄이 나온다는 케이크까지. 정말 안 해본 효도가 없었다.
하지만 바로 거기서 잘못된 점을 찾아내서 바로잡아야 한다고 상담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제가 좋아서 한 건데요? 엄마, 아빠도 좋아하셨고 엄마, 아빠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저도 뿌듯하고 좋았거든요.”
우리 집이 힘든 것도 아니고 부모님이 사달라고 한 적도 없고, 오히려 너 제발 집에 돈 쓰지 말고, 니 돈이나 좀 모으라는 타박을 들을 때가 더 많았지만 애당초 이렇게 자라와서 이런 행동을 하는 게 차라리 더 익숙하고 당연했다.
“OO씨는 인식하지 못하는, 아주 어린 시절의 무의식 속에 애기OO이는 불안한 거예요. 내가 혼자 차지하던 사랑을 동생이랑 반으로 나눠야 하네, 혹은 내 사랑이 몽땅 동생에게 가버렸네 하는 생각들이요. 당연히 만 3세 이전이기 때문에 이건 의식적으로 사고해서 나오는 결과가 아니라 그냥 무의식인 거예요. 그리고 이런 무의식들이 OO씨를 더 착하게, 더 이해하게, 더 희생하게, 더 참게 만들었을 수 있어요.”
“대부분의 집들이 그래요. 그리고 아들이랑 딸은 또 달라요. 첫째가 아들일 때 아들의 성격이랑, 첫째가 딸일 때 딸의 성격이랑. 다 달라요. 그렇지만 사람들이 다들 K장녀라고 하는 이유는 아마 집집마다 비슷한 패턴이고, 이러한 패턴들이 큰딸들의 삶의 선택에 있어서 무의식적으로 계속 영향을 끼치게 돼요.”
“그러니깐 OO씨, 이혼하더라도 앞으로 이걸 기억해야 돼요. 이기적으로 살지 않으면, 이혼해도 변하는 건 없어요. OO씨네 부모님이 훌륭한 분들인 건 이미 알고 있으니깐, 부모님 탓을 할 필요도 없어요. 나이가 서른이 넘었잖아. 그럼 자기 인생 자기가 알아서 살아야지. 부모님 생각 그만하고 정서적 독립할 필요가 있어요. 그러니깐 이제 아무 생각 말고 내 생각만 하고 사는 법에 대해 생각해 봐요. OO씨처럼 정 많고 따뜻한 사람은 이 말도 어렵게 들릴 거야. 근데 지금 제일 중요한 건 내가 나를 지켜야 한다는 거, 내가 나를 지키려면 내 마음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된다는 거.”
나는 그래서 요즘 이기적으로 살기 위해 노력한다고 주변에 말은 하는데, 사실 그게 정확히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내 주변이 행복할 때 나도 행복하고, 내가 아끼는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잘되고 행복하면 좋겠다. 혼자 잘 먹고 잘살아봤자 쓸쓸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상담 선생님은 나보고 좀 더 이기적으로 살아도 된다고 말한다. 아빠도 내가 너무 보고 싶지만, 나를 위해서 당분간 본가에 안 와도 된다고 먼저 말을 꺼냈다. “네 성격상 엄마, 아빠 보면 너만 더 힘들고 괴로워할 거야. 아빠는 네가 스스로 괜찮아질 때까지 집에 안 오고 혼자 네 마음을 잘 돌보면 좋겠어. 대신 아빠가 매일 너 외롭지 않게 잘 지내나 연락할게. 우리한테서 거리두기 해도 돼. 너만 생각해 지금은. 그게 가족이야.“
아마도 나는 이기적이라는 단어의 뜻을 평생 잘못 알고 있었나 보다. 만약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이 아픔이 그동안 첫째라서 희생하고 배려했던 세월의 학습적 패턴이라면 나는 두 번 다시 첫째로 태어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