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미애 Nov 29. 2024

올통볼통 '눈구름'이 되어

《미애의 사유》2024.11.29.

첫눈이 내린 저녁

나는 눈덩이를 굴렸다.


크게 만들 마음은 없었다.

다만, 공처럼 구슬처럼

아주 동그랗게 만들고 싶었다.


아무리 매만져도

온갖 정성을 다 하여도,

눈덩이는 결코,

구(球)가 되지 않았다.


올통볼통 눈덩이는

구슬보다는 오히려

구름을 더 닮았다.


반듯하게 둥글지 않아도

반짝이게 빛나는 순간이 있다.


그래, 나

차라리 구름이 되어 볼까.




첫눈이 내렸다. 하늘이 아낌없이 내려준 함박눈은 이제부터가 진짜 겨울임을 온 세상에 알린다. 여덟 살 아이는 하얀 눈꽃이 내려 쌓이는 것만으로도 마냥 좋은가보다. '뽀드득뽀드득'소리는 발에서 보다 아이의 입에서 더 크게 울린다. 그 소리가 마치 노랫말 같아 내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가로등이 내린 캄캄한 저녁, 우리 가족은 집 앞 공원으로 나갔다. 물기를 머금은 눈송이는 잘도 뭉쳤다. 아이와 아빠가 커다란 눈사람 만들자며 눈을 굴리는 동안, 나는 잠시 나만의 시공간을 만들어 다.


여기는 내 우주, 눈의 별이라 할까? 발자국 하나 닿지 않은 뽀오얀 흰 눈을 찾아 눈덩이를 굴렸다. 그러다 문득, 내가 나의  장면이 떠오른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하나의 '벽'과 같았다. 그 벽의 한쪽 면은 우울이나 불안이었고, 다른 한쪽은 기쁨과 행복이었다. 그것은 동전의 양면처럼 한쪽을 보면 다른 한쪽은 볼 수가 없었다. 최근 나에 대해 깨달은 것이 있는데, 바로 서로 상반되고 양립되는 것들의 '공존'에 대한 것이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서로 결이 다른 감정이나 생각이 내 안에 공존하는 것을 몹시 불안해했다. 벽의 A면을 볼 땐 'B 쪽을 봐야 하는데' 하고, B를 보면서는 '아참, 나 A였지'했다. 그 사이를 갈방질팡 할 때면, 혼란스러운 나를 벗어나기 위해 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거나, 아예 C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그리 평평하지가 않다. 오히려 입체적이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다각도로 입체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보는 각도에 따라 빛과 색이 다르고, 질감이 다르고, 그 반짝임 또한 모두가 다르다. 서로 상반되어 보이는 A와 B도 앞뒤가 아닌 옆에 있는 것이다. 다만 둘 사이의 거리에 차이가 있을 뿐, 그 둘은 분명히 서로 공존하고 있다. 이것을 깨달으며 나는 ''이 되기를 멈추고, ''이 되기로 했다. 어쩌면 너무 뻔한 진리라 할지라도, 나에게는 이것이 피타고라스가 지구는 둥글다고 말한 것만큼이나 큰 변화였다. 평평한 땅이 아닌 둥근 지구가 되기로 하면서부터, 나의 삶을 보다 유연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심지어 그것을 즐길 수도 있게 되었으므로.




내 손안에 머문 차갑지만 포근한 눈꽃들이 내가 떠올린 동그란 공이 되어주길 바랐다. 아이와 아빠가 누가 누가 더 큰 눈덩이를 굴리나에 열심일 때, 나는 나만의 별에 앉아 작지만 단단하고 얼음구슬처럼 동그란 구(球)을 만드는데 열심이었다. 하지만 내 손 안의 눈덩이는 아무리 매만져도 온갖 정성을 다 하여도 결코 구가 되지는 못하였다.


울퉁불퉁하기만 한 눈덩어리를 안고 나는 이제 또 다른 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 내가 생각한 입체적인 삶의 모양은 공이 아니구나. 공이 될 수 없는 것을 공을 만들겠노라 애쓰면 어떻게 되겠는가? 정작 삶을 다각도로 빛나게 보려던 본질은 잊고, 모양 맞추기에 그쳐 버릴 텐데, 그러면 안 되겠구나. 벽이 아니면 구여야 한다는 생각도 사실은 A 아니면 B였던 거였다. 나는 이제 벽이기를 멈추기로 했음에도.




내가 만들던 구는 그저 둥그스름한 무엇이 되어 바닥에 남겨졌다. 나는 다시 가족의 별로 돌아가 아이와 함께 눈덩이를 키우고 있었다. 그러다 가로등 아래에서 바람조차 스치 않은 듯 깨끗한 눈 쌓임을 보았다. 천천히 그곳으로 걸어가 다시 내 손안에 눈을 담았다. 두 손으로 감싸질 정도의 둥근 눈덩이를 아까와는 다른 마음과 정성으로 어루만졌다. 둥근 구는 아니었지만, 비록 울툴불퉁한 둥긂이었지만, 보석같이 빛났다.


그 둥긂은 이제 더 이상 이 아니라 오히려 구름처럼 보였다. 반듯한 공이 아닌 올통볼통한 그 구름이 나에게 편안하게 안겼다. 정겹게 나를 바라보는 내 손 안의 눈구름이라니. 눈구름 위에도 눈사람처럼 눈과 입이 달리고 나를 향한 감정이 피어나는 듯 기분 좋은 착각이 들었다.  


구름, 나에게 구름은 어떤 의미일까? 구름의 모양은 자유롭다. 그 모양이 제아무리 달라진들 구름이 구름이 아닌 것은 아니다. 구름은 빛과 그림자를 모두 제 몸안에 품고도 바람따라 가볍게 흐른다. 그러다 때때로 무거워지면 고요히 땅으로 내려오고, 다시 하늘로 올라서는 새롭게 반짝인다. 이는 마치 내가 떠올린 입체적인 삶과도 맞닿아 있다. 다양한 모양의 새로운 빛으로도 온전히 나일 수 있는 삶. 부디 올통볼통한 둥긂이 변화에 대한 불안이 아니라, 새로움이 주는 설레임으로 내 삶에 재미가 되어주기를 바란다. 이제 나는 애써 '공'이 되기 보다는, 자유롭게 온전한 '구름'이 되기로 한다.




내가 만든 눈구름은 여덟 살 아이의 눈에도 반짝 빛이 나 보다. 구름빛을 따라 모인 우리 세 사람, 가족은 더없이 따뜻하고 포근하다. 눈구름을 쓰다듬는 아이의 손길에 내 마음이 포옥 안겨 사르르 빛난다.



2024.11.29. 김미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