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욕과 배움, 정말 그게 전부야
‘Lust and learning, that’s really all there is isn’t it?’
'욕망과 배움, 삶은 그게 전부인 것 같아'
이 대목을 읽는 순간, 나는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여운 속에 갇혀 한참을 헤어 나오지 못했다. 정말로 맞는 말이다.
2023년에 읽었던 50권의 책 중에 가장 감명 깊었던 구절을 고르라 하면 나는 <스토너>속의 이 구절인 것 같다.
“삶은 배움의 연속이다” | “인간은 욕망의 동물이다”
살아가면서 수도 없이 들어본 말이지만, 이 두 격언을 연관 지어볼 생각은 시도조차 해본 적이 없다.
생각해보면 모든 배움은 무엇을 알고 싶거나 갖고 싶다는 호기심의 욕구로부터 시작되고, 모든 욕망은 결과가 좋든 나쁘든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며 끝이 난다.
정욕과 배움은 그야말로 우리 삶의 유일한 원동력인 것이다.
우선, 두 단어의 정의를 알아보자.
아쉽게도 역서에는 “욕망과 공부”라고 표현돼있으나 필자는 ‘정욕’이 끊임없는 욕구를 뜻하고 ‘욕망’보다 조금 더 본능적이고 선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면에서 ‘욕망’보다는 ‘정욕’, 그리고 단순히 학문적 ‘공부’를 넘어서 인생 전체를 통틀어 우리가 겪는 각종 교훈과 학습을 포함하는 차원에서 ‘공부’보다는 ‘배움’이라는 표현이 좀 더 추상적이며 조화롭게 책 전체를 아우르는 맥락에 부합한 거 같다.
400쪽에 달하는 ‘스토너’의 소박한 일생에 대한 작가 존 윌리엄스 특유의 지겨울 정도로 세심한 묘사는 “욕망과 배움”이라는 이 대사를 빌드업하기 위함으로써 그 진가를 발휘하는 듯하다.
누군가에게는 조용하고 쓸쓸한, 또 누구에게는 열정적이고 아름답게 비추어지는 스토너의 인생은, 우리에게 인생에 대한 진리를 안겨주며 마무리된다.
인간은 욕망이 있기에 무언가를 공부하고 배우려 들고, 이 욕망은 유익하거나 유해한 교훈을 배움으로써 끝이 남과 동시에, 인간은 다음 욕망을 향해 배움을 계속해나간다.
크게 보면 모든 동물은 생존하려는 욕구하에 존재하고, 다른 개체와의 경쟁에서 생존력을 높이기 위해 각종 학습을 지향해나간다. 도구를 사용하는 법을 배운다거나 자신의 유전자를 번식시키기 위해 외모를 가꾸는 법을 배운다거나. 이렇듯 삶은 욕망이라는 전제하에 끊임없는 배움들로 이루어져 있다.
아직 너무 추상적이라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자. 대표적인 것이 인간의 색욕이다. 마음에 드는 이성이 생겼을 때 상대방을 이해하고 알아감으로써 그/그녀 탐하려 하고, 관계가 끝이 났을 때는 “아 내가 이런 부분에서 소홀했구나” 하는 아쉬움, 혹은 “아 이런 스타일의 이성과는 잘 안 맞는 거 같다”등 그 관계에서 배운 교훈과 함께 다음 이성을 향한 정욕의 불씨를 피운다.
식욕도 있다. 밤에 야식을 먹고 나서 “아 다이어트 중인데, 내일 얼굴 붓겠다”라던가, 탕후루를 처음 먹어보고 “아 이건 내 스타일이 아니다”라고 사소한 배움을 얻는다던가.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라는 유명한 짤도 있지 않은가. 이렇듯 우리는 수많은 욕망과 실수의 굴레 안에서 배움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노자가 도덕경에서 “위학일익 위도일손(爲學日益 爲道日損)”,즉 ‘배움에는 끝이 없다’라고 말했듯, 욕망이 배움으로써 비워지고, 배움이 새로운 욕망을 야기하는 자연스러운 사이클과 함께 우리는 살아간다.
작중 ‘Lust’란 단어는 대게 스토너의 책과 학문을 향한 끊이지 않는 욕구로 표현되었다. 세상을 인식하고 이해하려는 마음으로부터 생겨나는 각종 욕망, 그리고 그에 따른 좌절 혹은 후회 등 반성의 감정은 서로의 기반이다.
세상 모든 것에는 배울 점이 있기에, 중요한 것은 욕망으로부터 무엇을 어떻게 배웠냐이다. 본능적인 욕망을 부정할 수 없을지라도, 그 정욕을 어떤 형식으로 수용하여 어떤 배움을 얻었는지는 개인의 역량 차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욕망을 두려워하지 말자. 오히려 나는 세상을 향한 욕구를 지향해야 한다고 믿는다. 욕망이 있는 곳에 배움이 있을 것이다!
지금 마음속에 주저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이 기회를 빌어 그 욕구를 따라가보길 바란다. 적어도 무언가는 배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