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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혜 Feb 06. 2024

1. 노른자가 되고 싶어


“선생님은 ‘꼽사리’에요.” 

꼽사리란, 다른 판에 슬쩍 끼어드는 모양을 뜻하는 ‘곱사리’가 경음화를 거쳐 변화한 표준어이다.

“맞잖아요. 수학하고 영어를 들으면, 논술은 공짜니까. 원장님도 그랬어요. 논술은 서비스라고.”

수학이 탕수육이고 영어가 양장피라면, 논술은 군만두다. 아니다, 감히 군만두를 입에 올리다니. 

나는 그냥 거저 주는 단무지다. 

달라면 얼마든지 더 주는, 안 먹어도 그만인 서비스 품목인 것이다. 





작성일: 3월 23일 저녁 9시 38분 

작성자: 산토리니의 오후


오늘도 온 힘을 다해 살았다. 새 학기를 맞은 이맘때의 학원은, 도떼기시장과 다르지 않다. 새 학기, 새 학생, 새 상담 전화...

상담 전화를 끊고 나면 민원 전화가 걸려 온다. 짜증 내는 학생을 달래고 돌아서면, 다른 아이가 울면서 달려온다.


“수학하기 싫어요. 배우지도 않은 걸 어떻게 풀라는 거예요?”

그걸 왜 나한테 따지니, 나는 한낱 논술강사인데.


“영어 너무 지겨워요. 똑같은 말 시키고 또 시키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논술강사… 하아, 됐다.


그런데 오늘은, 심장이 따가운 한마디를 들었다. 


“선생님은 ‘꼽사리’에요.”

꼽사리란, 다른 판에 슬쩍 끼어드는 모양을 뜻하는 ‘곱사리’가 경음화를 거쳐 변화한 표준어이다.


“맞잖아요. 수학하고 영어를 들으면, 논술은 공짜니까. 원장님도 그랬어요. 논술은 서비스라고.”

제법 논리적으로 따지는 그 녀석은 고작 초등학교 3학년이다. 나를 도발하거나 비참하게 만들 의도는 없다. 다만 그 순수한 악의에 질릴 뿐이다. 

수학이 탕수육이고 영어가 양장피라면, 논술은 군만두다. 아니다, 감히 군만두를 입에 올리다니. 나는 그냥 거저 주는 단무지다. 달라면 얼마든지 더 주는, 안 먹어도 그만인 서비스 품목인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은 논술하지 말고, 놀아요!”

꿈도 꾸지 마라, 꼬맹아. 너희들이 꼽사리라고 무시하는 논술 강사가 되기까지 내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면 놀랄걸. 시골 소녀의 좌충우돌 상경기 들어볼래? 



*


서울에서 기차로 세 시간, 고속버스로 다섯 시간쯤 걸리는 지방 소도시가 있다. 유명한 관광지가 아니라 사람들이 잘 모르는 곳이다. 누가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도, 정확한 동네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 어차피 못 알아들을 게 뻔하니까. 차로 삼십 분쯤 걸리는 대도시 이름을 댄다. 진짜 궁금해서 묻는 것도 아니고, 금방 잊어버릴 테니까 거짓말은 한다는 죄책감은 없다. 


부모님은 두부전골집을 했다. 좌식 밥상 여덟 개가 전부인 조그만 가게였다. 그래도 두부를 직접 만들고 좋은 재료를 썼기 때문에 손님이 끊이질 않았다. 

태어나서 가장 먼저 맡은 건 비릿한 콩 냄새였다. 나는 분유 대신 콩 국물, 이유식으로 비지를 먹고 자랐다. 부엌 한켠에는 눅눅한 두부판이 켜켜이 쌓여 있는, 나는 두붓집 셋째 딸이었다. 


엄마의 두부전골은 순한맛과 매운맛 둘 다 인기가 좋았다. 바닥에 양파를 깔고, 두부를 넉넉히 얹은 다음, 들깻가루를 뿌린다. 육수를 붓고 바글바글 끓이다 가운데 계란 노른자 하나를 똑 얹으면 완성. 소주를 부르는 뜨끈뜨끈 두부전골의 순박한 맛이다.  

때문에 우리 집에는 쓸모없는 계란 흰자가 넘쳐났다. 나는 원래 계란말이가 하얀 색인줄 알았다. 노른자라는 게 있다는 건 알았지만, 먹어본 기억은 없다. 노른자는 가게에서 써야 하니까 남은 흰자만이 식구들의 몫이었다. 


“으, 또 백탕이야. 맛도 없고, 색도 없고.”

막내가 숟가락으로 계란국을 휘저으며 툴툴댔다. 흰자만으로 끓인 허여멀건한 국은 꼭 종이 죽 같았다. 막내는 화장실 휴지 맛이라며 침을 뱉었다. 


“주는 대로 먹어라. 밥상머리에서 재수 없게 반찬 투정하지 말고.” 

언니가 눈을 부라렸다.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동생들을 돌보는 언니는 집 안에 군기반장이 되어 있었다. 


“지겨우면 된장이라도 발라서 노랗게 해 먹든가.”

싱거운 소리를 하는 건, 공부밖에 모르는 오빠다. 저런 걸 농담이라고 하니까 여자친구가 없는 거다. 


어른이 없는 집, 

열여섯 살짜리 맏아들이 밥을 차리고 열다섯 살 둘째 딸이 설거지를 한다. 열두 살 먹은 셋째 딸인 나는 빨래를 개고, 열 살 막내아들은 쓰레기를 내다 버렸다. 부모의 보살핌 없이도 아이들은 어떻게든 자라는 법이다. 


다들 아웅다웅 떠드는 와중에도 나는 묵묵히 밥을 씹어 삼켰다. 돌이켜보면 그때가 나의 사춘기였을 것이다. 조금 외롭고, 매사 짜증이 나고, 문득 서럽지만 표현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우리 사 남매를 보며 사춘기도 없이 순하게 성장했다고 말했다. 어려서부터 나는 겉도는 존재였다. 오빠는 장남이라서, 언니는 장녀라서, 막내는 막내라서 귀여움을 받았다. 가운데 낀 나는 어정쩡하기 짝이 없었다. 언니처럼 손끝이 야무져서 가게며 집안일을 돕지도 않았고, 오빠처럼 공부를 잘하지도 못했다. 언니가 두부고 막내가 들깻가루고 오빠가 노른자라면 나는….

후추였다.  

뿌려도 그만, 안 뿌려도 그만.

있으면 좋고, 없으면 말고. 


나를 왜 낳았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너를 너무 사랑해서, 꼭 만나고 싶어서, 이런 대답을 기대했던 것 같다. 

“네 엄마가 몸이 많이 아팠어. 병원에 가봐도 답이 안 나와. 그런데 한 무당이 말하길, 애 하나를 더 가지면 낫는다더라고. 그런데 너를 낳아도 여전히 골골거려. 무당한테 따지러 갔더니, 네가 아니래. 남자애를 낳았어야 한대. 막내가 태어나니 진짜로 훨훨 날아다니지 뭐냐. 요 녀석이 우리 집 복덩이다, 복덩이!”

아버지는 말끝에 막내를 덥석 안아 올렸다. 막내가 허리를 꺾으며 와하하 웃었다. 

결국 내가 듣고 싶었던 대답은, 막내가 들었다. 너를 너무 사랑해서, 네가 우리 집에 꼭 필요한 존재라서.


그렇게 원망은 서서히 나를 잠식했다. 365일 연중무휴 두부전골을 만들어 파는 부모는 자식들의 행사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 돈을 벌고, 그 돈으로 너희를 키워야 하니까, 서운함은 마땅히 받아들일 몫이다. 부모는 자신들의 삶으로 그렇게 가르쳤다. 새벽 네 시에 일어나 두부를 누르고, 밤이 되어서야 손이 빨갛게 익어 들어오는 부모에게 나 좀 봐달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굳이 서울까지 대학을 가야겠니? 네 언니처럼….”

언니는 학비가 싼 집 근처 전문대를 나와, 가게 일을 돕고 있었다. 그야말로 든든한 ‘첫딸은 살림 밑천’의 표본이다. 


“네 오빠 상황이 지금 안 좋으니까….”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오빠는 실패자가 되었다. 장학금을 받고 지방 국립대에 입학했지만 기세 좋게 경찰공무원에 도전했다가 낙방한 터였다. 마을 어른들은 ‘전골집 아들이 미역국을 먹었다더라’며 혀를 찼다. 그러나 부모님은 가게 앞에 ‘축 합격! 오늘은 순두부 공짜!’ 현수막을 거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 오빠의 재도전을 위해, 나의 새 도전을 꺾으려는 것이다.  


“막내는 어쩌냐, 또….”

막내의 대학입시는 아직 한참 남았다. 그리고 그 녀석은 일찌감치 공부로는 망했다. 간절한 나와는 다르다.       


울고불고 매달리고 떼를 써서 간신히 첫 등록금을 받았다. 반강제로 서울에 자취방을 얻었다. 혼자 짐을 싸고, 기차표를 끊었다. 그때쯤 나는 입시를 치르고 이사를 하느라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고 싶은 마음조차 없었다. 그래서 한밤중에 집을 나섰다. 짐가방을 들고 나오다 문득 거실을 한 바퀴 휘 둘러봤다. 두부판, 콩 비린내, 낮게 코 고는 소리, 뒤집힌 슬리퍼.


“돌아오지 않을 거야.”

입 안으로 중얼거리고 집을 나왔다.


가방을 질질 끌며 나오는데, 대문 앞에 아빠가 담배 피우는 자리가 보였다. 이가 나간 냉면 대접에 담배꽁초가 빼곡했다. 그리고 곁에 놓인 빨간 라이터 하나. ‘참맛나는 두부전골’이라고 쓰여 있다. 

나는 그냥 지나치려다 돌아와서, 그 라이터를 낚아챘다.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그러니까 필요한 물건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심술이 났다. 내가 없어진 건 몰라도, 라이터가 없어진 건 알겠지. 내가 사라진 건 섭섭하지 않아도, 라이터가 없으면 당황하겠지. 하루 일을 끝내고 유일하게 아빠가 쉬는 시간인 담배 타임을 망치고 싶었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지만, 그때 나는 겨우 스무 살이었다. 식구들에게 가장 서운했던 일은,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 듣지 못한 것이다. 자식이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했다는 데 기뻐하는 게 아니라 한숨부터 쉬는 것은, 세상에 우리 부모밖에 없겠지. 


그래서 나는 서울로 왔다. 노른자가 되고 싶어 집을 나왔으나 결국 단무지밖에 되지 못했지만, 어쨌든 지금 나는 여기에 있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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