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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혜 Mar 27. 2024

10. 우리 얘기 좀 해요




지원은 불을 끄고 침대로 쏙 들어갔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은 채, 가만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 스페이드님, 그래도 당신에 대해 하나도 모르겠어요. 현실감이 전혀 들지 않아요. 어떤 거든 좋으니, 이야기 하나만 들려주세요. 어떤 거든 좋아요. 꾸며낸 거라도 상관없어요. 아무 질문도 하지 않을게요. 약속해요.  








새벽 3시 31분.

잠이 오지 않았다.      

3시 40분. 뒤척이던 지원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빨리 자야 한다. 내일도 할 일이 쌓여 있었다. 그 부담에 눌려 숨이 막혔다.     

"서류는 학원에 두고 가. 밖으로 내돌리지 마. 집에서는 푹 쉬어야지."

부원장은 그렇게 말했지만, 집에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학원에서 처리할 만큼만 주면서 말하던가. 내일까지 못하면 또 뭐라 그럴 거면서. 하, 인생 진짜 고단하다, 고단해.

밤이 깊을수록 정신이 말똥 해졌다. 지원은 맥없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때였다. 반짝, 반가운 알림이 울렸다.


― 새로운 댓글이 달렸습니다.      

  스페이드다! 깜짝 놀란 지원은 휴대폰을 떨어트렸다. 으악, 내 코! 코뼈가 부러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팠다. 지원은 눈물이 글썽한 채로 더듬더듬 휴대폰을 찾았다. 몇 번이나 휴대폰을 떨어트리며 허둥대다가 간신히 스페이드의 꼬리를 붙잡았다.     


- 잠깐!

- ㅈ자자잔ㄱ깐만요!!      

지원이 오타를 내며 대댓글을 달았다. 저 멀리 뛰어가는 사람을 목청껏 부르듯 간절한 손짓이었다. 댓글을 단지 30초도 지나지 않았으니 아직 지원의 블로그를 나가지 않았을 법한데, 스페이드는 대꾸가 없었다.        

- 우리 얘기 좀 해요!!!!     

제발, 제발, 제발. 지원은 휴대폰을 흔들며 육성으로 부르짖었다. 아, 좀. 나랑 얘기 좀 해요, 스페이드!     


- 네, 오후님. 저 여기 있어요.      

드디어 스페이드가 등장했다. 변함없이 온유한 말투에 안심이 되었다. 지원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동안 스페이드는 직사각형 프레임에 갇힌 문자로만 존재했다. 지원은 그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친근하게 대해주는 까닭은 무엇인지 아무것도 몰랐다. 반면에 그는 블로그 글을 통해 지원에 대해 다 알고 있으니 억울하기까지 했다. 나도 그에 대해 알고 싶다. 우리가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면 좋겠다.


둘 사이에 몇 마디 다정한 안부가 오갔다. 지원은 숨이 차올라 심호흡을 했다. 언젠가 대화를 하게 되면 그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있었다. 하지만 정작 스페이드와 마주하자, 그동안 궁리했던 수많은 말들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되는대로 질러 버려. 이런 기회가 다시는 안 올지도 모르는데.     


- 스페이드님, 딱 한 가지만 질문할게요. 이건 무조건 대답해 주셔야 해요.

- 음, 제 답변이 거짓인지 진실인지 오후님이 어떻게 알죠?  


아니 이 사람이 누굴 놀리나? 약이 오른 지원은 독개구리처럼 볼을 부풀렸다. 이럴 때는 별  수 없다. 솔직하고 대담하게 부딪힐 수밖에.      

- 스페이드님이라면 거짓말이라도 믿을게요. 당신이 그동안 제 글을 진실이라고 믿어주신 것처럼. 내가 믿으면 진실이 되겠죠.

- 앗, 그렇게 말하면 거짓말을 할 수가 없잖아요!      

지원은 비로소 웃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화면 밖에서 스페이드도 웃고 있을 것이다. ㅋㅋㅋ 몇 글자의 자음과 귀여운 이모티콘이 오고 갔다. 비밀 댓글창을 이용한 채팅이라니, 신선했다. 서로의 개인적인 영역을 지켜주면서 충분히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그나저나 딱 한 가지 질문이라니, 망설여졌다. 어디 살아요? 나이는 몇 살이에요? 남자인가요, 아님 여자예요? 왜 매번 댓글을 달아주는 거예요? 저한테 어떤 특별함을 보았나요? 그게 뭔지 자세하게 말해줄 수 있어요? 묻고 싶은 것은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지원은 가장 궁금한 것 중 단 하나만 고르기로 했다.

지원은 신중하게 고른 질문을 조심스레 던졌다.      


- 저한테 바라는 게 뭐예요?     

스페이드의 답변은 즉각 달렸다.      

-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잠시 후, 스페이드가 되물었다.      


- 이번에는 제가 질문을 하나 드릴게요. 오후님에게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지원도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 계속 내 편이 되어줬으면 좋겠어요.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지원은 스페이드가 기꺼이 승낙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페이드는 항상 지원의 편일 것이다. 그러자 스르르 긴장이 풀어졌다.      


스페이드가 지원에게 뭘 하느라 잠들지 못하냐고 물었다. 지원은 부원장이 떠맡긴 짐에 대해 털어놓았다. 주의 깊게 듣던 스페이드가, 아무래도 걱정되니 반드시 증거를 남겨두라고 했다. 하지만 부원장은 학원 밖으로 서류도 가져가지 말라고 했는데…. 어차피 형식적인 거니까 빨리 처리하고 파기하라고.

그러자 스페이드가 난색을 표했다.


- 회사 업무에 형식적인 건 없어요. 대충 하고 숨겨야 하는 문서라니, 영 이상해요. 시키는 대로 하다가는 오후님이 책임져야 할지도 몰라요. 원장님하고 상의를 해보면 어때요?     

- 하지만 부원장이 주는 일만 하면서 가만히 있으라고 했어요. 제가 정규직도 아니고….          

지원은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졌다. 어쩐지 울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스페이드는 지원이 걱정하는 부분을 정확히 짚어주었다. 내심 두려웠지만 확인하지 못했던 불안함을 헤아렸다.       

- 가만히 있으랬다고 조용히 있을 순 없죠. 꿈틀거리기라도 해요. 오후님, 앞에선 모르는 척하고 뒤로 알아봅시다. 부원장이 주는 서류는 반드시 복사본을 만들어 두세요. 없애기 전에 사진으로 찍고, 본인 메일로 보내 백업하세요.     

스페이드는 지원이 해야 할 일을 상세히 알려주었다. 그 말에 힘을 얻은 지원은 책상에 너저분하게 널려 있던 서류를 정리했다. 내일 학원에 가자마자 복사를 하고, 보관을 해야겠다.  어지럽던 머릿속이 투명하게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지원은 불을 끄고 침대로 쏙 들어갔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은 채, 가만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 스페이드님, 그래도 당신에 대해 하나도 모르겠어요. 현실감이 전혀 들지 않아요. 어떤 거든 좋으니, 이야기 하나만 들려주세요. 어떤 거든 좋아요. 꾸며낸 거라도 상관없어요. 아무 질문도 하지 않을게요. 약속해요.      

스페이드는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지원은 두 손으로 휴대폰을 꼭 붙들고 기다렸다.      


- 이런 이야기는 어떨까요. 어떤 남자가 있었어요.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똑똑하고 유능한 줄 알았던, 자만심 가득한 사람.

자기가 개발한 프로그램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꿈을 꾸었어요. 사람들에 대한 데이터를 모아, 상황별로 분류해서, 관리하고 결과를 예측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제법 돈도 많이 벌었죠. 어느 정도 규모 있는 회사에 대표도 되었어요. 큰 기업이 줄을 서서 찾아오니, 한국의 스티브 잡스라도 된 줄 알았겠지요.    

하지만 건강한 사람도 바이러스에 걸리면 무너져 버리잖아요. 승승장구하던 그 사람은, 자기 가족이 그런 바이러스에 감염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그에게는 동생이 하나 있었어요. 잘난 형 그늘에 가려져 빛 한 번 보지 못한 심약한 아이였지요. 그래도 부모님과 떨어져 있어 그에게는 한국에 있는 유일한 핏줄이었어요. 한집에서 같이 살지만 서로 어떻게 지내는지 별 관심은 없는, 흔하디 흔한 형제라고 생각했어요.  


형이 프로그래머라면, 동생은 해커였어요. 그것도 아주 질이 낮은, 해커라는 이름도 아까운, 쓰레기 같은 범죄자 나부랭이.

동생은 형의 프로그램의 소스를 훔쳐 해킹했어요. 연예인의 휴대폰에 접근해 사생활을 알아냈어요. 사적인 사진과 문자들을 찾아내 폭로했어요. 인터넷에 그를 추앙하는 무리들이 생겨났죠. 그들에게 후원을 받아가며, 원하는 유명인을 고르라고 허세를 부렸어요. 누구든지 바닥까지 박박 긁어 민낯을 드러내 주겠다고.   

누구는 사회적으로 매장되었고, 누군가는 외국으로 사라지고, 누군가는 견디지 못하고 죽어버렸어요. 그렇게 될 때까지 형은 눈치를 채지 못했어요. 겁도 없이 제 프로그램에 접근하는 해커를 쫓다가 동생과 마주쳤을 때는... 놀랐죠. 그렇게 잡고 싶던 놈이 바로 옆방에 있었으니까.


그 후로 형제는 완전히 망가졌어요. 제 손으로 동생을 감옥에 보내버린 뒤, 형은 돈도 명예도 사람도 믿지 않게 됐어요. 자신과 동생이 망쳐놓은 걸 어떻게든 되살리고 싶어서 또 다른 프로그램을 개발했어요. 대단한 사업도 아니고, 돈도 안 되지만.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었거든요. 힘든 사람, 우울해하는 사람,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을 찾아내 지켜보는 거예요. 지속적인 관찰과 적절한 대응으로 사람을 살릴 수도 있으니까요.      


- 잠깐! 스페이드님이 그 형이에요? 설마 동생은 아닐 거 아냐. 혹시 그 프로그램으로 저를 찾은 건가요? 내가 어떻게 될까 봐 관찰한 거예요?      

- 질문 안 한다면서요!      

- 난 원래 약속 안 지켜요. 대답해요!     

- 와, 고집쟁이.

- 이런 경우도 있지 않을까요? 관찰만 하려다가 진짜 관심이 생기고, 편을 들어주려다 팬이 되는 경우도. 누군가의 글을 읽고 댓글을 다는 건 결국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요.

         

새벽 6시 4분.

암막 커튼으로 가려둔 창문 밖이 푸르게 밝았다. 지원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한동안 지원이 대꾸가 없자, 스페이드가 마지막 댓글을 달았다.


- 잘 자요, 오후님. 남은 날들도 좋은 날 되세요.


스페이드가 사라진 뒤에도 지원은 그와 함께 있는 듯 휴대폰을 꼭 쥔 채 달콤한 잠에 빠졌다.          



*



11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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