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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혜 Feb 28. 2024

6. 싸다기 때리고 지옥 갈게!


- 지원이는 잘 참습니다.

- 지원이는 참 착합니다.

착한 아이 따위 되고 싶지 않았지만, 참는 아이보단 나을 것 같았다.





어릴 적 일이다. 3학년 무렵, 잊지 못할 도덕 숙제가 나왔다.

‘우리 가족 칭찬하기.’

지원은 또박또박 이렇게 썼다. ‘부모님은 일을 많이 한다.’ 맞는 말이지만, 과연 이게 칭찬일까? 곰곰이 생각한 끝에, 지우고 다시 썼다. ‘부모님은 개미처럼 부지런하다.’


아빠는 공책을 보고 씩 웃었다. 지원은 내심 가슴이 뛰었다. 아빠가 날 뭐라고 칭찬해 줄까? 예쁘다고, 똑똑하다고, 글을 잘 쓴다고 적어주면 좋겠다.

“보자, 첫째는 공부를 잘하고. 둘째는 노래를 잘 부르지. 막내는 태권도 선수고. 우리 지원이는….”


‘지원이는 잘 참습니다.’


아, 이게 뭐람. 어린 지원은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참는 걸 잘한다는 건 칭찬이 아니었다. 참을성이 많아서 잘 참는 게 아니었다. 아빠 엄마의 시간이 너무 적은데, 그나마 네 명이 나눠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밀려났을 뿐이다. 지원도 오빠처럼 성적표를 내밀거나, 언니처럼 흥을 돋우거나, 막내처럼 치대고 싶었다. 견디는 건 능력이 아니다. 잘 참는다 칭찬을 받느니 버릇없다 혼나는 게 낫다.


“아이고, 뭐가 서러워서 질질 짜냐. 그게 아니고 지원아, 너 어제 예방주사 맞을 때도 안 울었잖아. 막내는 병원이 떠나가라 우는데 너만 꾹 참아서 의사 선생님이 사탕도 주셨고. 그래서 한 말인데, 왜 이제야 울어?”


어린 지원은 끝까지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그저 세수를 하고 온 다음, 말없이 공책을 펼쳤다. 아버지가 써놓은 문장을 보니 한숨이 나왔다. 지우개로 자음 몇 개를 지웠다. 새까만 때같이 밀려 나온 찌꺼기를 툭툭 털었다. 지원은 한참 글자를 들여다봤다. 그리고는 연필을 들어 잘 참습니다, 를 참 착합니다, 로 바꾸었다.


- 지원이는 잘 참습니다.

- 지원이는 참 착합니다.

착한 아이 따위 되고 싶지 않았지만, 참는 아이보단 나을 것 같았다.


나는 잘 참는다. 나는 늘 참는 사람이다. 나는 참는 걸 잘할 수 있다.  

그 후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이 문장은 마음으로 중얼거리는 주문이 되었다. 이제 지원은 열 살짜리 어린애도 아니고, 서른이 목전인 성인이며, 여기는 편의점이고, 앞에는 시끄럽고 낯선 사람이 있다. 당연히 참을 수 있다.


아니다. 못 참겠다. 더 이상은 무리다. 술이 취했고, 캔을 터트렸으며, 맥줏값은 올랐다. 유일하게 마음을 연 부원장은 이유 없이 변했고, 동료들에게 스파이 소리나 듣고, 2차는 못 갔다. 지원은 봇물 터지듯 밀려드는 감정을 추스를 길이 없었다. 이래서, 술맛이 단 날은 조심해야 한다.


“손님! 울어요? 진짜? 대박….”


리치맨의 어이없단 반응이 불을 댕겼다. 흐느끼던 지원은 와락 울음을 터트렸다. 한번 터진 울음은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자신이 편의점에서 엉엉 운다는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어쩌면 꿈을 꾸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까짓 힘차게 내질러볼까. 내친김에 지원은 주먹을 꼭 쥐고 얼굴이 빨개지도록 소리 내 울었다.


“엄마야, 어떡해! 울지 마, 뚝! 맥주가 잘못했네. 이 망할 놈의 캔이 왜 미끄러져서 사람을 울려!”  


리치맨은 진땀을 흘리며 지원을 달래려 애썼다. 그 모습이 오히려 지원을 서럽게 했다.

엄마, 엄마는 왜 내가 울 때 달래주지 않았어?

아빠, 아빠는 왜 내게 항상 등을 보였어?

부원장님, 나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나는 사람을 꽤 잘 보는 편인 줄 알았는데, 역시 아니었나.

도대체 다들 왜 그래요?

인간들이란 왜 그리 제멋대로인지. 지겨워 죽겠다, 정말. 꺽꺽대는 울음소리가 편의점을 가득 채웠다.


울다 보니 목이 말랐다. 에잇, 먹고 죽자. 지원이 홧김에 맥주캔을 움켜잡았다. 그러자 리치맨이 혼비백산해 지원을 뜯어말렸다.


“안 돼! 손님, 잡혀가. 감옥 가고 싶어요?”


리치맨은 CLOSE 팻말을 꺼내 문에 붙였다. 그리고 줄줄 우는 지원을 밖으로 내쫓았다.

지원은 문 앞에 서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리치맨이 서둘러 두루마리 화장지와 물티슈, 맥주 11캔을 장바구니에 담아 왔다. 지원을 플라스틱 테이블에 앉힌 뒤, 앞자리를 차지한 리치맨이 비로소 숨을 돌렸다.


“가게 안에서 술 먹으면 안 된다고. 여기는 괜찮아요, 마셔.”


깡! 캔 따는 소리가 경쾌했다. 꿀꺽꿀꺽, 지원은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캬, 살 것 같았다. 찬바람을 맞으니 열이 식었다. 지원은 두루마리를 둘둘 풀어 코를 팽 풀었다. 막혔던 코가 뻥 뚫렸다.


“…아이구, 그랬구나. 부원장이 나빴네. 못된 년.”

“그치?”     

“이용해 먹은 거잖아, 너를. 싸구려 짝퉁 가방이나 귀걸이 쪼가리 몇 개 던져주면서. 정보란 정보는 다 빼내고, 다 너한테 들은 거처럼 굴고. 심지어 딴 사람들이 오해하는데 편도 안 들어줬잖아. 완전 개싸가지네.”

“맞지?”


두 사람은 수다에 열을 올렸다. 알고 보니 리치맨과 지원은 동갑에, 집도 가깝고, 제법 말이 잘 통했다. 리치맨은 지원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었으며, 기가 막히게 맞장구를 쳐 주었다.


‘내가 왜 이 사람한테 내 이야기를 주절거리나’ 싶을 때마다, 지원은 새 캔을 땄다. 술기운이 오르면 의문이 사라졌다. 참 오랜만에 마음 편한 술자리였다. 지난 불안하고 시끄러운 술자리보다 훨씬 나았다.


“그래서, 당장 내일 출근하면 마주칠 거 아냐. 너 어떡할 거야?”

“뭘?”

“스파이 소리 듣고, 가만있을 거냐고!”


지원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다시 눈물이 솟구쳤다.

“몰라. 모르겠어.”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학원을 그만둘까? 그럼 어디로 가지? 아등바등 서울까지 찾아온 미래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야! 등신같이 짜지만 말고, 싸워. 날 건드리면 좆된다는 걸 알려주란 말이야.”

“뭐가 돼? 조…?”

“너 안 되겠다. 욕도 못 해, 싸움도 못 해. 따라 해 봐.”


리치맨은 손나팔을 만들어 입에 갖다 대더니, 크게 외쳤다.


“야, 부원장 이 개싸가지 쌍년아. 어디서 굴러먹다 온 별 거지 같은 게 지랄이야! 씨발, 뒤지게 처맞아볼래?”


헉, 지원은 무심코 입을 가렸다.


“나, 난 못해. 나 논술강사야. 국문학과 나온 사람이라고.”


리치맨이 테이블을 탕탕 두들겼다.


“따라 해, 이 씨발, 씨발것들아! 수학 영어 너희 새끼도, 원장 너 개자식도, 부원장 너 미친년도, 다 씨발이야!”

“…바, 발이야아아아아!”


웅얼거리던 지원이 용기를 내 크게 외쳤다. 그러자 리치맨이 배를 잡고 웃었다. 그 모습을 보자 지원도 웃음이 터졌다. 둘은 테이블이 들썩거리도록 낄낄거렸다.

오늘따라 조용히 하라고 소리 지르는 사람도 없었다.


“어휴, 더러워. 콧물이 턱까지 내려왔다, 야.”

리치맨이 물티슈를 뽑아 건네주었다. 어차피 화장은 엉망이 되었고 눈물 콧물로 범벅되어 끈적거렸다. 지원은 아저씨처럼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안지, 나랑 약속 하나 해.”

리치맨이 진지하게 말했다. 어느새 그는 지원을 안지, 라고 불렀다. 안지원이라서 안지.

중학교 친구들은 알고 지낸 지 오래됐지만 존재감 없다는 뜻으로 '안지 오래됐지만의... 안지.' 라고 불렀다.


“내일 부원장 만나도 쫄지 마. 개 같이 떨지도 마. 수학이랑 영어 새끼 앞에서도 당당해. 네가 잘못한 거 없고, 스파이짓 한 거도 아냐. 나쁜 건 이용해 먹은 쪽이지, 당한 사람이 아니야. 알았지?”

리치맨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응, 내가 꼭 부원장 싸다기 때리고 지옥 갈게!”

지원은 힘차게 손가락을 걸고 흔들었다.


“안지, 너를 보니까 나 어릴 때가 생각난다. 나도 맨 처음 소속사 들어갔을 땐, 그렇게 어른들한테 치이고 눈물도 흘리고 그랬는데.”

“소속사? 너 뭐, 연예인이야?”

“보면 모르겠냐. 나 아이돌 출신이야. 이 정도 미모가 동네에 흔한 줄 알아? 음악프로에도 나오고 예능도 몇 번 나왔는데, 텔레비전도 안 봤어?”

“티브이 볼 시간이 어딨어. 먹고살기도 바쁜데.”

지원이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슬슬 눈이 감기고, 잠이 밀려왔다. 끄덕끄덕 조는 지원을 앞에 두고, 밤 감성에 촉촉해진 리치맨이 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화면에 나오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 그게 가수든지, 탤런트든지. 환호성과 박수가 좋았거든. 부모님은 하나뿐인 아들의 꿈을 이뤄주고 싶어 했어. 능력도 되는 사람들이었고, 그때는.”

“오, 금수저. 좋겠다.”

“아빠 빽으로 소속사에 들어갔어. 데뷔도 쉬웠어. 잠시나마 연예인 맛 좀 봤지. 그런데 돈으로 처바른 꿈은 금방 무너지더라. 평생을 잘 나갔던 아빠는 사업이 망하는 걸 견디지 못했어. 아빠가 돌아가신 뒤 소속사에서도 쫓겨났지. 내 별명은 망돌이 됐어, 망한 아이돌. 그래서 일본으로 달아났어. 몰랐는데 내가 요리에 재능이 있더라고. 우동을 배워서 일본에 가게를 내려고 했어. 아직 엄마가 그 정도는 도와줄 능력이 있었거든.”

“음냐... 우동, 먹고...싶다....”

“그런데 엄마까지 병이 나버렸어. 나는 급하게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어. 이제 돈도 없고, 꿈도 없어. 병원에 누워 있는 엄마랑, 갚아야 할 빚만 남았어. 편의점에서 일도 하고 댄스학원 강사도 하고 닥치는 대로 일하지만 잘 모르겠어, 어떻게 될지. 그냥 버텨보는 거야. 언젠가는 내가 만든 유튜브가 대박 쳐서 다시 일어날지도 모르잖아. 안지야! 너 나랑 같이 유튜브나 찍어볼래?”

“……응, 그렇지.”

“야, 안지. 자냐? 자? 의리 없네, 이거. 집에 가서 자. 왜 남 영업장 앞에서 자고 그래? 니가 노숙자야? 어라, 얘 진짜 잠들었네. 야, 내가 너를 집까지 데려다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마. 나도 바쁜 사람이야.”

“….”


*


7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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