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보다 젯밥,’ 불경스러운 리얼리스트 ESFP
매년 평균 25만명이 죽고 그 중 30%가 매장을 하잖아. 조선시대부터 엄청나게 많은 묘를 썼을텐데, 아직까지 명당이 남아있어?
파묘 캐릭터 MBTI 분석:고영근 편
[주의: '스포일러 있음' 수준을 넘어섬. 글 전체가 스포일러로만 이루어져 있음]
ESFP유형은 ‘지금, 여기’에 집중해 살아가고, 개방적 태도로 사람과의 교류를 즐긴다. 다양한 경험에 열려 있어 끊임없이 모험, 재미, 감각 경험을 추구한다. 인간중심적 태도로 주변 사람들과 친화하고 타인의 웰빙을 돌보며 타인과 함께하는 즐거운 경험을 추구하기 때문에 인기가 많고 집단에 활력을 불러 온다.
장의사 고영근은 지관 김상덕과 듀오로 일하는데, 등장 씬에서부터 함께 등장해 찰떡 호흡을 선보인다.
명인 인증을 받고 TV에 출연하는 등 자신을 홍보하는 수완이 좋다. 착착 쌓아올린 평판을 바탕으로 대통령 장례까지 주관한, 현세적이고 비지니스에 강한 캐릭터. 교회 사람들과 스스럼 없이 어울려 고스톱을 치고, 파묘에 참여한 인부(창민)가 몸이 좋지 않자 상덕에게 병문안을 부탁하는 등 열린 태도로 널리 사람들과 교류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성격으로 보인다.
기독교인으로서 교회의 ‘장로’이면서 굿을 하는 무당과 협업하여 이장 절차를 주관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종교 불문, 다양한 장례 의식의 절차적 측면을 관장한다. 장의사로서의 프라이드가 있어 “염도 안한 고인 정중히 잘 모시라” 잔소리하는 김상덕에게 “나 대통령 염한 고영근”이라며 발끈한다.
극중에선 “고 장로”라고 불리는데, 무늬만 크리스천은 아닌지 첩장 사실을 발견한 김상덕이 전화를 했을 땐 교인들과 열정적으로 성경 공부(?) 중이었고, 오니와 싸우는 장면에선 성경 구절을 암송하기도 한다.
다양한 종교와 살을 맞대고 살아가는 고영근. 풍수사와 고정 파트너이면서 때론 무당과 일하기도 하고 그 자신은 기독교 장로도 겸하고 있다. 여러 종교의 장례 절차를 통괄해야 하는 장의사의 직업 특성일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교리에 얽매이지 않는 도덕적 유연함이 없다면 그런 직업 생활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의 도덕적 스탠스를 시험한다. “너 우리 편이야?” “너 크리스쳔이야?” "넌 무속을 믿니?" 천성적 유연함 없이는 이런 인간 세상을 헤쳐나가기가 쉽지 않다. 고영근은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편안하게 모호함의 바다를 유영하고 있다.
그가 여러 종교에 두루 발 담글 수 있는 건 어떤 개별 종교에도 진지하게 몰입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Se를 주기능으로 갖는 ESFP는 어느 유형보다도 현실에 밀착해 있다. 특유의 개방성 덕에 신비체험에 잘 빠지기도 하지만 하나의 종교에 깊게 ‘헌신’하는 일은 쉽지 않다. ESXP유형인 고영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현생 그 자체다. 현생 위에 각 종교가 덮어씌우는 교리 체계는 아무래도 좋다. 확실한 건 삶은 즐겁다는 것, 그리고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사실이다. 죽은 후 어디로 가는지는 경험으로 검증할 수 없고 알 방법도 없으므로 깊은 관심이 가지 않는다. 중요한 건 좋아하는 사람들과 어울려 한평생 열정적으로 사는 것, 그리고 살아있는 동안 돈을 열심히 버는 것이다.
극 중 고영근의 특징 중 하나는 돈 이야기를 많이 한다는 점이다. 화림이 사건을 물어오자 “시작이 좋다. 냄새가 난다”면서 신나한다. 큰 건임을 알고 나서는 “예수님이 퇴직금을 챙겨주신다”며 기뻐한다. 첫 등장 씬인 김회장 가족 산소에서는 관 속에 들어있던 패물을 슬쩍하기도 한다. 자연이 우리에게 부여한 바 그대로의 이윤 추구 본능이 살아있는 모습이다.
급한 부탁에도 병원 영안실을 쓸 수 있게 쓰게 해준 후배(?)에겐 슬며시 뒷돈을 찔러주며 고마움을 표현한다. 도덕적 모호함과 분명한 거래감각의 조합이 인상적이다.
종교에의 캐주얼한 접근, 그리고 돈돈돈 거리는 면모를 합산하면 고영근은 확실히 ‘염불보다는 잿밥에’ 끌리는 사람이다. “예수님이 퇴직금까지 챙겨주시네”라는 말은 신성모독이다. 이장하려고 파낸 관에서 매장품을 꿀꺽하는 불경함. 그러나 악의는 없어 보인다. 타인을 다치게 하려고 훔친게 아니다. 사실 죽은 사람은 그 패물을 쓸데도 없지 않는가? 그의 불경스러움은 순진무구한 불경함이다. 야생 동물이 신을 몰라보는 것과 같은 순박함인 것이다.
“언제 익을 때까지 기다려요? 한번 지익 하면 되는 거지”
— 고기 익혀서 먹으라는 상덕에게 영근이 한 말.
신속한 쾌락 추구는 ESXP유형의 특질이다.
오니의 도깨비불이 공중으로 솟구쳐 원을 그리며 돌자 이를 목격한 모두가 트랜스에 빠져든다. 각자의 깊숙한 공포를 직면하며 일종의 신비체험을 한다. 고영근은 이때 돈 갚아야 하는데…따위의 내용을 중얼거린다. 그의 공포를 구성하는 것은 금전적 채무관계다. 즉, 고영근은 금전적 부채가 곧 감정적 부채인 사람. 물질 그 자체인 사람이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애 장의사란 직업에 딱일지도 모른다.
왜냐고? 장의사란 생명과 정신이 멸한 후 몸뚱이로 환원되는 단계를 관장하는 역할. 그리고 ESFP인 고영근은 생명과 물질 경계에 선 자다. 생명과 죽음의 신비를 직업적으로 다루는 일은 역설적으로 가장 물질적인(동시에 따뜻한 인간미를 탑재한) ESFP 고영근이 맡는 게 제격인 것 같기도 하다. 영혼이 너무 섬세해서 죽음 앞에 매번 흔들리는 유리 멘탈보다는.
“민족 정기니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팀원 모두가 께름칙해하는 첩장 건을 김상덕이 강행하려 하자, 고영근은 엄포를 놓는다.
ESFP유형은 외향적 감각(Se)를 1번기능으로 갖는다. 감각형답게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을 신뢰하고 경험을 중시한다. “민족정기”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무형의 가치를 신뢰하지 않는다. “민족정기니 쇠말뚝이니 그런 걸 아직까지 믿어요?”라며 역정을 내는 건 추상적 가치에 대한 영근의 불신을 잘 보여준다.
“말뚝이 박혀 있든 말든 우리 잘 살아왔잖아요?”
중요한 것은 신념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이상'라는 허울도 ‘잘 먹고 잘 사는’ 결과로까지 연결되지 못한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그저 뜬구름 잡는 소리인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대로 고영근의 1번기능은 외향적 감각(Se)이다. 이제 그의 부기능을 결정해야 한다. 이론 상, 주기능이 인식기능(S/N)이면 부기능은 판단기능(T/F)이어야 한다. 그는 사고형일까, 감정형일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나는 고영근이 F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기엔 그가 영화 속에서 보여준 냉정한 면모들이 맘에 걸린다. 지금부터 고영근의 가장 “T스러웠던” 대사를 검토해보자.
매년 평균 25만명이 죽고 그 중 30%가 매장을 하잖아. 조선시대부터 엄청나게 많은 묘를 썼을텐데, 아직까지 명당이 남아있어?
이장을 마치고 가게로 돌아와 삼겹살을 구워 먹으면서 고영근이 던진 질문이다. 이걸 두고 T의 결정적 증거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이 질문 자체만으로는 T라고 확신할 수 없다고 본다. 합리적 의심이 T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는 건 착각이다. 물론 여기서 그가 질문을 제기하는 방식엔 분명 "T스러운" 측면이 있다. 데이터를 먼저 쫙 깔아놓고 결정타로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 자신의 논지를 효과적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의도는 확실히 읽힌다.
그렇지만, 나는 이걸 <고영근=T>라는 등식의 결정적 증거로 보지 않는다.
만약에, 초면인 클라이언트가 만나자마자 대뜸 저렇게 치고 들어왔다면 T로 단정짓기가 훨씬 쉬울 것이다. 오늘 처음 만났는데 “안녕하세요 지관 선생님? 초면에 외람되오나 조선시대부터 지금껏 죽은 사람이 한둘도 아니고, 아직도 명당이랄 게 남아 있나요?"라고 풍수사에게 물었다면 그건 T로 의심할 만하다.
하지만, 고영근은 오랜 사업 파트너이자 친한 형과 함께 삼겹살을 구워먹는 중이다. 그런 캐주얼한 자리에서 오랜 궁금증을 천진난만하게 표현한 것이다. 친밀하고 안전한 관계에서라면 F타입들도 얼마든지 거리낌 없이 자기의 T적 본능을 펼쳐낸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이 발언을 T의 증거로 보지 않는다.
‘민족정기를 끊으려고 쇠말뚝을 박아 혈맥을 끊었다는 건 학계에서도 가짜라는게 정설이고 대부분이 토지측량용 말뚝으로 드러났다’는 영근의 주장.
학계의 다수설을 끌어다 제 논리에 보태고 있다. 주장의 정당성을 구축하기 위해 ‘다수의 의견’과 ‘데이터’를 주요 근거로 삼고 있다는 사실은 꽤 의미심장하다.
데이터를 좋아하는 것은 굳이 따지자면 확실히 T에 가깝다. 내 경험상 일상에서 통계를 자주 인용하는 건 외향적 사고(Te)계열에서 더 많이 보인다. 물론 내향적 사고형(Ti)들도 통계를 좋아한다. 그러나 이들에게선 통계를 내적 논리의 일개 도구로 취급하는 태도가 도드라진다고 본다. 통계 자료를 다른 증거와 교차시켜 사용하길 좋아하지 단독으로 결정적 증거로 삼는 경우는 Te에 비하면 자주 보지 못했다.
요컨대, 생활 속에서 통계를 애호하고 적극 활용하는 것은 Te 계열에서 더 자주 보이며, 그건 ‘외향적’ 사고 기능이 나 바깥의 근거와 평가를 판단의 중요 잣대로 삼기 때문이다. 남들이, 나아가 학계 전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외향적 사고’형에게 무시할 수 없는 데이터다.
고영근이 F타입이라는 것을 증명한다면서 나는 왜 생뚱맞게 그의 ‘외향적 사고(Te)’기능에 대해서만 구구절절 이야기하고 있는 걸까?
좀 테크니컬한 이야기지만, 고영근의 1번기능이 외향적 감각(Se)이라고 할 때, 이론상 그의 2번기능은 내향 기능이어야 한다. Fi 아니면 Ti인 것이다. 그리고 <Fi or Ti?> 의 문제는 <Te or Ti?>의 판단으로 도치할 수 있다. Fi-Te와 Fe-Ti는 함께 쌍으로 다니고, 계열 간 뒤섞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 형식 논리를 따를 때, 고영근은 Se-Fi-Te-Ni 위계를 가진 ESFP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이에 대해 간단한 답은 없다. 하지만 ESFP인 고영근이 영화에서 T스러운 대사를 내뱉은 건 그의 원 캐릭터 설정에서 우러나온 필연적 귀결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쉽게 말해, 캐릭터에서 벗어나는 대사들이다. 하지만, 영화라는 한정된 시공간 안에서 한정된 등장 인물들 간 다이내믹 상, 그가 꼭 말해줬어야 하는 말들이 있었고, 그가 맡아줘야만 하는 역할들이 있었을 것이다. 고영근의 필요가 아닌, 이야기를 끌어가야 하는 극작가의 니즈를 이야기하는 거다. 캐릭터의 일관성은 중요하지만, 영화 안에는 못지 않게 중요한 요소들이 많다. 어차피 현실의 인간은 이율배반적 행동을 하니, 허구의 캐릭터도 다소의 모순을 들인다 해서 붕괴되지 않는다. 여러 이유로 영화는 현실 속 인간과는 상이한 진폭을 만들곤 하는 것 같다.
ESFP는 삶을 사랑하는 건강함이 두드러지는 유형이다. 특유의 낙천성과 넉넉함이 특징적이다. 무엇보다 타인을 향한 날카로운 독침이 없다는 점이 포인트. 천연 상태의 ESFP유형은 전혀 시니컬하지 않으며, 이들에게 풍자나 남을 비꼬는 비릿한 DNA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 말은 Se-Ti인 ESTP유형에겐 독침이 있다는 말인가? ‘독침’이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는 있지만 날카로운 면은 확실히 있다. ESTP유형은 평소에 둥글둥글 잘 지내고 있을 뿐, 날선 면도날 몇개 쯤은 가슴 속에 품고 있는 것이다. 그건 고영근이 상덕에게 물었던 "명당이 남아있쓰까나" 정도의 질문으로는 닿을 수 없는 뾰족함이다. 고영근은 둥글다. 그래서 그는 ESFP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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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근을 타입핑하는 과정에서 마지막까지 Te 1번인 ENTJ가 경합했다. 그러나 ENTJ는 유연성 측면에서 고장로의 캐릭터와 맞지 않는 것으로 판단했다. Te가 스택상 높다면(ENTJ), 극 중 상덕의 말대로 정말 병원 장례식장 쪽으로 커리어를 틀었거나, 명인 타이틀을 활용해 독자적 브랜드화하며 스케일을 키웠을 수도 있다고 본다. 언제까지고 저렇게 상덕과 소박하게 일하면서 교회 사람들과 노닥노닥 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판단이다. ESFP에 비한다면 ENTJ의 삶의 태도는 훨씬 초조한 편이기 때문이다.
또한, 부기능이 Ni였다면(ENTJ), 여러 종교에 문어발식으로 발 담그는 뻔뻔함이 덜 보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영근에게선 Te의 팍팍함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Se 특유의 ‘악의 없는 물욕’이 전면에 드러나는 캐릭터. 고영근을 범죄자에 비유한다면 지능범/사상범/확신범보다는 충동범에 훨씬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