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츠제럴드와 젤다 이야기
<위대한 개츠비>라는 세계적인 명작을 남긴 F. 스콧 피츠제럴드와 그 부인인 젤다의 관계는 예술가와 뮤즈의 관계로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젤다는 작가를 망친 팜므 파탈이라고 부르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있고, 서로 열렬히 사랑해서 시작했지만 결국은 서로가 서로를 망친 부부라고 보는 것이 맞는 관계로 보인다.
다시 젤다에게
미국의 '잃어버린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 F. 스콧 피츠제럴드가 그의 가장 대표적인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첫 장에 붙인 헌사이다. ‘젤다에게’가 아닌 ‘다시 젤다에게’라는 글귀가 인상적이다.
<위대한 개츠비>를 탈고하기 전, 피츠제럴드는 아내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상대는 프랑스의 젊은 파일럿 에두아르 조잔으로, 젤다가 이혼을 요구하자 피츠제럴드는 그녀를 집에 가두고 이혼 요구를 철회하도록 압박을 가했다. 에드아르의 발령지가 바뀌어 떠나게 된 것을 계기로 그들 부부는 이혼을 면하게 되었지만, 그 후 그들의 화려했던 인생은 점차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에 빠지듯이...... 서서히 망가지게 된다.
그들의 인생은 정말로 화려했기에 그 낙폭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1918년 프린스턴 대학에 다니던 중에 군대에 입대한 피츠제럴드는 알래스카 주 몽고메리 근처에 주둔하고 있을 때, 그의 운명의 상대인 젤다 세이어를 만났다. 상원의원과 주지사의 손녀이자 대법관의 딸로 태어나 미스 앨라배마에 등극할 정도의 미모도 갖췄던 젤다는 그가 여지껏 만나기 힘들었던 상류층의 화려한 아우라를 가진 여자였다. 피츠제럴드는 마치 데이지를 만난 개츠비처럼 단번에 깊이 사랑에 빠졌다. 그들은 약혼을 했고 뉴욕으로 가서 돈을 벌어보겠다던 피츠제럴드는 고작 한 달에 90달러를 받는 광고직을 얻었을 뿐, 젤다로부터 파혼 선고를 듣고 만다.
실의에 빠진 피츠제럴드는 마지막 수단으로 소설 쓰기에 매달렸고, 1920년 3월 26일 출간된 <낙원의 이쪽>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비평가와 독자들에게서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그해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책을 출판할 때 피츠제럴드는 출판사 측에 책을 빨리 내달라고 독촉하기도 했는데, 그 목적은 바로 젤다였다고 한다. 처녀작의 눈부신 성공으로 피츠제럴드는 젤다의 마음을 다시 돌려, 두 사람은 그해 4월 3일 결혼을 할 수 있었다. 그 여세를 빌어 장편 <아름답게 저주된 것>, 단편집 <재즈 시대의 이야기> 등을 써서 모두 성공함으로써, 피츠제럴드는 일약 문단의 스타가 됐다.
당시 대중이 사랑한 것은 피츠제럴드의 소설뿐만이 아니었다. 젊고 재능 있고 뛰어난 매력을 갖춘 이 부부는 재즈 시대의 상징이 되어, 1920년대 미국의 셀레브리티 커플이 되었다. 피츠제럴드가 미국의 유례없는 호황기인 재즈 시대를 대변하는 시대의 대변자로 주목받는 한편, 젤다도 ‘flapper girl(건달 아가씨)’이라는 새로운 이미지의 여성상으로 급부상하면서, 단발, 진, 담배, 미니스커트, 재즈.....이른바 플래퍼 패션의 원조로 우뚝 서게 되었다. 가정에 얽매이고 남편에게 봉사하는 당시의 여성들에게 매일 파티로 흥청거리는 젤다의 화려한 삶은 화젯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고, 신문 1면에서 그들 부부를 ‘1920년대의 이상적인 커플’로 보도할 정도였다.
1920년대는 미국의 성 혁명 시대로 기록되는데, 이 혁명의 선두 주자가 바로 플래퍼였다. '플래퍼'는 소리를 흉내내는 의성어로 이제 막 날기를 배우려는 새끼 야생오리라는 뜻으로서, 넓게 보자면 1차 세계대전 이후 여성들의 사회참여로 인해 생겨난 신여성을 일컫는 말이다. 하지만 그 전형적인 모습은 짧은 치마를 입고 담배를 물고 색소폰 소리에 몸을 흔들어대는 '노는 여자'의 모습이었다. 1922년 <플래퍼>라는 잡지가 창간될 정도로 '플래퍼 붐'은 미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말이 외국으로 수출되면서 부정적인 의미가 더욱 강해져서, 한국에서도 한때 '여자 깡패'나 '행실이 방정하지 못한 여자'를 가리켜 '후랏빠'라고 부르기도 했다. 플래퍼에도 급이 있었는데, 젤다나 위대한 개츠비의 데이지야말로 전형적인 고급 플래퍼였다. 피츠제럴드는 젤다를 '미국 최고의 플래퍼(the first American Flapper)'라고 부르기도 했다.
피츠제럴드와 젤다는 너무도 이른 성공에 취해 돈을 물처럼 쓰면서 젊음을 무기로 무절제한 생활을 이어갔다. 이름 있는 상류층의 사교파티에 수시로 참석했고, 술을 마시면 무조건 만취해야 했으며 취하면 그 당시 사회면 기사에 가십거리로 대서특필될만한 일들을 저질렀다. 지폐에 불을 붙여 담배를 피우기도 하고, 정장을 차려입은 채로 도심중앙 플라자 호텔 분수로 뛰어드는가 하면, 술에 취해 택시 지붕 위로 뛰어들어 엎어지기도 했다.
<위대한 개츠비>에 묘사되고 있는 것처럼 사실, 그 시대가 그런 광란의 시대이기도 했다. 미국에서 1920년대는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로 부를 만큼 번영과 환락이 극에 달한 시대였다.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그간 억눌려 왔던 쾌락의 욕구를 풀겠다는 듯이, 자유분방한 재즈와 더불어 찰스턴과 같은 광란의 춤이 유행했고 여성들은 빅토리아 시대의 속옷을 벗어던지고 짧은 스커트를 입기 시작했던 시절이다.
월스트리트에 주식부자들이 넘쳐나던 이 화려한 재즈 시대에 피츠제럴드 부부는 뉴욕, 파리, 리비에라 해안, 로마 등을 오가며 사치스럽게 살았는데, 특히 당대 예술의 중심이던 파리로 건너가서는 거트루드 스타인, 피카소, 장 콕토, 헤밍웨이 등과 교류하며 문학사상 가장 찬란한 술과 장미와 파티의 나날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삶에서 극단의 무절제를 추구했던 이들 커플은 앞서 말했듯이 짧고도 화려한 성공 뒤에 길고도 쓰디쓴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피츠제럴드는 헤밍웨이와 각별한 우정을 쌓게 되는데 헤밍웨이는 그의 아내 젤다를 싫어했다고 한다. 그녀의 무절제한 생활이 그의 집필 활동을 방해하고 그에게 술을 퍼부어 먹인다는 것이 그녀를 비난하는 주된 이유였다. 바로 이런 점이 후대에 젤다를 남편을 망친 팜므 파탈로 오랫동안 인식되게 했던 요인일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 이르러서는 그림, 글쓰기, 발레 등의 여러 재능이 있었던 젤다가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남편을 위해 희생했다고 보는 시각도 생기기 시작했다. 특히 젤다의 일기장과 평소 말투 등을 피츠제럴드가 자신의 작품에 종종 인용했다는 점에서 그 지적은 맞는 부분이 있어 보인다. 젤다는 자신만의 글을 써서 <왈츠는 나와 함께>라는 작품을 출판하기도 했는데, 출판편집자의 젤다의 원고들에 대한 대체적인 평은 플롯은 약한데 공감각적 표현력은 좋다는 것이었다. 소설은 실패했다. 하지만 그녀의 최종 원고가 피츠제럴드의 <밤은 부드러워>와 겹치는 부분들을 피하기 위해, 남편의 검수를 받는 과정에서 이미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는 변명이 가능하다.
1925년 발간된 <위대한 개츠비>가 기대에 훨씬 못 미친 성과를 보이자 피츠제럴드는 점점 더 술에 더욱 빠져들었고, 스스로 작가로 성공하여 남편과 경쟁하고 싶어 했던 젤다는 마침내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게 됐다. 이런 와중에도 사치스러운 생활은 계속되었고, 젤다의 병원 빚과 함께 이들 부부는 점점 더 빚더미에 올라앉게 됐다.
1929년 젤다는 가족과 함께한 자동차 여행 중 사고를 일으켜 자살을 시도하는데 이 일로 정신과 치료를 받게 되었고 1930년,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헐리우드에서 시나리오를 쓰면서 생계를 이어가던 피츠제럴드는 1939년 헐리우드를 무대로 <The Last Tycoon>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 소설은 미국의 위대한 꿈과 이를 실현하려는 인물을 창조하기 위한 피츠제럴드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소설을 절반 정도밖에 쓰지 못한 채 44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죽고 만다.
1924년, <위대한 개츠비>를 탈고하면서 피츠제럴드는 자신이 지금까지 쓴 소설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지금 새롭고 아름답고 단순한 것 이상의 정교하게 꾸며진 그 무엇을 쓰고 있다. 이 소설은 지금까지 나온 소설 중 가장 훌륭한 소설이 될 것이다.
--- 피츠제럴드가 편집자에게 쓴 편지 중에서
그러나 <위대한 개츠비>의 판매실적은 이상하게도 기대에 훨씬 못 미쳤다. 그를 하루아침에 스타로 만들어준 데뷔작 <낙원의 이쪽>과는 달리, 소설은 데뷔작의 절반도 팔리지 않았다. 소설이 출간된 1925년 내내 팔려 나간 부수는 2만 부에 지나지 않았고, 그래서 피츠제럴드는 이후 내내 경제적인 궁핍에 시달려야만 했다.
피츠제럴드는 단편소설이나 잡문 따위를 써서 ‘에스콰이어’나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 같은 잡지들에 넘김으로써 부족한 생활비를 보충했다. 이런 단편소설 속에는 물론 그의 탁월한 상상력과 독창성이 숨어 있기도 했지만, 생활비 때문에 급히 써내려가야 했던 탓인지 수준 미달의 작품들도 많았다. 결벽성이 강한 내성적인 성격의 피츠제럴드는 이런 작품 판매를 ‘매춘행위’라고 스스로 비하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실의에 빠진 피츠제럴드는 점점 더 알콜에 빠져 들어갔고, 아내 젤다는 정신병원을 들락날락하는 신세가 되었다. 당시로서는 조현병의 진단을 받았지만 사실은 조울증에 더 가까운 상태였다고 한다. 1934년 그는 애써 힘을 모아 거의 자신들의 자전적인 이야기라고 볼 수 있는 장편소설, <밤은 부드러워>를 출간하게 된다. 하지만 역시 예전과 같은 반응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1937년에는 급기야 영화 시나리오 쓰는 일로 돈을 벌어보려고 헐리우드 MGM사와 전속계약을 맺게 된다. 이후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각색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왕년의 유명 작가인 피츠제럴드가 크레딧에 이름조차 올리지 못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3년 계약이 끝나자 그 일마저도 끝나게 되었고, 이런 자존심 상하는 품팔이식의 일조차도 결과적으로 보이콧당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 후 피츠제럴드의 알콜 중독은 점점 더 심해져서 하루에 맥주를 30캔씩 마시는 지경에 이르렀고, 의사는 당장 술을 끊지 않으면 1년 안에 죽을 것이라고 경고를 했다. 그래도 술을 끊지 못하던 그는 결국 1940년 44세의 아직 창창한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하게 된다.
임종 무렵에는 거의 잊혀진 작가가 되었던 그의 장례식은 마치 그가 묘사한 소설 속 개츠비의 장례식과 놀랄 만큼 유사하다. 한때 수많은 연회와 파티에서 함께 어울리던 그 많던 동부의 유명인사들 그 누구도 그의 장례식에 오지 않았다. 작가로는 도로시 파커가 유일한 참석자였는데, 누군가 소설 속 개츠비의 장례식에서처럼 ‘poor son-of-bitch’라는 말을 내뱉었다고 한다.
정신병으로 수용소 비슷한 요양원에 갇혀 지내던 아내 젤다에게 닥친 종말은 더 가혹했다. 피츠제럴드가 세상을 떠난 지 8년 후 요양원이 화재에 휩싸이면서, 꼭대기 층에 있던 그녀도 불에 타서 사망하고 만 것이다.
한때 ‘그들 세대의 왕자와 공주’라고 까지 불리웠던 화려한 미국의 1920년대,..... ‘재즈 시대’의 총아와도 같던 그들 부부의 마지막은 마치 개츠비의 죽음처럼 가슴 아프고, 허무하고, 슬픈 것이었다.
말년의 피츠제럴드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나는 젤다가 입원해 있는 정신병원으로 가는 조그만 길에 내 모든 희망을 버리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