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화되기도 한 실비아 플라스와 테트 휴즈의 스캔들
미국에서 공부할 때의 일이다. 주말이면 도서실이 텅 비었다. 다들 놀러가기 바빠서 주말에 도서실에 남아있는 사람은 나 같은 동양인 지진아(?)를 포함한 몇 몇 게으른 사람들뿐이었다. 박사학위 따려고 놀지도 않고 죽도록 공부하는 사람은 바보나 미친 사람으로 취급을 받고, 아등바등 벌어 집을 사느니 그 돈으로 임대료 내고 놀러 다니는 매우 실용주의적이고 ‘잘 노는’ 나라였다.
자원이 많고 땅덩어리 넓은 나라에 태어나서 데모 한번 안 하고 젊음을 오로지 젊음답게 누리고 사는 그들, 태어나 그저 쉽게 익힌 모국어가 세계 공용어라서 세계 어느 나라에 가도 너무 편한 그들이 (그들은 영어가 남의 나라 사람에게는 제2 외국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처럼 군다) 솔직히 부러웠지만, 말은 반대로 고깝게 나가곤 했던 것 같다. 주말 도서실에서 우연히 만난 같은 클래스의 여학생에게 이렇게 시비를 걸었던 기억이 있다.
“너 우리나라 38선을 미국과 소련이 우리 의사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만들었다는 거 아냐? 그 이후로 우리나라가 둘로 갈라졌다”
“정말 그러냐? 근데 너희 나라는 왜 가만있었냐?”
“힘이 없으니까 그렇지, 지금도 너네 나라는 여기저기 가서 너네 마음대로 하잖냐?”
“........”
“나는 어떨 땐 그런 너희 나라가 싫다”“........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사실은 우리나라가 싫어.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우리 정부 말이야. 왜 자기가 뭐나 되는 듯이 이 나라 저 나라 가서 맘대로 하고 다니면서 욕먹는지 모르겠어, 자기가 무슨 세계의 경찰이냐?”
그 친구가 도리어 나보다 더 열을 토하면서 자기 나라 정부를 욕하는지라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서 머쓱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면서 그 친구는 따뜻하게 물어왔다,.
“너 언제 한국 가냐? 한국가기 전에 말해라. 내가 밥 한 끼 살게”.
‘미국시’라는 과목을 들을 때 만난 다른 친구도 있다. 금발의 예쁘게 생긴 시인 친구였는데, 그 친구는 강의시간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만 있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부탁도 안 했는데 자기 노트를 빌려주고, 자기 집에 가서 같이 밥 먹으면서 공부하자고 초청을 하기도 했다. (그때 한 말이 황당하게도 “너 혹시 스파게티라는 음식 먹을 줄 아니?”였다).
그 친구 집에 가볼 날을 기대하고 있는데, 바로 그 날부터 그 친구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걱정이 됐지만 집 전화번호도 모르니 연락을 할 수도 없었다. 한 한 달쯤 후에 그녀가 핼쓱한 얼굴로 학교에 나왔다.
“ 야, 반갑다. 너 그동안 왜 학교에 안 왔니?”
“응, 몸이 좀 아팠어”.
“어디가?”
“검사를 받았는데........뇌종양(brain cancer)이래.”
“뭐? 뇌종양? 그럼 어떻게 되는데?”
“의사가 수술을 받으라는데, 난 싫어. 수술 같은 건 안 받을 거야. 수술해도 살 확률이 10%정도라는데 왜 쓸데없이 내 머리를 가르냐? 난 그냥 이렇게 시 쓰면서..... 남자친구랑 같이 살다가 용감하게 죽을 거야.”
그러면서 그 친구는 마치 아무 일도 아니란 듯이 밝게 웃었다. 감기에 걸린 사람도 그녀보다는 더 기운이 없게 보일 정도로,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명랑하고 씩씩하게 다녀서 위로의 말조차 건네기 쑥스러울 지경이었다.
너무 감수성이 풍부해서 교수가 낭송하는 시를 듣는 것만으로도 눈물을 줄줄 흘리던 그녀, 아마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 분명한 리아라는 이름의 그 친구가 좋아하던 시인이 바로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 1932-1963)'였다.
실비아 플라스는 서른 살의 젊은 나이에 자기 집 가스 오븐에 머리를 넣고 자살함으로써 신화가 된 미국의 유명한 여류 시인이다. 강의실에서 실비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학생들 사이에서는 뭔지 모를 ‘경외’의 분위기가 느껴지곤 했다.
실비아는 이른바 ‘고백파(Confessionism)’ 시인의 한 사람으로 ‘아버지, 너는 개 새끼다....’라는 식의 극단적인 싯귀가 등장하는 도발적인 시와 너무나도 드라마틱한 삶으로 인해, 한때 우리나라에서 전혜린이 그러했듯이 죽어서 신화가 되고, 우상이 된 인물이다.
먼저 실비아가 속해있던 ‘고백파’라는 시인들의 그룹을 보자. 그들은 대개 실비아에 비해서 전혀 뒤질 것 없는 강렬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을 절벽에 불러 모아 놓고 관객(?)들이 모두 열렬하게 박수를 치는 가운데 유유하게.......마치 퍼포먼스처럼 떨어져서 자살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으니 말해 더 무엇하랴.... 오죽하면 한때 왕성한 기운을 자랑하며 미국 시단의 주류를 형성하던 그 그룹이 거기 속한 시인들이 모조리 젊을 때 자살하거나 마약, 알콜 등등으로 병사해버려서 어쩔 수 없이 사멸되어 버리고 말았을까.
그렇다면 재능과 미모, 명예 등 세인이 부러워하는 여러 가지를 두루두루 갖추고 있던 실비아가 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여기에는 영국의 매력적인 계관시인 테드 휴즈와의 국경을 넘는 화끈한 사랑과 이별이 결정적인 원인이 됐다는 것이 중론이다.
150년 만에 찾아온 끔찍한 혹한이었다. 1962년 영국의 겨울.... 크리스마스 전부터 내린 눈은 그칠 줄 모르고 2월까지 계속되었고, 기차와 자동차들은 길에서 그대로 얼어붙고 파이프들은 모두 터지고 난방은 되지 않았다. 실비아는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이 집에서 홀로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악화된 건강, 외로움, 우울증.... 지독한 추위....
1963년 2월 11일, 실비아는 옆방에서 노는 두 아이가 배고프지 않도록 우유와 빵을 놓아두고는 가스가 아이 방으로 못 새어 들어가게 꼼꼼하게 문틀에 테이프를 바른 후, 가스 오븐에 머리를 처박았다.
아이들을 돌보러 아침 9시에 집 앞에 도착한 도우미 아줌마는 열리지 않는 문밖에서 2시간을 꼬박 기다린 후에야 마침 건물 수리를 하러 온 일꾼들 덕분에 집안으로 들어설 수가 있었다. 집 안에는 가스 냄새가 가득 차 있었고, 아직 체온이 남아있는 실비아는 부엌에 엎어져 있었다. 옆에는 ’의사를 불러주세요‘라는 쪽지가 남겨져 있었지만, 실비아의 생명은 이미 멎어 있었다
이젠 안돼요, 더 이상은
안될 거예요. 검은 구두
전 그걸 삼십 년간이나 발처럼
신고 다녔어요. 초라하고 창백한 얼굴로.
감히 숨 한 번 쉬지도 재채기조차 못하며.
아빠, 전 아빠를 죽여야만 했었습니다.
그래볼 새도 없이 돌아가셨기 때문에요
..........
아빠의 살찐 검은 심장에 말뚝이 박혔어요.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조금도 아빠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춤추면서 아빠를 짓밟고 있어요.
그들은 그것이 아빠라는 걸 언제나 알고 있었어요.
아빠, 아빠, 이 개자식. 이제 끝났어.
실비아 플라스의 유명한 시. <아빠>의 일부분이다. 평자들에 의하면 이 시에 나타나는 ‘아빠’는 문자그대로 육친의 아버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부장제에서 여성들에게 폭압적이었던 ‘남성’을 은유하는 한 상징으로 읽혀질 수 있다고 한다. 실비아 플라스는 바람피고 가족을 떠난 남편, 아니 30여 년간 그녀를 억눌렀던 50년대 미국의 그 엄격하고 답답한 가부장제에 그런 과격한 방식으로 ‘복수의 칼’을 꽂고 희생자로서 ‘순교’했다는 것이 사후 그녀를 신격화했던 페미니즘 진영의 해석이다.
죽기 전 몇 달 동안 그녀는 엄청난 기세로 시를 썼다. 집안일에 시달리며 어린 두 아이를 키우던 그녀는 새벽 네 시에 잠을 깨어 일상이 시작되기 전까지 마치 신들린 듯이 글을 써댔다. 한 달 동안 무려 서른 편. ‘새벽 네 시경, 아기 울음소리도 아직, 우유병을 정리하는 우유 배달부의 유리 음악도 아직 시작되기 이전, 여전히 푸르스름한, 영원에 가까운 그 시각에 씌어진’ <에어리얼(Ariel)>의 시편들은 영문학사에 영원히 기록될만한 걸작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드러나듯 그녀 스스로도 자신이 시대를 뛰어넘는 걸작을 쓰고 있음을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남편과 헤어진 지 6개월이 지난 후..... 그녀는 젊디젊은 머리를 가스 오븐에 쳐박음으로써 그녀의 짧은 삶과 시를 ‘불변의 신화’로 만들었다.
실비아 플라스는 1932년 10월 27일 매사추세츠에서 보스턴대학의 생물학 교수이자 땅벌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였던 오토 플라스의 딸로 태어났다. 8살 때 목격한 아버지의 죽음에 의한 충격으로 그녀는 아버지가 죽은 이듬해인 아홉 살 때 첫 번째 자살 시도를 벌인다.
1955년 명문 스미스여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실비아는 풀브라이트 스칼라십으로 영국의 케임브리지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된다. 그리고 그 체류 기간 중에 한 출판기념 파티에서 전도유망한 영국의 청년 시인 테드 휴즈를 만나 56년에 결혼했다.
57~58년까지 미국으로 돌아와서 모교인 스미스대학 영문과에서 ‘영문과 역사상 한 두명 나올까 말까한 훌륭한 강사’로 재직했던 그녀는 59년 남편과 함께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둘째 아들 니콜라스가 태어난 해인 1962년 10월, 그토록 사랑했던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의 사후...... 테드 휴즈에게는 살인자라는 오명이 평생을 따라다녔다. 나중에 엘리자베스 2세에 의해 계관시인의 칭호를 받게 되는 걸출한 시인인 그가 낭송회를 열 때마다 그를 비난하는 피켓을 든 실비아의 팬들이 따라다녔고, 실비아의 묘비명에 새겨진 휴즈라는 이름은 성난 팬들에 의해 여러 번에 걸쳐서 지워졌다가 다시 쓰여 지는 수난을 겪게 된다.
게다가 실비아와의 헤어짐에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던 두 번째 아내마저 똑같이 가스를 이용해서 자살해 버리자 (그녀는 아이도 함께 데리고 갔다), 그에 대한 페미니즘 진영의 비난은 더욱더 거세질 수밖에 없었다.
생전에 휴즈는 한 번도 실비아와의 결혼생활에 대해 변명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비아가 죽은 지 30여년이 지난 후, 모든 비난에도 꿋꿋하게 버티던 그는 암으로 죽기 직전..... 실비아와의 뜨거운 사랑과 이별...... 개인적인 회한과 고통을 담은 <생일 편지>라는 시집을 출간했다. 휴즈의 죽음 이후, ‘20세기 영미문학계 최고의 스캔들’로 불리는 그들의 사랑은 개인적인 기억 속으로만 완전하게 봉인되게 되었다.
휴즈가 정말로 두 여자를 자살로 몰만큼 나쁜 남편이었을까? 아니면 병적인 기운이 있었던 실비아가 단지 세 번째 자살 시도에서 성공한 것일까? 젊고 재능 있고 유명했던 두 걸출한 시인의 스캔들에 매혹된 독자들의 궁금증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증폭되고 있다.
나무와 돌이 그림자 없이 반짝반짝 빛났어요.
내 손가락 길이가 유리처럼 투명하게 자랐죠.
나는 3월의 잔가지처럼 싹이 나기 시작했어요.
팔과 다리, 팔, 다리
그렇게 나는 돌에서 구름으로 올라갔죠.
이제 나는 얼음판처럼 순수한
내 영혼의 변화 속에서 공기를 떠다니는
신을 닮았어요. 이것은 선물이죠.
--- 실비아 플라스 <연애편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