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우물을 팠더니 그 우물에 빠졌다 (4)
3-2. 뻔뻔하게 시작하라, 컨펌자는 '나'다.
자, 일단 시작은 심플하게 가자!
근데 이제 좀 많이 심플해서 뻔뻔한.
블로그를 만드는 것 까지는 나름 계획적이었다.
계획이 없는 것 같지만 나는 계획이 다 있었다.
일단 앞서 말했다시피, 주제는 명확했다.
나를 위한 술(맛)집 기록. 나를 위해서, 내가 보기 위해서 만든 다음에, 나랑 술 먹을 사람들이 술집을 추천해 달라고 하면 그들에게 블로그를 보여준다. 정말로 내 지인들에게 내가 소개하고 싶은 맛집을 쓰는 거니까,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가감없이 하고 맛이 있는지 없는지 역시 솔직하게 쓴다. 내가 술집에 갈 때 중요시 하는 것들, 예를 들면 화장실이라던가 그곳에 있어야 하는 주종같은 것! 그리고 술 당기는 안주, 혹은 밑반찬에 대해서 잘 기록한다.
그리고 오래 된 계정으로 블로그를 만든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신규 계정보다는 오래 된 계정으로 블로그를 만드는 것이 낫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오래 사귄 친구처럼, 아마 조금 더 오래 된 계정이 계정 자체의 신뢰성이 있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가지고 있던 계정 중 조금은 오래 된 계정으로 블로그를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체험단은 하지 않는다. 솔직히 첫 술도 안 뜬 놈이, 아직 누가 체험단 해보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이 소리부터 하는 건 웃겼지만 적어도 회사의 컨펌, 컨펌, 반려, 그리고 컨펌 제도를 거치고 내가 한 결과물을 평가받는 것에 익숙한 나는 이제 그게 싫었다. 누군가에게 대가를 받으면 그에 따른 책임이 따르는데, 난 책임이 싫었다. 그냥 나 하고싶은대로, 내가 쓰고 싶은 것을, 싫으면 싫다고 솔직하게 쓰고 싶었기 때문에 이렇게 목표를 잡았다. 결국 그냥 최종 컨펌자가 '나'인 일을 하고 싶었다.
어쨌든 목표가 생겼으니, 블로그를 시작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게 뭐 별거라고, 주변에 소문을 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나는 음식을 먹을 때 사진을 찍는 타입도, 사진을 잘 찍는 타입도 아니었으며, 괜히 식사 자리에서 카메라를 꺼내드는 게 어색한 사람이었다. 안 하던 짓을 하려니까 뻘쭘했고, 그걸 이겨내기 위해서는 소문을 내야했다. 그래야 누구라도 옆구리 찔러서 '야, 블로그 한다며! 사진 안 올려?'하지 않겠느냔 말이지.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블로그 잔치 소문을 내놓고 먹을 걸 안 차렸다.
소문난 잔칫집에 먹을 게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밥상을 안 차렸다.
나는 소문만 내놓고 술집에 가면 버릇처럼 신나게 술을 따르고 안주를 먹었다. 다 먹고 취기가 올라 신날때 쯤 누군가 불현듯 물었다.
"야, 너 블로그 한다며? 사진 안 찍어?"
그러면 또 다시 민망해졌다.
"어, 다음에 찍으려고!"
이미 다 먹은 술상, 애매한 사진.
그리고 밥상 앞에서 카메라를 들어버릇하지 않은 나의 습관까지 더해져서 모든것은 차일피일이 되었다. 나름 계정도 만들었고, 블로그도 열어두었는데 올라가는 글이 없었다. 대충 하자는 마음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또 되도 않는 완벽주의 비슷한 게 나를 괴롭혔다.
근데, 완벽한 포스팅이 뭔데?
애시당초 그걸 못 하겠어서 '나를 위한 술(맛)집'을 올린다고 해놓고, 도대체 난 나한테 뭐 그렇게 완벽한 걸 바라나 싶었다.
결국, 나의 첫 포스팅은 정말 뻔뻔했다.
그 날도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안주가 나왔고, 대충 술을 마시기 시작했는데 '밑반찬 김치'가 너무 맛있었다. 이 술집은 메인 메뉴도 맛있지만 김치랑 술 먹으면 술이 술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한참 뭔가 먹던 중인데, 평소 같았으면 또 다음에 사진 찍어서 꼭 올려야지! 했을텐데, 갑자기 이 술집을 포스팅하고 싶어졌다.
먹다가 찍은 김지천.jpg
이미 한창 끓고 난 뒤라 낙지가 다 쪼그라들어서 잘 안 보이는 연포탕.jpg
뭔가 아쉬우니까 소주병 하나.jpg
심지어 그렇게 맛있다던 김치는 안 찍어서 텍스트로만 대체함.wow
사실 대충대충 같지만, 나 나름 뇌에 힘을 꽉 주고 찍은 사진이었다.
꼭 찍어야 한다! 는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찰칵, 찰칵.
그렇게 세 장의 사진으로, 첫 포스팅을 했다.
메뉴판도 없었다.
대단한 후기보다 내 변명이 더 많았다.
사진을 잘 못 찍은 이유.txt
아니 내가 원래 블로그 이렇게 개판으로 하려고 한 게 아닌데.txt
진짜, 정말.
지인들만 본다고 생각하니 할 수 있던 포스팅이며, 나의 단순한 취미이자 또 하나의 도전이라고 생각했으니 할 수 있던 포스팅이었지, 말 그대로 개판이었다.
하지만, 좋았다.
이 포스팅의 컨펌자는 나였다.
보통 누군가에게 컨펌을 받고 일을 했고, 거기서 누군가가 나를 비판만 해도 우울한 날이 많았고, 내가 의도한 결과물이 100인데 남들의 컨펌을 거쳐 30이 되면 우울했던 나였지만 이건 완전 별개의 일이었다. 결과가 30이었어도 나의 의도도 30이고, 거기다가 30이 됐다고 누가 욕을 하지도 않았다.
블로그라는 건 만약 잘 되면 방문자도 많아지고 좋은 것이었겠으나, 내가 누군가에게 의뢰를 받아서 쓴 게 아니기 때문에 좀 개판이 난다고 해도 문제가 없었다.
글 하나를 올리고 나니, 어려울 게 없었다.
첫 글이 개판이니까 더 좋았던 건 다음 글은 덜 개판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신이나서 사진첩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간 대충대충 찍어놓았던, 지인들에게 자랑하기 위해 찍어둔 메뉴 사진들이 몇 개 나왔다. 그걸 조금씩 올리다보니 흥이 나서, 이제는 술을 마시고 집에 와서도 블로그를 올리는 지경이 됐다. 남이 시킨 게 아니라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밤 늦게 해도 즐거웠고, 매일 블로그의 방문자 수를 보는 것이 또 다른 낙이 됐다. 일로 조금 우울해도, 블로그에 100명이 들어오고, 댓글이 하나 달렸는데 '블로그 재밌네요.'하면 기분이 날아갔다.
와씨, 짜릿해!
하던 순간, 그래도 나는 더 짜릿하고 싶었다.
무조건 뭔가를 할 때는 내가 한 일에 대한 보상이 따라야 즐거운 법인데, 조회수나 댓글도 짜릿했으나 그보다 더 짜릿한 게 세상에 딱 하나 남아있었다.
돈.
네, 저 블로그로 돈 벌고 싶어요.
근데 이렇게 쓰니까 갑자기 '블로그 부업으로 돈 버는 방법.txt'쓰는 사람 같은데, 저 그거 아니고요.
이상한 편법이 아니라서 사실 돈을 되게 많이 벌지도 못하지만, 어쨌든! 블로그로 돈을 벌 수 있는 또 하나의 정석적인 방법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