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봄에는 밥대신 꽃
직장인들이 일하면서 자주 사용하는 그들만의 언어나 표현법들이 많이 있겠지만, “언제 밥 한번 먹자”도 그것들 중의 하나이지 않을까 싶다.
특히, 내내 연락 한번 안 하고 지내다가 급하게 무슨 일을 부탁했는데 들어줬을 때, 통화말미에 “시간 될 때, 우리 밥 한번 먹자”라고 마무리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던 것 같다.
어느 날 회의에서 저 건너편에 심각하게 앉아있는 예전 부서원을 우연히 마주치고는 회의 종료 후, 다가가 “잘 지내지? 밥 먹은 지 오래됐다. 밥 한번 먹어야지”라고 한마디를 건네기도 했었다.
그리고 달력을 열어 약속 날짜를 정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렇게 말하고 아쉬운 듯 또는 멋쩍게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진다.
흔히 말하는 의례적인 사회생활의 일환으로 주고받는 인사치레였을지 모르나, 그 순간에는 일 말고, 회사 말고, 밖에서 마음 편하게 보자는 마음을 에둘러 표현했다고 한 것이 진심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퇴직하고 나서 그동안 루틴하게 해 왔던 많은 일들이 바닷가에서 파도에 쓸려나가는 모래알처럼 일상에서 서서히 또는 빠른 속도로 빠져나가고 있다. 우연히 사람을 만날 수 없으니, “언제 밥 한번 먹자”라고 말할 필요도 없어졌다.
일로 만난 사이는 기본적으로 단순하지 않기에 인간관계로 인한 피곤함은 확실히 줄어들었다고 할 수 있으나, 내 발로 나왔음에도 어쩔 수 없이 좀 헛헛하다.
집 앞 나무들도 아직 겨울이 우세라서 그런지 물이 오르긴 한 것 같으나, 허한 마음을 달래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그렇다고 우울한 기분을 그대로 두기 싫어 봄꽃이라도 사고 싶어졌다.
꽃을 사러 가는 길에 언제 꽃을 샀더라... 하고 돌이켜 생각해 보니, 단 하룻 동안에 엄청난 꽃과 화분을 받은 날이 떠오른다. 작년 여름 퇴직한 날.
이리가나 저리 가나 직장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주말 예배를 마치고 집 근처 꽃시장에 들렀다. 초입부터 봄을 맞는 분주한 분위기이다.
가지런히 놓여있는 알록달록한 꽃모종, 나무 모종을 옮기고 있는 가게 사장님, 자동차 트렁크를 열어 놓고 여러 가지 나무 모종을 사시는 노부부, 화분 가게 앞에서 화분을 흥정하고 있는 중년의 여성과 젊은 청년.
갑자기 살아있는 기분이 느껴진다. 누군가 지치고 힘들면 시장에 가라고 했듯이 최근 들어 느껴지는 무기력증이 이곳에 오니 해소되는 기분이다.
생화가게로 들어서니 눈이 즐겁고 향기에 취한다. 꽃이 주는 기쁨과 위로가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느껴진다.
이번 봄에는 밥 말고 꽃
프리지어 다섯 단이 들어있는 한 묶음이 만칠천 원이다. 꽃값도 참 많이 올랐다. 직장인 한 끼 점심으로 생각하니 비싸나, 둘이 먹기에는 잘하면 될 것 같기도 한 금액이다.
직장에서 누군가의 좋은 날에는 꽃과 함께 축하도 해주었으니, 이번에도 누군가에게 주고 싶어졌다. 서로 꽃 주고받는 사이는 아니지만, 한 묶음 더 사서 맞벌이로 고생하는 동생에게 주었다.
여전히 이번 주도 쌀쌀하지만, 집에 들어가면 프리지어 향기가 진동한다. 헛헛함이 쓱 올라오면, 밥은 그냥 알아서 혼자 잘 먹고, 다음에는 노란 튤립 사러 꽃시장에 가야겠다.
덧, 가끔은 기대하지 않은 상대에게 꽃을 선물해 주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다 좋아한다는 것은 진리라고 말해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