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리스본으로 출장을 간다고 하니 6년전 소매치기 당했던 사건이 추억으로 떠오른다. 그 곳에 가면 조심해야 한다는 경계의 말보다는 내가 겪었던 에피소드를 정리해주는 것이 좋을 듯 싶었다. 때마침 2024년 하계 올림픽이 열리는 파리 지하철에서 소매치기들이 극성을 부렸던 것이 화제에 올라 잔소리에 그치지는 않을 것 같다.
2024년 하계 올림픽이 열렸던 파리 지하철의 소매치기
2018년 6월 리스본에서 묵었던 숙소는 필게이라 광장 옆의 호스텔이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유명 대도시의 광장 옆을 끼고 있는 숙소가 꼭 좋을 것은 없었다. 소매치기 일당들이 광장 벤치에 앉아서 노닐다가 숙소를 오가는 나를 며칠전부터 주시했을 것이다. 숙소 아래는 소박한 옷가게가 있었는데 가볍고 부드러운 양모 티셔츠를 현금으로 구입했었다. 다음날 현금을 소매치기 당했을 때 티셔츠 한장은 벌었네라며 쓴웃음을 짓기도 했다.
다양한 소매치기 수법에 정신 바짝 차려도 결국 잠간의 방심에 지갑을 잃어버려
유럽으로 여행 가기 전에 소매치기가 극성을 부리는 리스본과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를 경계했었다.
기본적으로 지하철 역에서 카드를 스캔하고 복제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해서 스캔방지용 크로스 백을 사서 대비했다. 그렇지 않으면 카드를 은박지에다 싸서 갖고 다니면 괜찮다고도 한다.
다양한 소매치기 방법도 조사해서 마음으로 도상훈련을 많이 했다.
* 번잡한 길을 걷거나, 백화점의 에스컬레이터를 오르고 내릴 때 조심할 것.
* 부부간의 한 사람은 나란히 걷지 말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걸으며 소매치기를 체크할 것(남미 대도시에서도 나를 따라다니는 수상한 청년들을 와이프가 넌지시 알려주기도 했다.)
* 소매치기 일행 중 한 사람이 시비를 살짝 걸거나, 잠간 부딪히면서 주의를 딴 데로 돌릴때 다른 한 사람이 그 틈에 소매치기를 하니 조심할 것.
* 심지어 나이든 할머니가 옷에 토마토 케찹같은 것을 뿌려서 정신을 흩트리게 한 다음 소매치기가 작업을 하니 조심할 것.
* 소매치기 일당에는 남녀노소 구별없으니 아이들도 믿지 말 것.
* 무엇보다도 배낭이나 여행 백은 가슴 앞으로 매서 안고 다닐 것.
* 등에다 매고 다니는 행위는 '내 지갑은 당신들 것이라고 선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도 몇번이고 다짐했다.
이론은 철저하였다. 하지만 여행이 중반으로 넘어가고 긴장이 느슨할 때 단 몇초의 방심으로 소매치기는 당하는 것이었다. 픽포켓맨은 틈새를 노리기 위해 나를 며칠 간이나 따라다니고 쫓아오기도 했을 것이다.
배낭을 내려놓는데 갑자기 기분이 쎄하니 좋지 않았다. 지퍼가 열려있었다.
그 날은 리스본에서 42km 떨어진, 유럽의 서쪽 끝이라고 부르는 호가곶(Caba de Roca)을 다녀올 예정이었다. 숙소에서 신트라역까지 가서 기차를 탄 다음에 다시 버스를 타고 호가곶을 가는 일정이었다. 신트라역까지 가기 위해서는 광장을 거쳐 오르막길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역전으로 가는 길에 지금도 기억하는 즐거운 화제꺼리를 가지고 와이프와 신나게 이야기하고 너털웃음을 짓기도 했다. 뒤에서 작업을 하는 리스본의 소매치기가 얼마나 고마웠을까.
리스본의 신트라 역에서 호가곶을 가는 안내도
15분 정도를 걸어 역에 도착해서 기차를 탔다. 좌석에 앉아 빨간 배낭을 벗어서 내려 놓는데 갑자기 기분이 쎄하니 좋지 않았다. 지퍼가 열려있었다. 배낭 안에는 크로스 가방이 들어있었는데 감쪽같이 사라졌다. 곧바로 역으로 나와 주위를 살펴 봤지만 소매치기 일당은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호가곶을 가려는 일정을 취소하고 다시 숙소로 돌아와 짐을 샅샅이 뒤져도 여행가방은 나오지 않았다. 소매치기 당했음을 확실히 확인했을 뿐이었다.
여행가방에는 여권, 600유로 정도의 현금, 내일 떠날 코임브라 예매표 2장, 신용카드 2~3장 정도가 있었다. 나머지 현금이나 체크카드는 별도로 보관하고 있어서 그나마 여행은 계속할 수 있는데 문제는 여권이었다. 당시 복대는 거추장스럽다고 와이프한테 우겨대서 착용하지 않았다. 대신 와이프의 성황에 못이겨 비상 현금은 속이 빈 여성용 둥근벨트에 비상용으로 돌돌 말아 집어넣었다. 여권, 기본 현금(달러 또는 유로), 카드는 복대에 넣어서 차야 했는데 오만과 방심이 이번의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무사히 가방을 되찾아서 코임브라의 여행도 계속 할 수 있었다. 헤리포터에 나오는 코임브라 대학생의 교복 망토.
택시를 타고 포르투갈 대사관에 도착하니 입구에 앉은 포르투갈의 중년 여성이 왜 왔는지 안다는 표정이었다. 민간인이 한국 대사관에 올 일은 여권분실 말고는 이유가 없을 것이다. 안으로 들어가니 초췌한 모습의 젊은 한국여성이 한명 와있었다. 역시 여권과 지갑을 분실했다고 한다. 대사관에서는 현금까지 완전히 도둑맞은 여행객들에게 필수여행자금을 대출해주는 제도가 있다. 그 여성은 대사관의 대출이자가 조금 높다고 생각해서 돈을 빌릴 것인가 고민 중이라고 했다.
대사관에는 포르투갈에서 태어난 한국인 2세의 젊은 직원이 임시 여행증명서 발급을 위해 사진을 촬영하라고 안내해주었다. 틈틈이 여기저기 전화하는 모습도 보여서 매우 바쁜가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우리한테 환한 목소리로 "지금 리스본 경찰서에 당신들의 가방이 보관되어 있다고 하니까 그쪽으로 가라"고 알려주었다. 소매치기가 내 크로스 백을 경찰서 근처에 버렸는데 누군가가 경찰에게 갖다 준 것 같았다. 사진을 찍다 말고 부리나케 경찰서로 달려갔다. 대사관 직원에게는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나중에 외무부 사이트에 칭찬하는 글도 올려주었다.
경찰서에는 나와 똑같은 처지에 있는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와있었다. 나는 새발의 피였다. 몇백만원 정도 되는 현금을 몽땅 소매치기 당한 인도의 중년부부는 망연자실하니 앉아있었다. 나는 번역기를 돌려서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니 서류에다 사건내용을 적고 사인해달라고 요청한다. 1시간 정도 기다리니 경찰이 크로스 백을 갖다 주었다. 가방 안을 살펴보니 여권, 신용카드를 비롯해 모든 것은 그대로 있고 현금만 없어졌다. 큰 다행이었다.
현금만 빼가고 경찰서에 여권, 예매표, 카드가 들은 가방을 돌려주니 오히려 고마운 마음이었다
소매치기에게 필요한 것은 현금이었다. 현금만 빼고 나머지 것은 경찰서나 본인에게 되돌려줌으로써 사건을 축소시켜서 사건도 흐지부지하게 만들 요량이었던 것이다. 파워가 있는 한국여권을 다른 조직책에게 팔아넘겨서 이득을 취하거나, 카드를 다른 곳에 사용하거나 복제하려는 욕심은 소매치기에게도 더 큰 위험으로 작용할 수 있음이다. 나 역시 현금 보다 더 중요한 여권을 되찾아은 것 만으로도 소매치기에게 감사하는 마음이었다. 절묘한 소매치기의 전략이었다.
슬프고 감미로운 파두와 기타 선율
그날 오후에 취소했던 호가곶을 가기 위해 다시 기차를 탔다. 다음날 부터도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이미 분실 신고를 했던 신용카드는 폐기처분하고 체크카드로 코임브라에 가서도 즐겁게 여행을 했다. 속이 비어있는 벨트에 담배처럼 돌돌 말아 집어넣은 유로화를 빼기 위해서 고생은 조금 했다. 100유로짜리 돈을 빼내기 위해 벨트를 힘껏 돌리자 쏙 빠진 지폐가 천장에 부딪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아 침대 밑까지 뒤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