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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SSTYPE Mar 29. 2018

제스타입 작업일지 #31

비가 그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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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그치고

젖은땅위로

새싹이돋고

꽃이피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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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 개월 동안 진행해온 비옴 타입페이스의 제작이 완료되었다.

2년에 가까운 그 기나긴 시간 동안 홀로 하나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처음 제작했던 서체. 지블랙 오리지날의 작업 기간과 네온사인. 그리고 멜트다운의 작업 기간을 생각하면 정말 길고도 험난했던 프로젝트라 할 수 있다. 기나긴 작업으로 많이 지쳤지만. 멈출 수는 없다. 아직도 후속 작업은 남아있으니. 누구를 탓하겠는가. 다 내가 벌인 일이고. 거뜬히 해낼 수 있을 거라 자신했던 일이다. 지금에 와서는 무모했다는 생각이 들지만. 어쨌든. 후속 작업을 진행하며 비가온다 서체제작 프로젝트의 후기를 작성하려 한다. 무슨 글을 써야 할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수많은 생각들이 머리 속에 엉킨 채 아직 정리되지 않았지만. 적어 내려가다 보면 아마도. 정리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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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이 지나 글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201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비가 오늘 어느 날이었다. 창 문 밖으로 맺혀있는 빗방울이. 흘러내린 그 흔적들이 문득 글자로 그려보면 어떨까 싶었다. 그래서 그리게 된 글자가 바로 [비가온다] 레터링. 


당시 나는 대학을 졸업 후 입사한 첫 직장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었다. 한국적인 그래픽과 한글 디자인을 주 업무로 유명 예술가의 작품을 상품화하거나 자체적으로 제품 디자인을 하는 등 여러 가지 업무를 담당했다. 직장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디자이너란 직업이 고작 이런 것인가. 박봉에. 야근에. 쏟아지는 업무. 이러려고 제주도를 떠나 대학을 졸업하고 디자이너로 취업한 것인가. 본가인 제주도를 떠나 홀로 자취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돈이 필요했고 그 월급 하나 때문에 나는 회사에 목을 맬 수밖에 없었다. 희외감을 느끼기도 여러 번. 자연스레 나는 나만의 작업을 찾기 시작했고 회사 업무와 별개로 개인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 또한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고민이 많았다. 누구 하나 알아주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내가 하고 싶은 디자인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스스로 찾아가는 과정이었으니 늦은 밤 퇴근하고 새벽이 깊어지도록 잠을 줄여가며 이런저런 잡다하고 의미 없는 작업들을 재미 삼아하고 있었다. 재미는 있었다. 그 외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어떻게든 스스로를 발전시키고 싶었다. 직장에서의 업무는 나 자신에게 생산적이기보다는 소모적인 일이었고. 스스로를 쥐어짜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쌓고 채워가는 것을 갈구했다. 그렇게 개인 작업을 이어가며 여러 가지 고민 속에 허우적거렸다.


어려서부터 서예과 문자도안을 배웠고 그 후 그래피티를 시작하게 되면서부터. 나의 어릴 적 꿈은 늘 그래피티 아티스트였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키워온 꿈이니 이에 대한 미래를 그려보기도 여러 번. 나는 그래피티와 가장 밀접한 분야라 할 수 있는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게 되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랄까. 내 생각과는 다르게 시각디자인학과에서는 그래피티를 할 수 없었다. 물론 기초조형부터 색상, 타이포그래피, 그래픽 디자인 등 도움이 되는 배움도 많았지만. 그래피티로 먹고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머리 속에 생겨난 뒤로 나는 그래피티가 아닌 그래픽 디자인을 선택했다. 졸업하고 나서 직장을 구했을 때. 그래픽 디자이너가 될 수 있었지만 이 또한 내 생각과는 많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업무와 개인 작업. 꾸준히 작업을 이어가며 나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다른 방향을 찾게 되었다. 레터링. 그리고 타입 디자인.


어려서부터 배워온 서예와 문자도안 그리고 그래피티와 대학에서 배운 타이포그래피. 그래픽 디자인 등이 하나로 연결되어 하나에 집중된다. 글자. 글자를 그리는 즐거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글자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때가 2013년. 내가 그린 글자들을 SNS와 다양한 플랫폼에 게시하기 시작했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노트폴리오. 핀터레스트. 빙글. 비핸즈. 텀블러. 포스트. 포스타입. 등 지금은 사라진 플랫폼도 여럿 있지만 당시 활용이 가능한 거의 모든 플랫폼에 작업을 게시했다. [비가온다]는 내 첫 전시작 중 하나이자 가장 많이 전시했던 작업이다. 개인 작업으로는 첫 인쇄물이기도 하고. 첫 판매작 이기도 하다. 2013년도 작업한 이 글자들을 2016년에 들어서 서체로 제작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2016년 1월. 지블랙 서체 제작 프로젝트가 마무리되어 갈 때쯤. 다음으로 어떤 서체를 제작할까 고민하다 [비가온다] 레터링을 서체로 만들면 어떨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피티의 영향인지. 타입디자인을 제대로 배우지 않아서 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서체를 제작할 때 가독성보다는 조형에 대한 부분을 더 비중 있게 다뤘다. 레터링에서는 이런 부분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지만 서체에서 가독성은 무엇보다 중요한 부분이 아닌가. [비가온다] 레터링은 형태가 재미있지만 가독성이 떨어진다. 서체로 제작하기 위해서 글자를 다듬어야 했다.


[비가온다] 레터링은 이전에도 여러 차례 다듬었는데. 전시를 할 때마다 조금씩 수정하여 2013년 처음 그리고서 2014년에 한 번 수정되었고. 2015년. 2016년. 2017년에도. 돌아보니 매해 수정되었다. 2014년 첫 전시는 그룹전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괜한 돈을 들여 무엇을 한 건가 싶지만. 당시 직장인으로 개인작업에 열을 올리던 나는 참여 제안에 덥석 뛰어들어 다섯 개의 작업을 전시했었다. [비가온다] 레터링이 너무 힘이 없는 것 같아 배경 질감이나 다양한 효과를 주어 다듬었었다. 2015년 말에는 그다음 해 [TYPE SCAPE 2016] 전시를 위해서 글자의 형태를 다듬었는데 억지스러운 이응의 형태와 글자 내 공간을 다듬었다. 2016년에는 첫 개인전을 위해 작업물의 전체적인 톤을 맞추고자 색감과 질감을 다듬었고. 2017년에는 [스티커 다이스키] 전시를 위해서 다시 한번 색감과 질감을 수정했다. 서체로 제작하기 위해 준비하기 시작한 것은 2016년 2월. 비가온다 프로토타입을 제작하여 무료 배포 후 사용자 반응을 살펴보았고. 그해 6월 텀블벅 크라우드 펀딩 프로젝트로 게시했다. 그 시간 동안 [비가온다] 작업은 레터링으로. 또 서체로 계속해서 발전시켜왔다. 


레터링이 아닌 서체로서의 [비가온다]는 우선 글자에 담긴 장식적인 요소들을 배제하고 가독성을 높이려 했다. 장식적인 글자의 형태를 통해서 비와 빗줄기를 표현한 것인데 이를 배제하고 나니 가독성은 더 좋을지 몰라도 주제가 사라져 버린 느낌이었다. 비가 온다. 비가 내린다. 비와 빗줄기를 글자에 담기 위해 글자의 폭을 줄여 수직선을 부각하였다. 지금에 와서 이 부분에 아쉬움이 남는 것은. 수직선을 강조하기 위해 글자의 폭을 줄여봐야 어차피 가로 쓰기 환경에서는 전체 지면에서 수직선보다는 수평선이 강조될 수밖에 없다. 조금 더 생각했더라면 가로 쓰기 서체가 아니라 세로 쓰기 서체가 더 주제와 잘 어울렸으리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짧았다. 그렇게 [비가온다] 레터링은 서체로 제작하기 위해서 기존 글자의 비례를 유지한 채 장체의 형태로 다시 그려지게 되었다. 레터링에서는 이응의 형태가 점으로 나타나지만 이 또한 가독성을 해칠 수 있기에 작은 원형으로 수정했다. 그렇게 [비가온다] 서체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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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글립스와 폰트랩이라는 툴을 사용하고 있지만 당시 나는 서체를 제작하는 툴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배운 적이 없어서 메뉴 하나. 툴 하나. 그 기능을 직접 눌러보고 확인해가며 사용법을 익혔다. 여러모로 번거롭고 불편하여 즐겨 다루는 일러스트레이터에서 글자를 그리고 벡터 아웃라인을 폰트랩에 옮기는 방식으로 서체를 제작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다 보니 프로토타입까지만 작업하고서. 폰트랩보다 인터페이스가 익숙한 글립스로 본 작업을 다시 시작했다. 지금도 레터링을 비롯한 대부분의 그래픽 디자인 작업은 일러스트레이터를 이용하지만 서체 제작을 위한 활자만큼은 글립스만으로 그리고 있다.


지난 20개월의 작업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 

이전에 제작한 지블랙 서체는 제목용으로 2,350자의 한글로 구성되어 있다. 쓰임에 따라 추가된 글자도 200여 자 정도 되고 기타 특수문자와 숫자, 라틴 알파벳 등을 더하면 글자 수는 더 늘어난다. 모든 한글을 다 그려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에 11,172자를 도전했다. 거기에 사용성을 높이고자 5가지 굵기로 구성하여 18개월의 장기 프로젝트로 시작하게 되었다. 이러한 장기 프로젝트도 처음이었고. 모든 한글을 다 그려내는 것도 처음이었다. 지블랙은 한 글자 한 글자를 따로 그려내는 완성형으로 제작했지만 비가온다 서체는 초성과 중성 그리고 종성을 따로 그려 조합하는 조합형으로 제작되었다. 이 또한 처음 접하는 작업 방식이라 우여곡절이 많았다. 보다 수월할 거라 생각했지만 예상치 못한 문제점도 많았고. 체계화되지 못한 조합 규칙은 늘어나는 벌 수를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벌 수란 하나의 초성이 가진 여러 가지 형태 혹은 구조나 공간에 따라 조합식의 경우의 수를 얘기하는데. 타자기로 타이핑하는 한글이 세벌식이고. 제품에 따라 다른 경우도 있지만. 세벌식 조합형 서체로는 안상수체가 대표적이다. 예를 들자면 'ㅁ' 하나만 하더라도. 미. 므. 믜. 밈. 믐. 믬. 매. 뫠. 맴. 뫰. 등 각 자모가 조합되는 방식에 따라 'ㅁ'의 형태와 공간이 달라지며. 이렇게 초성 'ㅁ'이 10가지로 나타날 때 초성 10벌이라 한다. 여기에 중성과 종성도 따로 벌 수를 합하여 비가온다 서체는 대략 24벌식 조합형 서체로 그려졌다. 작업 기간이 길어지며 애를 먹은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이 조합에 쓰이는 각각의 자모였는데.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잘 정리해서 작업을 진행해야 했지만. 하다 보니 늘고. 또 정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 하나를 수정할 때마다 여러 부분을 확인해야만 했다. 이 문제는 그릴 때뿐만 아니라 추후 검수와 수정 작업에서도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기획. 설계 단계에서 조금 더 치밀하게 짜두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미 작업이 진행되고 나니 도로 뒤엎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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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50-비]의 경우 이미 같은 굵기로 [비가온다 PT02]를 제작해두었기 때문에 작업은 수월했다. 여기서 PT02는 두 번째 프로토타입이라는 뜻인데. 첫 번째 프로토타입은 한글 2,350자만 담아 시험 제작하였고. 여기서 숫자와 라틴 알파벳 그리고 기본적인 문장부호를 더해 두 번째 프로토타입을 미리 제작해두었다. 첫 번째 프로토타입은 2016년 2월에 제작하고 무료로 배포하여 사용자 반응을 살펴보는데 쓰였고. 두 번째 프로토타입 역시 사용자 반응을 살피기 위한 목적이 있었지만 그보다 텀블벅 크라우드 펀딩에서 [비가온다 서체제작] 프로젝트를 홍보하기 위한 목적이 더 컸다. 처음 제작했던 지블랙 서체의 경우 약 300만 원의 후원금이 모인 것에 비해 [비가온다 서체제작] 프로젝트는 1,200만 원의 후원금을 모을 수 있었다. 물론 프로토타입의 무료 배포뿐만 아니라 지블랙과 다르게 다양한 굵기의 서체를 제공하는 등 사용성을 높인 부분도 도움이 되었다. 


프로토타입이라고는 하지만 판매를 목적으로 제작하는 서체를 무료로 배포하는 것에 대한 우려와 문제도 많다. 서체 사용권에 대한 라이선스를 무시한 채 불법적으로 악용될 가능성도 있고. 사용자들에게 서체는 무료라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글은 무료라 할 수도 있겠지만. 서체는 무료가 아니다. 현재 기업들이 제공하고 있는 무료서체 또한 완전히 무료인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기업의 홍보효과가 숨어있다. 그 외에 라이선스에 따라 비용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비가온다 PT02]의 경우 프로젝트의 홍보효과와 사용자들의 피드백을 대가로 배포한 셈이다. 효과는 충분했고. 다행히 악용되는 사례도 내가 알기로는 없었다. 사회 전반적으로 서체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서체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는 과정에서 저작권 및 디자인권 침해에 대한 일부 법무법인의 무분별한 고소로 말도 많았지만. 그러한 과정이 없었다면 지금까지도 유료 폰트 압축파일이 인터넷 상에 버젓이 돌아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상호 간의 잘못된 부분은 바로잡고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가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는가. 그게 옳은 방향 아닐까.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비가온다 PT02]와 [50-비]는 디테일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확연하다 쓰고는 잠시 고민했다. 일반 사용자가 보기에는 확연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차이가 있다. 프로토타입은 단시간에 빠르게 제작하여 전체적인 형태를 볼 수 있지만 하나하나 따로 다듬지는 않는다. 조합형 서체는 처음 제작하다 보니 몇 가지 테스트가 필요했다. 그 테스트의 결과물이 첫 번째 프로토타입인데 일러스트레이터에서 글자를 조형하고 벡터 아웃라인을 글립스로 옮겨 넣다 보니 1포인트 2포인트 정도 어긋난 부분들이 나중에 눈에 띄어 하나하나 다듬었다. 글자 획의 형태는 단조로워 크게 손을 대지 않아도 되지만 글자 내부 공간이 애매한 부분이었다. 벌 수가 적을수록 제작이 용이하나 공간이 어정쩡해진다. 조금 타이트하고 잘 짜인 내부 공간을 가진 글자를 좋아하는데. 조합식으로 제작하자니 공간을 하나하나 맞춰줄 수가 없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이 필요한데. 결국 어느 타협점도 성에 차지는 않는. 그런 상황에서 중성의 벌 수를 늘리기도 하고. 초성과 종성의 벌 수를 늘려보기도 했지만. 그렇게 작업하려면 차라리 완성형으로 하나하나 그려나가는 게 더 효율적일 것 같아서 이번 프로젝트는 조합형으로 진행하는 만큼. 결국 공간에 대한 부분은 일정 부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작업 초기에는 그러한 타협에 큰 고민이 없었다. 당장 눈에 들어오는 문제도 없었고. 나중에 생길 수 있는 문제는 나중에 해결하자는 생각에. 그저 빠르게 빠르게 작업을 진행했다. 처음 제작한 [50-비] 이후로 [10-안개비] 그리고 [30-가랑비]와 같이 더 얇은 굵기의 글자는 큰 무리 없이 그릴 수 있었다. 문제는 더 굵은 글자들. [70-작달비]와 [90-장대비]를 그릴 때 드러났다. 정해진 공간 안에 글자를 그리다 보면 획이 굵을 경우 글자의 내부 공간은 당연히 좁아지는데. 일부 글자는 획 사이에 여백이 없거나 공간의 균형이 맞지 않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조합형에서의 수정 작업은 해당 글자만을 수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에 해당하는 초성과 중성 그리고 종성을 같이 사용하는 모든 글자들. 그릴 때는 손쉽게 글자를 파생할 수 있고 간편하지만 수정 작업을 하다 보면 손이 참 많이 간다. 물론 해당 글자만 조합에서 분리시켜 수정할 수도 있다. 그럴 경우 단 한 글자 일지 모르지만. 전체와의 일관성이나 균일함이 깨져버린다. 전체 11,172자의 글자 안에 단 한 글자라면 별로 티도 나지 않을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어떠한 문장에서 어떻게 사용될지 모르기 때문에. 쉽게 넘어갈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어떠한 문장. 20글자로 이뤄진 문장 안에 해당 글자가 5번 사용된다면 어떨까. 그러한 예외적인 수정 작업이 여러 차례 반복된다면 그러한 가능성은 계속해서 높아지고. 전체적인 균일함은 점점 떨어지게 될 것이다. 


서체에서 완성도는 각 글자의 미려한 조형미보다는 전체적인 균일함이 더 우선이다. 물론 조형이 뛰어난 서체는 그 자체만으로도 굉장한 완성도를 보여줄 수 있지만. 디자인에 있어서 서체는 늘 주연보다는 조연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눈에 띄는 것보다는 거슬리지 않는 것이 더 사용하기가 좋다.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글자는 애초에 서체로 제작되기보다는 레터링으로 그려지는 편이 보다 효율적이다. 이런 부분 때문에 지블랙 네온사인과 멜트다운은 실패에 가까운 케이스다. 가독성이 떨어지고. 조형을 중시하여 글자의 표정이 너무 짙다. 어디에 넣어도 눈에 띄고. 잘 섞이지 않는. 이런 글자는 사용하기가 어렵다. 어쩌면 당연한 것을 좀 어려운 방법으로 알게 되었다. [비가온다]는 그에 비해 사용하기 수월한 편이지만 사실 그 단조로움이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조금 더 잘 그릴 수 있었다면 그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도 있지 않을까. 안삼열 선생님의 안삼열체나 이용제 선생님의 바람체처럼. 글자다운 멋을 가진 글자로 그려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글자를 얼마나 더 많이 그려봐야 할지 모르겠지만.


한글 서체는 한글만으로 만들 수 없다. 한글을 비롯하여 문장부호와 라틴 알파벳 그리고 숫자와 특수문자 등 여러 가지 요소로 구성되는데. 지금까지 레터링을 해오면서 한글만 그리다 보니 다른 부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특히 문장부호에 대한 이해가 얕았다는 것을 최근 [마이크로 타이포그래피 : 문장부호와 숫자]라는 책을 읽고 여실히 느꼈다.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에는 당연히 문장부호가 따라붙는다. 마침표와 쉼표. 따옴표 등 문장부호 없이 문자가 쓰일 수 있을까. 숫자와 라틴 알파벳 역시 지금의 나로서는 그저 기존에 있는 구조와 형태에 나의 조형을 살짝 입히는 정도에 불과하다. 어떻게 하면 더 잘 그릴 수 있을까. 내가 그리는 한글과 어울리도록 그리기 위해서는 다른 부분도 공부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그런 부분에 소홀했다는 것을 이번에 [비가온다] 서체를 제작하면서 많이 느끼게 되었다. 


[비가온다] 서체에는 모든 특수문자가 포함되지는 않았다. 작업을 진행하면서 모두 그려보고 싶었지만. 히라가나와 가타카나. 키릴 문자 등 빠진 부분들도 있다. 그리려면 그릴 수는 있지만 그릴 줄을 모른다. 그 외 특수문자 중 기호나  단위 등 쓰임을 모르는 것들도 빠져있다. 나로서는 많이 사용되는 혹은 내가 사용하는 것들을 우선적으로 포함시켰고. 내가 모르거나 혹은 잘 쓰이지 않는 기호들은 제외하였다. 잘 모르더라도 일단 그려 넣는 것이 맞을지. 아니면 괜히 넣었다가 잘못 사용되면 어떡하나. 싶은 고민에 결국 제외하게 되었는데 포함되어 있는 특수문자들도 걱정되는 부분이 적지 않다. 결국 잘 모르기 때문이다. 2015년부터 지금까지 4년 동안 서체 디자인을 하고 있지만 아직도 모르는 부분이 너무 많다. 한글이라도 잘 알았으면 하지만 하면 할수록 모르는 부분만 늘어간다. 


작업일지를 기록하며 이렇게 글을 쓰고 있지만. 나는 글을 잘 쓰지 못한다. 두서없는 것부터 마침표를 남발하는 것. 글을 읽는데 흐름이 있다면 그 흐름을 자꾸 끊어버리거나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파악하기가 힘든 글이다. 나 역시 글을 잘 쓰고 싶지만. 글을 쓰는 것보다 글자를 그리는 것에 매진해도 모자라니. 불편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중에 여유가 되면 작업일지를 잘 정리해보고 싶지만. 지금은 시간적 여유도. 금전적 여유도 없으니 욕심부리지 말고 할 일이나 똑바로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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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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