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ZESSTYPE Apr 16. 2018

제스타입 작업일지 #32

비가 그치고 .. 


#


처음 글자를 그리고 서체를 만들 때는 막힘이 없었다. 

4년을 그리다 보니 막막한 부분이 늘고 있다. 무지는 용기를 준다. 까불다가 나가떨어지더라도 덤벼볼 수는 있다. 아는 것이 늘어갈수록 내가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질 뿐이고. 차근차근 알아가는 수밖에 없다. 글자도 그리다 보면 점점 나아질 것이고. 글도 결국 쓰다 보면 점점 나아질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다시 글을 쓰고 있다.


-


지난 20개월 작업을 진행하며 얼마나 많은 벽을 마주하였는지 모르겠다. 

멋모르고 까분 대가가 고스란히 돌아온다. 결국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서체를 완성했지만. 무엇을 완성한 것일까. 이 정도의 완성도로 완성을 얘기할 수 있을까. 시간에 쫓겨 급급하게 마무리한 흔적이 남아있는 서체가. 어찌 보면 장난 같은 글자답지 않은 글자가. 어떠한 의미나 가치가 있을까. 지난 20개월의 시간과 노력이 헛된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에 자책한다. 더 잘할 수 있었을까. 긴 시간 동안 작업하며 때로는 게으르기도 했고. 때로는 부지런하기도 했다.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가짐을 내내 가지고 있었으니. 이게 내 최선의 결과다. 물론 다음에는 더 나은 결과물을 만들 수는 있겠지만. 작업 기간 내내 괴롭기도 했지만. 글자를 그리는 것은 즐겁다. 그래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진행할 수 있었다.


한글 11,172자. 다섯 가지 굵기의 자족. 라틴 알파벳과 숫자 그리고 문장부호와 특수문자. 글자의 내부 공간과 글자 간의 공간. 글줄의 공간. 초성과 중성과 종성의 균형. 획과 공간. 흑과 백의 균형. 어울림. 조화. 구조와 조형. 패스와 핸들. 여러 가지를 고려하여 63,895개의 문제에 대한 나의 해답을 [비가온다] 서체에 담았다. 물론 이게 정답은 아닐 것이고. 누군가는 더 나은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 스스로 더 나은 해답을 다시 내놓을 수도 있다. [비가온다] 서체에 대한 이 작업일지의 기록은 그 풀이일 수도 있고. 오답노트일 수도 있다. 무엇이 되었든 내게는 의미가 있고. 또 가치가 있다. 


-


작업 기간 중 알파벳을 그리면서 수많은 자료를 찾아보았다. 

처음에는 우습게 보았다. 몇 자 되지도 않으니 쉽게 작업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비가온다] 서체와 별개로 몇 가지 영문 서체를 제작해보았다. [GRAFIKA TYPE.1]부터 [GRAFIKA TYPE.4]까지 네 가지 형태로 달마다 하나씩 제작했다. 한글과는 다르게 알파벳에서는 글자 사이 공간 조절이 굉장히 중요했다. 글자와 글자 사이를 개별적으로 조절해주는 것을 커닝이라 하는데. 처음 제작한 TYPE.1은 커닝이 적용되지 않았다. 그 결과 글자와 글자 사이 공간이 어떠 부분은 붙어 보이고. 또 어떤 부분은 떨어져 보였다. 사실 커닝의 개념은 알고 있었지만 글립스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몰랐다. 알고 나면 정말 간단한 방법이지만. 알기까지의 과정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그 후로 제작한 영문 서체들은 커닝을 적용하여 제작했는데. 커닝을 하나하나 하면서 영문 서체로 쉬운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알파벳을 그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A-Z. a-z. 글자는 그리 많지 않으니까. 하지만 ABACADAEAFAG...AVAWAXAYAZ. 이렇게 한 글자 뒤에 모든 글자를 붙여 하나하나 커닝하다 보면 작업량이 수십 배로 늘어난다. 대문자와 소문자 그리고 숫자와 문장부호. 물론 모든 글자를 커닝하는 것보다 꼭 필요한 글자들. 예를 들어 AVA. ATA. AYA. LT. LV. 이런 경우만 따로 커닝을 해주는 것이 더 효율적이겠지만.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부분도 있는 법이니. 결국 전체를 커닝하여 제작했었다. 


[비가온다]의 라틴 알파벳 역시 커닝이 적용되어 있지만. 그 공간감이 조금 어설프다. 이 역시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더 그려보고. 더 배우는 수밖에 없다. 알파벳 그리기 뿐만 아니라. 한글과 알파벳을 어울리게. 숫자와 문장부호도 한글과 어울리게. 모든 요소가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그리려면. 역시 더 그려보는 수밖에. 책으로 배울 수 있는 부분은 한계가 있다. 결국 직접 그려보고 비교해보지 않으면 깨닫지 못한다. 천재라면. 읽기만 해도.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해보지 않으면 모르니. 해보는 수밖에. 


-


그동안 많은 고민이 있었고. 아직 답을 찾지 못한 수많은 물음들이 남아있다.

처음 레터링을 시작하며 이 글자들을 모아 조각모음 하듯 서체를 제작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될 리가 있나. 조각보처럼 이어 붙일 수 있는 게 아니다. 물론 그런 서체도 있긴 하지만. 쓰이지 않는 것을 보면. 그 방향은 아닌 것 같고. 활자를 그리고 서체를 제작하면서 내가 추구한 방향은 한글 서체의 다양화였다. 그동안 레터링을 하면서 나는 글자다운 글자를 그리기보다는 글자답지 않은 글자를 그려왔다. 가독성이 떨어지더라도 조형적 특징을 가진 글자들. 다양한 표정을 가진 글자들. 콘셉트에 맞는 영문 서체를 선택하듯 한글 서체 또한 다양해지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러한 방향을 추구했지만. 표정을 가진 글자는 다양한 디자인에 활용될 수 없다. 제한된 환경에서만 활용될 수 있는 서체를 제작해서는 판매하기 어렵다. 먹고 살기 어렵다. 결국 널리 사용될 수 있는 서체를 제작해야 한다. 이 방향과 너무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타협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결과가 [비가온다] 서체다.


지금도 꾸준히 글자를 그리며 레터링과 타입디자인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미지로서 조형에 무게를 둔 레터링과 텍스트로서 가독성에 무게를 둔 타입디자인. 가독성에 무게를 둔다고는 하지만 일반적인 본문용이 아닌 대부분 제목용의 조형이 가미된 글자지만. 왜 그런 이상한 글자만 그리느냐. 보다 글자다운 글자. 가치 있는 글자를 그리는 것이 좋지 않으냐. 묻는다면. 언젠가는 그리게 될 것이다. 지금은 어렵지만. 나중에 더 잘 그릴 수 있을 때 제대로 그려보고 싶다. 지금 당장 이러한 글자를 그리는 이유는 어려서부터 그래피티를 하면서 글자의 조형과 변형 그리고 표현에 집중해왔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래피티를 잘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피티 아티스트가 되었다가는 굶을 것 같아 그래픽 디자인을 선택했으니. 다만 내 디자인의 근본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나의 조형과 표현. 질감과 색감. 분위기나 스타일. 모든 것이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일종의 테크트리라 말하자면. 서예 - 문자도안 - 그래피티 - 타이포그래피 - 그래픽디자인 - 캘리그래피 - 레터링 - 타입디자인 순으로 10살 때부터 글자와 밀접한 길을 걸어왔다. 


글자만 그리는 것은 아니다. 

글자를 그리는 것이 즐겁고. 글을 쓰기도 하지만. 그림도 그리고. 그래픽 디자인 작업도 즐긴다. 앞서 얘기한 그래피티가 [글자]를 그린 [그림]이라면. 글자는 레터링과 타입 디자인으로 이어져 왔고. 그림은 그래픽 디자인 혹은 그래픽 아트웍으로 이어져 왔다. 그래픽 디자인이라기보다는 그래픽 아트웍에 가깝다.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릴뿐이니. 하고 싶은 작업은 많지만 그동안 [비가온다] 서체를 제작하느라 다른 작업을 진행할 여유가 없었다. 지금도 후속 작업을 하고 있어서 여유가 없지만. 다 마무리하고 나면 여유가 생길까. 시간적 여유가 생기더라도 금전적 여유가 없으면 결국 돈이 되지 않는 작업은 또 미뤄둘 수밖에 없으니. 언제쯤 여유가 생길지. 아무튼. 당장 하고 싶은 것은 많지만 결국 하나에 집중해야 한다. 여러 가지를 하다 보면 이도 저도 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니. 하나라도 잘하는 것이 낫다. 글자 좀 그린다고 우쭐댈 겨를이 없다. 한글타이포그라피학교에서 [글자 그리고 표현]이라는 한글 레터링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수강생들이 그린 글자를 볼 때마다 위기감을 느낀다. 어찌나 잘 그리는지. 내가 처음 레터링 할 때보다 훨씬 잘 그리고. 또 짧은 시간 동안 성장하는 것을 보면 금세 추월당할 것 같아서. 좋은 자극이 된다. 나태해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글자를 그려나갈 수 있도록 자극해준다. 딴짓하지 않도록. 한눈팔지 않도록.


-


막막하다. 이 글을 또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짧은 메모를 이어 붙여 글을 쓰다 보니 두서없고 산만하다. 생각해보면 이 프로젝트도 그랬다. 모든 글자를 그려 넣는 1차 완성까지는 순서대로 진행되었지만 그 후 수정 작업을 진행하면서부터는 눈에 보이는 대로 작업하다 보니 가뜩이나 글자들이 다 비슷해 보이는데 어디를 수정했는지 기억하기도 힘들 정도로 뒤죽박죽이었다. 그래서 더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2-3개월 정도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갑자기 18개월짜리 프로젝트를 하려니 계획한 대로 이끌어가기에는 변수나 문제가 너무나도 많았다. 그래도 한번 해봤으니 다음은 쉽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당분간은 장기 프로젝트는 손도 대지 않을 것이다. 이번 프로젝트로 아직 미숙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다음.

지블랙과 비가온다. 이어서 그릴 세 번째 서체. 어떤 글자를 그릴 것인가. 이전처럼 그래픽적인 글자를 그릴 지 아니면 조금은 글자다운 글자를 그릴 지. 그 둘을 절충하여 그릴 지. 글자야 어떻게든 그리겠지만 무엇을. 왜. 어떻게 그릴 지에 대한 고민이 조금 더 깊어졌다. 의미와 가치를 담고 싶어 졌다. 나만 좋은 글자가 아니라. 사용자도 좋고.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글자를 그려보고 싶다. 처음 서체를 제작하면서 3년 간 10개의 서체를 목표로 잡았다. 지블랙 오리지날, 네온사인, 멜트다운 3종과 비가온다 10-안개비, 30-가랑비, 50-비, 70-작달비, 90-장대비 5종. 그리고 검은고딕. 아직 하나가 남아있다. 올해 8월이면 만 3년이다. 어떤 글자로 목표를 달성할지.


1ST블랙 - 지블랙 오리지날 - 검은고딕. 이 세 가지 서체는 하나의 줄기로 연결되어 있다. 처음 심은 씨앗에서 열매를 맺었고 그 열매의 씨앗을 다시 심었다. 내가 지금까지 해온 모든 작업들을 하나의 큰 흐름. 큰 줄기로 만들고 싶다. 앞으로 하게 될 작업 역시 이러한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다.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작업이 아니라. 이전에 무엇이 있었고 어떻게 변화하여 작업이 이어지는지. 내 모든 작업이 끝나는 날. 한 그루의 나무로. 일생의 테크트리로 남기고 싶다. 비가온다 레터링에서 몇 차례 전시를 거쳐 서체로 제작하기까지의 작업. 그리고 이 서체에서 이어질 작업들. 또 다른 형태로 그려낼 서체들. 지금 당장은 미숙하더라도. 시간이 지나 정말 글자를 제대로 멋지게 그릴 수 있는 그때가 오면. 이 모든 작업과 기록이 그 의미와 가치를 찾게 되지 않을까.


목표를 정하고 꾸준히 나아간다. 1년 후. 3년 후. 5년 후. 10년 후. 20년 후. 2013년의 나는 다니던 직장을 퇴사하고 그런 목표와 여러 크고 작은 계획들을 세웠고 지금까지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꾸준히 나아가고 있다. 성공적으로 목표를 달성할 때도 있지만. 물론 실패할 때도 있다. 실패도 하나의 과정일 뿐 결과가 아니다. 실패를 딛고 또다시 해보면 조금 더 잘할 수 있고. 그렇게 하다 보면 결국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 다를 수도 있지만. 아무튼. 


...


큰일이다. 글이 도통 정리가 되지 않는다. 

후속 작업 중 포스터는 거의 마무리되었다. 이 글을 담게 될 책이 문제인데 어느 정도 분량이 적당할지. 내용을 어떻게 정리해서 담아야 할지. 그때그때 두서없이 기록해둔 글들이 머리 속에서 두서없이 맴돌고 있다. 빙빙 도는 느낌. 말로 꺼낸다면 왠지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고. 입은 열었는데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몰라 끝나지 않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은 계속하지만 해결책이 딱히 없어 일단 작업은 하고 있지만. 뭔가 나사가 하나. 아니 많이 풀어지고 빠진 듯하다. 서체를 완성하고서 과부하가 온 듯 멍하다. 손은 움직이는데 생각은 버벅거리고. 결국 긴 시간 타이핑한 글자들을 주욱 지워낸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나. 아아..


여기서 한번 더 끊고. 조금 더 고민해봐야겠다.


-


아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