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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SSTYPE May 07. 2018

폰트계독 #8

섞어짜기 - 활자공간

2018. 0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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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난 짧은 감상을 얘기하자면. 섞어짜기라는 개념은 무의식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딱히 의식하여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다보니 그렇게 되는. 한글과 어울리는 라틴 알파벳과 숫자를 찾게 되고. 글자의 굵기나 크기 등을 적당히. 그러다보니 이 책에 담긴 내용들이 굉장히 새롭게 보였다. 왜 자간을 좁게 썼었는 지. 장평이나 행간 등 늘 당연하게 생각했던 설정값들에 의문이 생겼다. 타이포그래피란 쉬운 것도. 당연한 것도. 우습게 볼 것은 더더욱 아니다. 내가 배웠던 타이포그래피는 극히 일부분. 그것도 정말 얕은 지식이었다. 편집디자인 또한 다르지 않다. 그래픽디자이너로 일하고 활동해오면서 그래픽 오브젝트만 중시하다보니 자연스래 멀어졌고.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부분이다. 글자를 그리면서 조판에 대해 생각을 해보기는 했지만. 말 그대로 생각만 해본 것이지 직접 조판하고 발생하는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애 쓴 적은 없었다. 글자를 그리는 그래픽 디자이너라는 소개글을 자주 사용했는데. 새삼 부끄럽다. 글자만 그릴 줄 알았지. 그 외에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으니. 글자만 그릴 줄 알아서는 훌륭한 타입 디자이너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지난 번 문장부호에 이어서.


한글 활자체를 제작하면서 라틴 알파벳이나 숫자는 형태적 유사성만 신경썼지 섞어짜기 좋게. 서로 잘 어울리게 그리려는 의식 자체가 없었다. 대충 비슷하게 그려서 빈칸을 채워넣었을 뿐이다. 다시 돌아보니 이걸 어떻게 섞어쓰라는 거냐. 라는 반문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이 책을 읽기 전. 최근에 그런 의식을 잠깐 한 적이 있었다. 지블랙의 골격과 조형을 바탕으로 다듬은 검은고딕을 그리면서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결국 해결하기보다는 라틴 알파벳 부분을 비워두었다. 그래서 현재 구글폰트에서 제공하고 있는 검은고딕에 라틴 알파벳은 빠져있다. 이전 같았다면 별 생각없이 그려 넣었을 것이다. 아니 작업시간이 충분했다면 그려 넣었을 것이다. 작업시간이 충분하지 않아 당시 한글만 그려넣었고 요청에 의해 숫자를 채워 넣었다. 하여 지금은 검은고딕에 어울리는 라틴 알파벳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단순히 형태만 쫓는 것이 아니라. 맥락에 맞게 그릴 수 있도록 여러 방향으로 고민하고 있다.


섞어짜기를 의식하기 시작하니 이전 작업들이 아쉬운 부분들이 눈에 들어온다. 당시에는 적당히 마음에 들었다. 적당히. 아마도 적당히 어울리게. 적당한 크기로. 적당하게 디자인했기 때문일 것이다. 잘 짜인 조판. 훌륭한 편집디자인 결과물을 보고나니 내 작업물들을 조악하기가 아주 흉물스럽게 보이기까지 한다. 나는 조악한 혼종을 양산하고 있었다. 요즘들어 책을 읽을 때마다 반성만 하게 된다. 책 한권에도 이렇게 많은 배움을 얻을 수 있는데. 그 비싼 등록금을 주고 대학에서는 무엇을 배운 것이며. 지금까지 디자인하면서는 뭘 배운 것인지. 잘못 배운 것들과. 생각 없이 타성에 젖어 해온 디자인들로 점철되어 있다. 나는 디자이너로서 지금까지 무엇을 이룩한 것일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금이라도 알았다는 것일까. 그만큼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된 것. 더 많은 것을 생각하고 고려할 수 있게 된 것. 그리고 앞으로는 더 좋은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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