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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SSTYPE Aug 03. 2018

폰트계독 #11

한글서체학연구 - 추사 김정희 언간의 서체미

2018. 0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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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다. 추사체 역시 그렇다. 하지만 추사체가 어떤 형태의 글자인지 알고 있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추사체와 추사 김정희의 언간은 다르다. 개인적으로 추사체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이 책에서는 추사체가 아닌 언간의 서체미를 얘기하고 있으니 언간에 나타나는 한글의 조형을 살펴보았다. 책에 담긴 언간으로는 부족하여 인터넷에서 추사 김정희의 언간을 찾아보았다. 


추사의 언간은 대부분 부인에게 쓴 사적인 편지로 한글의 형태가 정말 불친절하다. 한문과 다르게 한글은 심하게 흘려 썼는데 특히 종성 ㄹ은 어떻게 구분하여 이 책에 실은 것인지 신기할 정도다. 추사 김정희의 필체. 예술적인 가치를 지닌 추사체와는 다르다. 아무리 보아도 서체미나 조형미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 전체를 한 번에 살펴보면 그렇지만 또 하나하나 자세히 뜯어보면 그중에 멋진 글자를 발견할 수 있다. 


추사체든 언간에 나타나는 한글이든. 한 글자 한 글자의 형태보다 내 관심을 끈 부분은 따로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필체의 변화. 제주 유배 이전과 이후에 나타나는 추사체의 변화가 눈길을 끌었다. 후기의 필체를 보면 초기의 지렁이 지어가는 흘림이 오히려 급하게 흘려 쓴 것이 아니라 나름의 멋을 부린 필체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제주 유배 이후의 글자는 담백한 듯 때로는 거칠고 투박하면서도 유려하다. 곧은 대나무보다는 세월의 풍파를 거쳐 휘어질 대로 휘어진 노송이 떠오른다. 


추사 김정희가 말년에 남긴 언간이나 친필 서첩을 살펴보면 후기로 갈수록 한글과 한문의 형태와 분위기가 닮아간다. 나는 이 시기의 추사체를 가장 좋아한다. 한껏 멋 부린 그런 글자가 아니다. 슥슥 써 내려가면 그냥 그게 멋진 글자로 나타난다. 디지털 레터링에 익숙한 나로서는 붓으로 쓰인 추사체의 조형이나 서체미를 뭐라 설명하거나 분석하기도 힘들다. 균일하지도 않고 불안정하지만 멋있다. 가볍게 힘을 빼고 점을 찍고 선을 긋고 때로는 강하게 눌러서 때로는 가볍게 흘려서 그렇게 다음 글자로 또 다음 글자로. 서예가. 예술가. 이런 말보다는 장인이라는 말이 먼저 떠오른다. 추사체에는 평생에 걸친 변화가 먼저 눈에 들어오지만. 추사 김정희 그 말년의 기록에는 평생에 걸친 숨은 노력이 글자에 녹아있다. 


최근 길을 지나다 한 빌딩의 현판을 보고 글자의 조형이 마음에 들어 서체를 찾아보았다. 간판에 정말 많이 쓰이는 백송체를 찾았는데 문득 궁금해졌다. 이 글자는 궁체도 아닌 것이 고문헌에서도 본 적이 없는 글자였다. 하여 쭉 찾아보니 원곡 김기승 서예가를 알게 되었다. 원곡 김기승체. 그리고 이와 비슷하지만 다른 이름을 가진 여러 서체들도 발견할 수 있었다. 원곡 김기승의 작품들을 찾아 살펴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 글자 한 글자 균일하지 않고 불안정하지만 힘이 있고 멋스러운 글자의 형태. 추사체가 떠올랐다. 물론 글자의 형태는 다르다. 추사체는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다면 원곡체는 돌처럼 단단하고 꺾임이 멋스럽다. 형태는 다르지만 분위기랄까 느낌이랄까 비슷한 구석이 느껴졌다. 


원곡 김기승의 필체와 서체로 만들어진 원곡 김기승체 그 둘 사이에 차이를 보고 집자하여 서체를 제작하는 경우 그 특유의 분위기나 조형의 멋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서체를 보유하고 있지 않아 직접 대조해가며 비교하진 못했지만 인터넷에서 구할 수 있는 몇 가지 이미지로 글자를 비교해보니 내가 보기에도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차라리 서체로 제작한다면 필법과 필체를 기반으로 치밀한 조형 규칙을 세워 글자를 조형했다면 더 균일하고 안정감 있는 서체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추사의 언간에 나타나는 한글은 서체로 만들기에는 가독성이 너무 낮고 만들어도 그 유명한 추사체의 서체미를 제대로 보여줄 수가 없다. 하면 한글과 한문 모두에 나타나는 획의 형태나 꺾이고 흘리는 형태. 부리나 맺음 그리고 점의 형태 등을 모두 해체하여 현대 미감에 맞도록 글자를 새로 설계하면 되지 않을까. 자모의 형태는 최대한 기존의 형태와 유사하게 가져간다면 추사체로서 손색이 없는 멋진 글자가 될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로서는 엄두도 못 낼 작업이지만. 제주에서 나고 자란 나로서는 추사 김정희보다 추사적거지가 더 가까웠던 만큼 언젠가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작업을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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