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나의 친구 묘신화 보살님.
지난주 일요일부터 묘신화 보살님이 생각났다.
'오늘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아들과 주말을 보내면서도 묘신화 보살님이 생각이 났다.
다음날 월요일 아들을 아침 일찍 등원시키고 인천 동춘동 나사렛 병원으로 갔다.
왠지 모르게 오늘 안 가면 묘신화 보살님을 영영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나는 로컬푸드에 들러서 주황색 장미와 분홍색 백합 한송이가 하얀 소국과 함께 조합된 꽃다발 하나를 샀다.
묘신화 보살님이 꽃을 좋아하셨고 꽃을 보면 행복감을 느끼실 것 같았다.
병원에 생화 반입이 안된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보여드리고 가져오겠다는 마음으로 사가지고 갔다.
가는 길에 차가 많이 막혔다. 병원에 도착하여 묘신화 보살님이 입원해 있던 병실로 갔다.
그런데 병실에 묘신화 보살님의 이름이 없었다. 인포에 가서 여쭤보니 그런 환자는 없다고 하였다.
나는 싸한 기분이 들어서 바로 묘신화 보살님이 생업으로 운영하시던 삼계탕 집에 전화를 걸었다.
삼계탕 집 직원분이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지인인데요, 나사렛병원에 병문안 왔는데 안 계셔서요. 어찌 된 영문인가요?"
"부고 소식 못 들으셨어요? 대표님 돌아가셨어요."
"네? 돌아가셨다고요?"
"네. 오늘 새벽에 돌아가셨어요."
"아......"
내가 너무 늦게 찾아왔던 것이었다.
나는 꽃다발을 들고 다시 병원을 나왔다. 유난히 햇살이 따뜻한 정오였는데 바람결은 매서웠다.
인천 적십자 병원에 있는 장례식장으로 갔다.
내가 산 꽃다발은 너무 화려해서 차마 장례식장에 헌화로 들고 갈 수는 없었다.
묘신화 보살님의 두 아들과 며느리 두 분, 손주가 상복을 차려입고 나왔다.
내가 장례식장의 첫 손님이 되었다.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는 보살님의 영정 사진을 바라보았다.
결국 참았던 눈물이 났다.
어쩌면 보살님은 지금 그토록 편안하고 행복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빨개진 두 눈으로 육개장과 밥을 싹싹 긁어먹었다.
묘신화 보살님이 떠나는 길에 내게 베푸는 마지막 밥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밥을 먹으면서 첫째 며느님과 대화를 나눴다.
첫째 아들이 묘신화 보살님의 삼계탕 사업을 물려받아서 하고 있었고 며느님도 함께 사업을 돕고 있어서
안면이 있었다.
"어머님이 오늘 새벽에 갑자기 이렇게 되셔가지고 부고 문자도 이제 막 돌렸어요."
"그랬군요. 어제부터 보살님이 생각나서 오늘 안 가면 못 볼 것 같은 느낌이 들어가지고 왔는데......"
"어떻게 또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신기하네. 와줘서 고마워요. 어머니가 위기가 몇 번 있었는데 그래도 오래 버티셨어요. 복수가 차서 배가 이만큼 불렀었어요. 배에서 고름이 어마무시하게 나왔어요."
며느님은 자신의 핸드폰에서 며칠 전 영상을 보여주었다.
"이것 봐봐. 어머님이 이런 상태가 돼가지고 나중에는 아예 수액이 들어가지 않았다니까."
영상 속의 보살님은 산소호흡기를 끼고 있었고 손은 보랏빛이었고 손톱은 거의 검은색이었다.
"어머니 상태가 너무 심각해지셔서 가지고 요양병원으로 옮겼는데 오늘 새벽에 갑자기 돌아가신 거예요. 어머니께서 고통스러우시니까 나한테 쌍욕을 하고 막 그랬어요. 쌍욕 들으면서 어머니 수발해 드렸어요."
"고생 많으셨겠어요......"
묘신화 보살님은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 사시고 계셨기에 보호자라고는 아들 둘 뿐이었다.
두 아드님 모두 생업이 바빠서 전적으로 돌봐드릴 수 없는 형편이었다.
보살님은 췌장암 수술과 항암 이후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었고 약 3년 전부터 중국인 간병인을 두고 생활하셨다. 한 달에 약 250만 원의 간병인 임금을 주면서 생활하셨는데 말기 암이 되면서 급격히 상태가 악화되고 24시간 병원에서 간병해 줄 수 있는 간병인을 썼다고 했다.
며느님께서는 간병인 비용만 한 달에 450만 원씩 들어갔다고 했다.
'죽는 것도 싶지가 않은 일이구나.'
죽는 일이 사는 일보다 어쩌면 더 어려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묘신화 보살님은 연명치료를 거부하였지만 결국 병원 침대에 묶인 채 고통스러워하다가 삶을 마감하였다.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 되어 생전에 그 후덕하고 둥실둥실했던 인상이 사라져서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음식을 먹을 수도 없게 되었다. 뉴케어에 항생제를 타서 조금씩 나눠서 드시고 계셨다.
대소변을 가릴 수 없게 되었고 인지 장애도 왔다.
묘신화 보살님과 나는 서로 비슷한 시기에 암 수술을 하고 치병을 하면서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사이가 되었다.
나는 30대고 보살님은 60대였지만 우리는 서로 감정을 나누고 토닥이며 친구가 되었던 것이다.
나는 부모님과 남편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던 치병의 고민들을 털어놓기도 하고 슬프고 힘들었던 순간들을 묘신화 보살님께 나누기도 했다. 보살님도 투병하며 외롭고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털어놓았고 서로를 안아주고 위로하며 온기를 느꼈다.
그런 나의 소중한 친구가 떠난 것 같아서 많이 슬펐다.
모든 번뇌와 고통이 끊어진 그곳에서 영원히 평안하시기를 기도했다.
나는 나의 친구 묘신화 보살님처럼 말년을 병원에 묶인 채 죽음에 끌려가듯 삶을 마무리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미래에 닥칠 나의 존엄사에 대해서 현실적으로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해서 상상해 보고 생각해 보기로 했다. 상당수의 노인들이 묘신화 보살님처럼 비참하고 서글프게 죽음을 당하는 모습을 보았다.
나라고 예외가 있겠는가.
나는 정말이지 이렇게 죽고 싶지 않다.
말년에는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어려울 수 있다.
우리는 잘 사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사회를 살고 있는 것 같다.
젊고 건강할 때부터 잘 죽는 것에 대한 깊은 고찰이 없다면 십중팔구는 이렇게 죽음을 당하게 될게 뻔하다.
묘신화 보살님이 내게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샤론.너는 말년에 잘 죽어라. 나처럼 고생하지 말어."
"그럴께요. 나는 잘 죽고 싶어. 보살님도 너무 고생많았어요. 이제 푹 쉬어요. 잘 가요~!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