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엄마를 차단하고 싶었다.
나와 엄마 사이에는 서로 결코 이해할 수 없고 가까워질 수 없는 굉장히 견고한 벽이 있다.
유년 시절 엄마는 내가 쌓은 벽이 낮고 허술하다 것을 기가 막히게 알고 이 벽을 마구 넘어오기 일쑤였다.
나는 집안에 장녀였고 연년생으로 남동생이 있었다. 엄마는 늘 내게 이렇게 이야기하곤 했다.
"같은 배로 낳았는데 어쩜 이렇게 다를까?"
어린아이였던 나의 시선으로도 엄마는 나를 좀 키우기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그에 비해서 동생은 조금 수월한 것 같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엄마로부터 좀 까탈스럽고 예민한 아이라는 피드백을 자주 받았다.
남동생과 나는 확실히 기질이나 성향이 극과 극으로 달랐던 것 같다.
동생은 어릴 때부터 집중력이 좋다는 피드백을 받았고 대치동이나 목동같은 학군 지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인천 공립 인문계열 학교에서 전교 1,2등을 다퉜다. 그에 비해서 나는 집중력이 부족하고 공부 머리가 없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나는 스스로 내게 예술계통 쪽으로 다른 재능이 있다고 믿으며 일찍이 예술고로 진로를 찾아갔다.
동생은 늘 무난했고 엄마와 부딪히는 일이 없었지만 나는 정서적으로 많은 부분에서 엄마와 부딪쳤다.
초등학교 6학년 무렵부터 내게 사춘기가 격렬하게 찾아왔고 엄마와 고성을 지르며 갈등을 일으키곤 했다.
엄마는 나를 꺾으려고 하고 나는 엄마를 꺾으려고 하는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었다.
그 시절 나는 엄마의 잣대로는 질 나쁜 친구들이라는 평가를 받는 친구들과 친하게 지냈었다.
한 번은 엄마와 크게 싸우고 집을 가출한 적도 있었는데 엄마에게 뺨을 맞고 끌려들어 왔던 기억이 있다.
아무튼 엄마 또한 별난 딸의 양육에 진땀을 빼며 난해했던 것 같다. 엄마와 나는 서로 이해하지 못한 채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지나왔고 성인기가 되어서도 뭔가 근본적인 어려움은 미결된 채로 어떤 평범한 4인 가족의 형식을 유지했던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나는 대학에 가서도 늘 엄마와는 깊은 대화가 되지 않은 것 같은 어떤 목마름을 느꼈다. 엄마가 나를 사랑하고 헌신했다는 사실은 감사하면서도 뭔가 엄마와 깊이 상호작용되지 않는 그 알 수 없는 정서적 이물감이 있었다. 마치 콘택트렌즈를 거꾸로 껴서 자꾸 눈알에서 렌즈가 겉도는 그런 불편한 느낌이랄까?
그런데 엄마도 늘 나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엄마가 나를 바라보는 표정에는 "쟤는 왜 그럴까?"라는 물음표가 있었다.
나는 엄마가 원하는 대로 커주지 못한 딸이었던 것 같고 삶의 큰 결정이 있을 때마다 엄마를 따르지 않고 내 주관대로 했다. 대입과 결혼, 암치병에 있어서 그 모든 것들이 엄마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었던 것 같다.
엄마가 가장 내게 배신감을 느꼈던 것은 엄마가 반대하는 결혼을 결정하고 나이 차이가 나는 남편과 결혼한 일이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어온 결혼 생활이 꽤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남편과도 육아관에서 부딪치는 부분이 많이 있었고 나의 선택이 경솔했다는 생각을 한 적도 적지 않았다. 나는 결혼 생활을 통해서도 많은 것들을 배웠다. 선택에 책임을 지면서 살아갈 뿐이지 내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당시에 나는 엄마의 동의를 받고 축복을 받으면 정말 행복하겠지만 엄마가 우리를 반대한다면 가족들의 축복과 지원은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부모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다는 게 씁쓸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엄마의 쌍욕을 등뒤로 한채 결혼식을 생략하고 원룸에서 함께 살았고 혼인신고를 했다.
그리고 우리 사이에 아이가 생겼는데 아이를 낳으면서 불행 중 다행으로 우리 아이만 한 크기의 암을 발견하게 되었다. 엄마는 나의 임신 소식을 들은 이후 내게 온갖 모진 말을 뱉어냈다. 내게는 이모가 세명 있었는데 엄마는 이모들과 함께 하루에도 수차례씩 전화를 해서 아이를 지우게 하겠다고 협박했다. 엄마는 날마다 엉엉 울며 미친년! 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엄마 쓰러지는 꼴 보고 싶냐? 등등의 말들을 쏟아내며 분노와 한을 쏟아냈다. 내게 온 소중한 아이에게 이런 감정을 전해주고 싶지 않았지만 마음은 많이 슬펐다.
엄마와 인연을 끊고 싶다고 생각했다.
당시 나는 엄마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간간히 아빠와 전화 통화를 하며 안부를 주고받았다.
내가 임신 6개월 차에 접어들 무렵 엄마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나는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마치 내가 죄인이 된 것 같은 무거운 죄책감이 들면서도 왜 이런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건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엄마는 친구들과 래프팅을 하러 갔다가 뒷사람이 엄마 무릎으로 넘어지면서 무릎의 십자 인대가 파열돼서 입원했다고 했다. 나는 임신한 기간 동안에 엄마를 보지 않는 것이 태교와 일상에 안전한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가능하면 엄마와는 만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엄마가 병원에 입원했고 아빠와 동생, 이모들 모두 엄마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는데 병원도 안 오냐며 나를 질책했다. 나는 고민 끝에 부른 배로 엄마가 입원한 병원을 갔다.
엄마는 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리고 꺽꺽 소리를 내며 엉엉 울었다.
"엄마가 원하는 대로 못살아서 미안해."
나는 꺽꺽대는 엄마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소리 없이 나의 두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만 닦아내고 있었다.
'엄마. 우리는 서로 곁에 있을수록 해로운 것 같아.'
나는 속으로 이렇게 외치며 흐느끼고 있었다. 모녀라는 천륜의 인연으로 만났지만 멀어질수록 서로가 안전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엄마의 마음에 대못을 박고 그렇게 마이웨이를 갔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고 출산일이 다가왔다. 나는 조산원에서 무통 주사 없이 자연출산을 하기로 했는데 온전히 나와 남편과 태어날 아이가 함께 그 소중한 시간에 집중하길 바랐다.
혹시나 싶어서 남편에게는 엄마가 그곳에 오지 못하도록 신신당부를 했다. 그런데 남편은 엄마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조산원 주소를 알려주었고 출산 당일 진통을 겪고 있는데 엄마가 그 공간을 노크도 없이 갑자기 찾아와서는 곁에 있겠다고 했다.
나는 너무 화가 났다.
"제발 부탁인데, 엄마. 나가줘. 혼자 집중하고 싶어. 부탁이야."
"엄마가 안에는 들어가지 않고 여기 바깥에 있을게."
엄마는 고집을 꺾지 않고 조산원 거실 테이블에 앉아서 원장님과 대화를 나눴다.
진통 중에 엄마와 갈등을 벌이다가 엄마가 계속 곁에 있겠다고 버텼다. 나는 너무 불편해서 그냥 집으로 가겠다고 짐을 싸서 조산원을 나가겠다고 했고 그제서야 엄마는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조산원에서 무사히 우리 아이를 출산했고 내게 그렇게 분노와 한을 쏟아내던 엄마는 우리 아이를 안고는 너무 예쁘다며 처음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엄마에게 엄마 뜻대로 살아주지 못해서 미안한데 그냥 내 선택을 존중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표현했다. 엄마는 마지못해서 듣고 받아들이는 듯했다.
아이를 출산하고 났더니 왼쪽 옆구리에 손바닥 가득 잡히는 무언가가 있었다.
조산원 원장님과 선생님이 도대체 이게 뭐냐며 이상하다고 배 쪽과 자궁 쪽 초음파를 찍어보았지만 깨끗해서 별일이 아닐 거라고 여기며 며칠 뒤 조리원으로 옮겼다.
나는 조리원으로 옮긴 이후부터 열이 올랐고 새벽마다 깨서 소변을 보는 바람에 잠을 자지 못했다.
조리원 3일 차부터는 심각한 옆구리 통증으로 응급실 신세를 지게 되었다.
응급실에서 소변검사와 피검사, ct 촬영을 받았는데 응급실 의사 선생님께서 옆구리에 혹이 찍혔고
내일 외래 진료를 통해서 정확한 진료를 받아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내가 희귀 암 3기를 선고받을 줄은 전혀 몰랐다.
나는 응급실에서 처방해 준 항생제와 소염제를 받아서 다시 조리원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엄마와 함께 대학병원 비뇨기과로 외래 진료를 받으러 갔다.
퉁퉁 부은 몸으로 대기실에 앉아 있는 동안에도 나는 내가 암선고를 받으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못했을 만큼 천진난만했다.
탄생의 기쁨도 잠시 나는 암이라는 큰 슬픔을 마주해야 했다. 차분하고 이성적인 억양으로 말씀하시는 의사 선생님 앞에서 엄마도 나도 그저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엄마는 "우리 딸....... 어떡하니....... 어떡하면 좋니....... 어쩜 좋니......"라는 말만 되풀이하며 엉엉 울었다.
나는 "우리 아기...... 어떡하지....... 어떡하면 좋지....... 어쩜 좋지......"라는 말만 되풀이하며 엉엉 울었다.
조리원으로 돌아와서 아이를 보는 내내 계속 눈물이 났다. 그 어떤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조리원의 매니저님과 선생님들 모두 응급실 다녀온 후 나의 소식을 듣고 함께 슬퍼하고 눈물을 흘렸다.
2주간의 조리원 생활을 다 채우지도 못한 채 수술대에 올라가 개복수술을 했고 거대한 종양과 함께 우측 신장을 절제했다. 그 와중에도 나는 우리 아이를 제왕절개로 낳지 않고 자연출산하기를 정말 잘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위안을 삼았다. 우리 아이는 결국 엄마가 키워주셨다. 엄마는 아이는 걱정하지 말라고 엄마가 정성껏 돌볼 테니 수술 잘하고 돌아오라고 했다.
엄마 덕분에 나는 수술을 잘 받았고 생각보다 회복이 빨라서 5박 6일 만에 퇴원을 하고 아이 곁으로 돌아왔다. 아이는 일주일 사이에도 건강하게 커주었고 나는 복대를 차고 있는 상황이라 아이를 안거나 돌볼 수가 없었다. 그 이후에도 방사선 치료가 끝날 때까지 6개월간 엄마가 아이를 키워줬다.
그때 엄마와 나 사이에 우리 아이를 두고 대화를 가장 많이 나눴던 것 같다. 그때 비로소 나는 엄마와 '아이'라는 어떤 주제로 겹쳐지면서 공감했던 시간들이 생겼고 우리 사이에 있었던 그 견고한 벽에도 틈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그 작은 틈으로 비치는 엄마의 모습을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던 것 같다.
그렇게 우리 아이는 할머니의 손길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랐고 나도 방사선을 마치고 몸이 회복되는 대로 육아전선에 뛰어들며 좌충우돌 육아로 일상이 정신없이 돌아갔다.
엄마는 이제 귀엽고 예쁜 손주를 돌보거나 보러 온다는 명분으로 다시 예전처럼 나의 일상에 아무렇지 않게 들락날락했다. 유년시절 낮고 허술한 그 벽을 넘나들듯이 자유롭게 우리 사이의 그 보이지 않는 선을 넘나 들었다. 나는 나름 예의를 갖춰서 우회적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단호하게도 선을 긋기도 했지만 엄마는 그 어떤 나의 영역을 그냥 밀고 들어오곤 했다.
엄마와 내가 완전히 멀어지게 된 것은 폐전이 소견을 받은 이후부터가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연치유를 선택하고 결심한 이후부터 엄마와 나는 모녀라는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멀어서 서로 닿을 수 없는 어떤 관계임을 서로가 인지하고 사실로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나의 인생에 있어서 자연치유를 하겠다는 결정은 어쩌면 가장 결정하기 어렵고 중대한 선택이었던 게 아니었을까. 우리 부모님은 딸의 이 용감무쌍한 결정도 받아들이기 참 힘들었다. 이번에는 남편과 부모님 모두 한편이 되어 나의 결정을 반대했다.
나는 또다시 부모님과의 갈등 앞에서 괴로워했다. 나는 마치 캄캄한 우주에 촛불 하나 들고 혼자 서 있는 것 같았다. 수술을 하지 않고 자연치유의 길을 가겠다고 말하는 나를 바라보는 부모님의 눈빛은 폭풍 앞에 흔들리는 작은 촛불처럼 흔들렸다.
나 또한 처음 가보는 그 미지의 길이 막연하고 두려웠다. 누구보다 응원과 지지가 필요했다.
'엄마. 내게 할 수 있어.라는 말 한마디만 해주면 안 될까?'
안타깝게도 우리 부모님은 그런 말을 건낼 수 있는 용기는 없었다.
그렇게 나는 내가 내린 결정을 믿고 그 막연한 자연치유의 길을 걸어갔다.
나는 때때로 엄마에게 나의 불안과 슬픔을 꺼내보이고 싶었지만 엄마의 품은 내가 뻗을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나의 이런 대쪽 같고 외골수 같은 기질과 결정으로 인해서 우울증이 걸릴 것 같다고 했다.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서 골프를 치러 다니셨다고 했다. 당시 나는 울면서 혼자 맨발로 문수산을 타기 시작했는데 엄마의 카톡 프로필 사진에는 예쁜 골프복을 입고 필드에 나가서 골프를 치는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엄마는 우울함을 이렇게 푸는구나. 엄마는 행복한가 보다. 나는 많이 슬픈데. 나는 매일 혼자서 울면서 맨발로 산에 오는데.... 사실 나도 많이 무섭고 두려운데.......' 그 뒤로도 카톡 프로필 사진으로 엄마의 찬란한 골프 일상의 사진이 업데이트되었다. 나는 어느덧 혼자서 맨발로 산을 타는 일이 익숙해졌고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고 건강도 차차 회복되어 갔다.
사실 어쩌면 그때 나는 엄마가 가장 필요한 순간이었던 것 같다. 무조건적인 정서적 지지가 필요했던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엄마에게 엄마가 필요하다는 말을 할 수가 없고 엄마는 나를 응원한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2년의 세월이 속절없이 흘러갔다. 우리는 명절 때 잠깐 밥만 먹고 헤어지곤 했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인생에 각자 집중하며 서로 무심하게 지냈다. 정말 감사하게도 나는 2년의 치병 기간 동안 건강성이 매우 향상되었고 폐도 깨끗해졌다는 놀라운 성과를 얻게 되었다.
그런데 그 사이 틈이 벌어지고 헐거워진 폐교의 나무 바닥처럼 엄마와 나의 관계는 걸을 때마다 삐그덕 삐그덕거렸고 그 소음이 폐교안을 가득 채우며 기괴하게 울려 퍼지는듯했다.
우리는 그 이후에도 사소한 어떤 것에서 굉음을 내며 감정싸움으로 번지곤 했다.
엄마도 나도 서로의 마음에 스크래치를 내며 대화가 종결되거나 무마되었다.
엄마를 향한 언어에는 날이 서 있었다.
엄마도 마치 골프공 스윙하듯 민첩하고 날렵하게 날 선 언어를 내게 던졌다.
오늘 엄마를 카톡에서 차단했다.
엄마와 나는 서로 가까워질수록 해로웠다.
우리는 서로 멀어질수록 무해했다.
나는 엄마와 상관없는 인생을 살고 싶었는데
엄마가 항상 저 깊숙한 곳에 있었다.
엄마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린다.
"너는 애가 왜 그러니?"
"엄마만큼만 살아라."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힘들게 키워놨더니 싹수없게 엄마한테 하는 소리 좀 봐."
"네가 뭘 알아?"
엄마가 아니라 옆집이나 아랫집 사는 아줌마였다면 어땠을까.
왜 우리는 모녀라는 관계로 만나 것일까.
엄마를 차단하고 살아도 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엄마를 카톡에서 차단했다.
나는 나쁜 년. 엄마 마음에 대못을 박은 년. 그리고 카톡에서 엄마를 차단한 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