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러닝 May 12. 2024

해방감

게이트가 열렸다.

이방인으로 그들 세상 속으로 들어가려니, 신이 나면서도 긴장감이 살짝 감돈다.

코 끝에는 낯선 냄새와 함께 뜨끈한 공기가 폐를 천천히 채워 갔다.

정말 낯선 곳이었다.

풍경, 사람, 말투 심지어 차가운 대리석 바닥마저도 내가 익숙했던 것들과는 사뭇 달랐다.  

게이트 밖을 나오자마자 현지인들이 몰려들면서 외친다.


"택시, 택시"

특유의 인도영어 발음으로 반복되는 말들이 귓속을 파고든다.

그들은 공항에서 서로 픽업해서 데려가기 위해서, 손을 내민다. 낯선 곳에서 처음 만나는 택시기사들.

'굳이 저렇게 다투면서까지 다가오는 건, 바가지 씌우려는 게 아닐까'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일단 정신을 쏙 빼놓는 기사 무리가 부담스러워 모른채하고 서둘러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때쯤, 다른 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들과는 대조적으로, 먼가 느긋하고 편안한 목소리였다.


"헤이~  방금 도착한 거야?  나랑 같은 비행기 타고 왔네. 비행 어땠어?"

 커다란 기타 가방을 등에 메고, 기다란 금발에 형형색색으로 이루어진 패턴의 티셔츠, 펄럭이는 바지, 그리고 매끈한 신발? 아니, 맨발로 공항을 활보하면서 다가와 친근하게 인사를 건넸다.

특이한 복장과 말투로 긴장을 가볍게 날려버리는 재주가 있는 친구였다.

누가 봐도 이방인인 그였지만 긴장하고 있었던 나와는 너무 달랐다.


"좌석공간이 좁아서 조금 불편하긴 했는데, 괜찮았었어. 넌 어땠어?"

"나는 너무 편안하게 잘 왔는걸"

마치 같이 비행기를 타고 온 일행인 마냥, 말을 주고받았다. 그의 자유분방한 모습과 말투가 그것들을 당연한 것처럼 만들었다.


"어차피 시내로 나가야 하는데 같이 갈까?"

"나야 좋지~ 안 그래도 어떻게 가야 할지 고민 중이었거든"

그의 제안에 고민도 없이 수긍했다.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었으니깐. 택시비를 아낄 수 있고 든든한 친구가 생긴 것 같았으니깐.


친화력 만렙인 그 친구는 나와 이동하면서 앞에 가고 있는 커플 여행객에게 가서 같은 제안을 했다. 순식간에 한 팀이 만들어지고 시내로 가는 택시와 그 무리 속에 나를 맡겼다.





내가 도착한 곳은 '콜카타'로 인도 북동쪽에 있는 지역이었다. 내가 굳이 퇴사하고 이곳으로 온 이유는

10여 년 전에 읽은 류시화 작가의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이라는 책 한 권 덕분이었다.

그의 인도여행기에는 흥미진진한 사건들이 즐비하고 여유가 한껏 묻어나 있었다.  책 제목부터가 범상치 않았다. 인도 여행기 제목이니깐 '하늘 호수'란 인도를 뜻하는 말인지 데.


인도 여행 중 작가가 한 여관에서 있었던 일화이다.

어느 한적한 마을에 도착한 여행 가는 허름한 여관방에 가서 고단한 몸을 누이고자 했다. 그때 발견한 것이 '하늘 호수'였다. 자신의 방에서 하늘을 아주 선명하게 보았다. 예전 한국에 유행했었던 '하늘이 열리는 모텔'을 떠올렸을지도 모르지만, 인도식 숙소는 방 천장 자체가 하늘이었다. 작가는 뻥 뚫린 천장을 보면서 황당했었지만 이내 마음을 내려놓는 순간, 그것은 작가가 성찰할 수 있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고 '호수처럼 보이는 커다란 하늘을 누워서 볼 수 있는 귀한 숙소'라는 또 다른 깨달음을 안겨주었다.

깨달음을 주는 나라, 인도.

 깨달음 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가 일반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통념을 무너뜨리고 딱딱했던 생각을 몰랑몰랑하게 부드럽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되었다. 틀에 박혀서 바쁜 일상을 보냈던 나에게 여유를 가지고 나 자신을 온전히 찾으러 가기에는 인도가 딱이었다.




 콜카타의 도심지는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것 같으면서도, 나름 정감이 가고 다채로운 곳이었다. 안 그래도 처음보고 신기한 풍경으로 가득 차 있는데 노란 택시들이 도심지 곳곳을 누비며 활기를 불어넣는 것 같았다. 마치 커다란 스케치북에 노란 색깔의 붓으로 자유롭게 그려나간다고 할까.

 

 공항에서와 비슷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여행객으로 보이는 한 무리가 택시에서 내리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낯선 현지인들이 몰려들며 말을 건넸다.

"호텔, 호텔"

"여기는 내가 잘 알아, 괜찮은 숙소 알려줄게"

노련한 말솜씨와 제스처로 우리의 관심을 이끌어내는 현지인이 한 명 있었다.

금발의 '샘'은 잠깐 눈빛을 주고받고는 그를 지목했다. 그는 연신 미소를 띠며 숙소로 데려다주었다. 샘은 확실히 노련한 여행가인 듯 보였다. 안내인 아저씨가 데리고 간 숙소에 도착하자 꼼꼼하게 가격과 청결 상태 등을 살피고는 다음, 다음, 다음을 외쳤다. 한참 동안 여러 숙소를 둘러본 뒤에 나에게 어떤 곳이 마음에 드는지 물어봤다. 내가 보기에 괜찮았던 숙소 두 곳을 얘기했더니, 그는 그중 한 숙소도 자기가 마음에 든다며 다시 거기로 데려다 달라고 조금은 힘들어 보이는 안내인에게 마지막 임무를 주었다.


마침내 마음에 드는 숙소를 찾은 나는 샘에게 말했다.

"안내인에게 팁으로 얼마나 줘야 할까?"

"그럴 필요 없어"

 당연하게도 안내인에게 몇 푼이라도 쥐어져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의아해하고 있는 나에게 샘은 말했다.


"그는 숙소 주인에게 받는 팁으로 충분할 거야"

미소를 한가득 품고 작별인사를 하는 그를 보면서 알게 되었다. 그리고 샘은 미리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숙소를 이동하는 동안 다른 몇몇 여행객들을 우리 일행으로 끌어들여 숙소 투어에 동참하게 하였었다.


 우리가 묵게 된 여행자 숙소, 백패커는 나름 깔끔하고 조금은 어둡지만, 선풍기 팬으로 시원한 바람을 쐴 수 있는 가성비 좋은 숙소(도미토리)였다. 그래서인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여행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너무 배고파"

"어후, 이제 뭐라도 좀 먹으러 가자."

 하루종일 쫄쫄 굶은 탓에, 배정된 침대에 짐만 던져놓은 채 숙소 밖을 나왔다.

어느새 밖은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알록달록한 불빛 덕택에 시장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야시장인지 저녁에도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었다. 샘은 시장에 들어서기 직전, 작은 배낭에서 플랫슈즈 한 켤레를 발을 탁탁 털고는 신었다. 아무리 자유인이고 자유를 맨발로 느끼던 샘일지라도, 인도의 시장 바닥은 그에게도 몹시 어려운 난코스였음이 틀림없다. 인도를 다녀와 본 사람이라면 짐작하듯이 길거리에는 똥과 쓰레기들이 장애물처럼 곳곳에 깔려 있었는데, 시장은 일반 거리보다 더 심해서 바닥이 시커멓고 오물인지도 모를 것들로 젖어있었다.


'인도 음식? 맨손으로 밥을 어떻게 먹지, 왼손이었나, 오른손이었나?'

화장실에서 쓰는 손과 식사하는 손이 따로 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처음으로 손으로 음식을 먹으려니 걱정이 좀 되었다. 손님들이 제법 있는 모퉁이의 작은 식당에 들러 카레와 밥을 주문했다. 자주 먹던 오뚜기 카레와는 달랐지만 밥을 섞어 먹기에는 꽤 괜찮았다. 사실 배가 너무 고파서인지, 처음 먹는 인도 음식이라서 그런지, 어떤 맛이 났든 간에 이색적이라며 맛있게 먹었을 것 같다. 인도라고 해서 다들 맨손으로 밥을 먹는 건 아니었으며 식당에서는 여행자들이 자주 오는지 당연하듯이 숟가락을 내주어서 부담 없이 먹을 수 있었다.


굶주린 배를 채우고 신기한 것들이 즐비한 시장을 둘러보았다. 시장 골목골목을 누비는 동안 보지 못했었던 맥주를 파는 곳이 눈에 보였다.

"맥주?"

"맥주!"

우리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고는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스며들었다. 술집은 노란 불빛 아래 제법 널찍한 공간 안에 테이블은 몇 없어 보였다. 인도의 무더운 7월 어느 밤에 마시는 맥주는 온몸이 흡수하듯이 내 몸을 시원하게 적셔주었다. 술을 마시며 샘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눠볼수록 참 괜찮은 녀석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간단하게 샘을 소개하자면, 홀란드(네덜란드) 출신이고 아티스트로 싱어송라이터인 동시에 화가이기도 했다. 그는 세계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많은 것을 보길 원했고, 그가 가지고 있던 악기들을 팔아서 지금 여기로 왔다고 하였다.


"난 여행을 하면서, 해보고 싶은 게 생겼어!"

"그게 뭔데?"

"아티스트로 성공해서, 콘서트를 열고 그 수익으로 가단하고 힘겹게 사는 이이들을 돕고 싶어"

그는 그냥 막연하게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나름 구체적으로 그 꿈들을 들려주었다. 그의 신념과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잊고 있었던 나의 꿈들도 다시 꿈틀대었다.



 내가 보았던 첫 해외는 나의 머릿속 깊이 그 충격적이었던 장면들이 새겨져 있었다. 필리핀 마닐라의 시커먼 매연으로 물들어져 있는 시장 바닥에서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있던 엄마와 벌거벗은 아기. 어떠한 것들을 선택할 기회조차 없었던 아기는 무슨 죄가 있는 걸까, 그 아기가 자라면서 지푸라기 같은 기회라도 잡을 수는 있는 걸까. 그런 생각들이 스치며, 나도 샘과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벌써 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난 아무것도 구체적인 계획이나 신념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난 그저 너무나도 힘겨웠던 업무와 밤늦게까지 끝나지 않던 회식, 그리고 영원할 것 같았던 회사의 뜬금없던 부도로 인한 혼란과 두려움에, 나는 홀로 그곳을 빠져나와 여기서 자유를 찾고 있었다. 샘은 자유 이전에 내가 품어야 하는 마음을 느끼게 해 주었다.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시원하게 샤워를 한 뒤, 서로의 침대에 앉아서 이런저런 서로의 이야기를 들려다 주었다.

"아까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올 때, 작곡을 하나 했어?"

"작곡? 고작 20여분밖에 안 되는 시간에"

"한번 들려줄게, 어떤지 한번 들어봐"

그가 기타를 꺼내서 연주하기 시작하자 숙소에 머물던 여행가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막 시작한 애송이가 아닌, 노련한 연주가, 아티스트 샘이었다.

 

Took a flight, took a flight, took a flight in the end

But I don’t know, don’t know where to go

I’ve arrived here in Koko hotel.

Maybe I go to Delhi, maybe I go to see Taj-Mahal. or I go straight out to

Kashmir on Himalaya

Oh, but now I don’t know, Just I don’t know,

Took a flight, took a flight, took a flight in the end

but I don’t know where to go

don’t know where to go

매거진의 이전글 다시 태어나게 하는 인도여행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