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디딤돌 Jul 23. 2024

누구에게나 두려운 황혼기

  

(해 질 무렵의 하늘 풍경)


  황혼이란 어둡다는 뜻이다. 


  황혼의 의미는 쇠퇴하여 끝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인생의 말년에 다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많은 얘기를 한다. 생의 마지막 무렵을 만산홍엽(滿山紅葉)의 절정 시기 또는 늦가을 국화의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비유한다. 심지어 인생 삼모작의 시작점이라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이런 말들이 황혼을 눈앞에 둔 당사자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궁금하다.


  어떤 이들에게는 황혼의 시기가 진정으로 아름다운 시간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런 행운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건 아니다.  운을 누리기 위해서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경제적 여유가 밑바침 되어야 한다. 더욱이 건강은 말할 나위조차 없다. 현실의 삶 속에서는 황혼기 노인들의 암울한 소식을 끊임없이 전한다. 고독사, 자살, 황혼 이혼, 황혼 육아 독박, 만성 질환 등 안타까운 사연뿐이다.


  백세 시대, 나이는 숫자일 뿐, 인간은 계속 성장할 수 있다고 강조하는 문구 등은 잠시 우리를 홀 깃 하게 한다. 하지만 그러한 외침들은 지극히 영업 목적에 기반한 것임을 바로 알 수 있다. 수명을 우리의 의지와 노력으로 조절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현실은 능력에 따른 빈부 격차가 심하다. 개개인마다 타고나는 건강의 정도도 다르다. 유감이지만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노후가 보장될 수 없다. 


  황혼의 의미를 밝은 이미지로 받아들이려는 노력은 나쁠 게 없다. 문제는 "그렇지"하면서 끄덕인다 한 들, 해탈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우리의 마음은 수시로 바뀌게 마련이다. 돌아서면 또다시 불안하고 두려운 데 이를 어쩌랴! 책을 읽고, 강연 듣고, 해당 전문가와 상담을 통해 두려움을 해소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두려움이 쉽게 극복되는 것이라면 '황혼기의 두려움'이란 말 자체가 화두로 떠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두려운 감정이 올라오면 애써 피하지 말고 차라리 받아들이면 어떨까?


  그래야 자신만의 해결책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삶의 마지막 시기가 왜 두려운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불분명한 사후세계가 두려운 건지, 생의 단추가 잘못 꿰어져 고독사 후 뒤처리가 염려스러워 두려운지, 남긴 재산의 분배와 식솔들에 대한 걱정 등으로 두려운지, 노력했지만 남만큼 누리지 못하고 가는 게 억울해서 괴로운지 등 이유가 많을 것이다. 연유를 알았으면 그에 맞는 처방을 해야 할 것이다.


  두려움 중 가장 일반적인 사유는, 알 수 없는 곳으로 떠나는 '소멸 자체'에 대한 공포일 것이라고 나는 짐작한다. 이는 어느 누구도 비켜 갈 수 없는 괴로움이다. 이 행성의 생명체라면 숙명인 셈이다. ‘제아무리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가 남다르다 해도 내심은 두려울 것이다.’  일부는 “정작 죽음은 아주 평안한 상태”라는 말을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길은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황혼이 두렵다 해도 완화를 시키려는 노력은 반드시 필요해 보인다. 


  노화에 대해 긍정적인 인식을 갖게 되면  막연한 두려움을 상당 부분 줄일 수 있다고 한다. 나를 특별한 존재보다는 자연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자세다. 자연은 계속 순환하는 곳임을 상기하면 도움이 될 것 같다. 나에게 정해진 몫의 바닥이 드러나면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생자필멸"의 이치를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자세가 황혼의 두려움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묘약일지 모른다.


  인생 말년에는 욕심 대신 덜어내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고 업만 남는다"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베푸는 삶이 중요하다고 한다. 누군가에게 나의 베풂이 큰 도움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은 커다란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욕심껏 쌓기만 하다가  의미 있게 사용하지 못하고 결국 빈손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자각하게 되면 황혼기가 더욱 힘들어질 수 있다. 


  먼저 경험한 이들의 지혜에 기반한 가르침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철학이 상대적으로 건전하게 정립되어 있을 것이다. "염라대왕이 보낸 저승사자를 길동무로 여길 정도의 내공"이 쌓이려면, 지속적인 사유와 성찰이 필요해 보인다. 이를 통해 쌓인 깨달음이야말로 마지막 앞에서 당당함을 유지하게 하는 유일한 힘이 아닐까 한다. 노력여하에 따라 꿀 같은 마지막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작가의 이전글 내가 나이가 들었음이 분명한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