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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옹졸 Jun 05. 2024

6월, 내장과 수박

어린이날 아침. 은하한테 문자가 왔다. '집으로 와. 아무도 없어.' 과자 두 개 를 챙겼다. 열린 현관으로 인기척 안 하고 들어갔다. 옥이도 와 있다. 다들 시 무룩해 인사 한마디가 없다. 좋은 대학 가자고 의기투합했는데 반년도 안 돼  사그라들었다. 공부가 힘들다. 티브이를 켜고 과자를 텄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린다. 볼 만한 게 없다. 옥이가 입을 열어 다음 달 모의고사를 걱정하고 짝 사랑을 끝낼지 말지 의견을 물었다. 심드렁히 아무 소리 안 하던 은하가 방바 닥을 두드린다. "야야, 저것 좀 봐." 화면 오른쪽 위에 '한국의 명산, 내장산'이 라고 써 있다. 내장? 이름에서 냄새가 난다. 계절 따라 달라지는 산을 보여 준 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되니 초록이 시커멓다.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계 곡에 발을 담근다.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옆에 수박과 참외가 있다. 그리고  가을, 겨울이 되었다. "우리 가자! 저기서 수박 먹을래. 그러면 공부 잘 될 것  같아." 뜬금없는 선포에 어리둥절했지만 눈이 반짝이고 가슴은 뛰었다. 은하가  브리핑한다. 날은 6월 5일과 6일. 오늘부터 용돈을 한 푼도 쓰지 말 것. 분식 집 금지. 외박 허락을 위해 몸을 사릴 것. 



 5월은 공부만 했다. 아니 그러는 척했다. 떡볶이와 순대를 한 번도 안 먹고,  동전 노래방도 안 갔다. 얼마나 연기를 잘했던지 몸 챙겨 가며 공부하란 소릴  들었다. 모두 어렵지 않게 밖에서 자는 걸 허락받았다. 어른들은 독서실에서  자는 줄 안다. 6월 5일. 학원을 결석하고 역으로 먼저 가 표를 끊었다. 옥이와  은하는 1교시만 듣고 조퇴했다. 제사와 배탈이라는 사유를 댔다. 선생님이 집 으로 전화하는 최악의 일은 운명에 맡기기로. 일곱 시. 목포역 화장실에 모였 다. 사복으로 갈아입었다. 기차에 올랐다. 이제야 숨을 크게 쉰다. 은하가 가방 에서 달걀을 꺼낸다. 사이다 없이 건배했다. 



정읍역에 내렸다. 목포랑 느낌이 다르다. 비릿한 바다 냄새도 없고 역 광장과  주변이 차분하다. 편의점에서 먹을 걸 사고 주변 돌며 잘 곳을 탐색했다. 건물 이 깔끔하고 이름도 단정한 '청운장'으로 정했다. 은하가 앞장선다. 유리문을  여니 곱게 단장한 할머니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방 하나 주세요." 우릴 위,  아래로 훑어보고는 어디서 왔냔다. 내장산에 가려고 목포에서 왔다고 공손히  말했다. 학생이냐고 묻는다. 일어서더니 카운터를 나와 우리에게 왔다. "가방  좀 보자." 메고 있던 걸 내려 지퍼를 열었다. 세 개를 꼼꼼하게 살핀다. "술 없 지?" 202호 열쇠를 건넨다. 계단을 올라 우리 방 문을 열었다. 소리를 지르며  박수를 치고 얼싸안았다. 고생한 한 달을 추억하며. 옥이는 울먹이며 18년 산  날 중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다. 1초도 쉬지 않고 수다를 떨며 과자를 먹었다.  기운이 달려 졸음이 쏟아지는데 노크 소리가 났다. 말과 웃음을 멈췄다. 주먹 으로 쾅쾅 친다. "누구, 세요?" "학생, 문 열어 봐." 아, 할머니. 방으로 성큼성 큼 걸어 들어오더니 화장실 문을 열어젖힌다. 농도 활짝 연다. "남자는 없고만.  그려, 어여 자드라고." 




일어나니 아홉 시가 넘었다. 씻고 짐을 챙겨 나갔다. 열쇠를 반납하고 할머니 께 인사드렸다. 내장산 가는 버스 시간표가 적힌 쪽지를 주신다. 아침 먹을 백 반집도 알려 준다. 밥을 먹고 마트를 찾아 수박을 샀다. 버스가 온다. 셋이 맨 뒷자리에 앉았다.  은하가 수박을 꼭 안는다. 엄마 같다. 한 시간쯤 달렸다. 기사님이 내리란다.  그런데 산이 아니고 식당만 즐비하다. 내장산에 오면 바로 계곡이 있는 줄 알 았는데. 수박을 받아 안았다. 좀 걷다, 옥이한테 주었다. 그렇게 번갈아 들었 다. 6월 볕에 눈이 부시고 정수리가 뜨겁다. 그래도 시원한 물을 만날 생각에  숲으로 계속 걸었다. 그런데 안 나온다. 작은 골짜기도 말라있다. 지나가는 아 저씨를 붙잡고 어디로 가야 계곡이냐고 물었다. 요새 가뭄인 줄도 모르냐며 혀 를 찬다. 



수박이 더 무겁다. 땅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내가 말했다. "그냥 집에 가자."  옥이는 "수박은?"이라고 묻는다. 은하가 "목포 가서 먹자."라고 한다. 다시 안고  일어섰다. 이놈의 것이 징그럽다. 은하는 저만치 앞서 가고, 옥이와 뒤처졌다.  눈치를 살피더니 손가락으로 숲을 가리킨다. 울창하다. 눈을 크게 뜨고 입모양 으로 말한다. '버리자.' 대번에 알아들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힘껏 던졌 다. 수박이 따라올 것 같아 무서워 소리를 지르며 내달렸다. 은하가 멈춰 뒤돈 다. 빈손인 걸 보고 눈을 째린다. "잔인한 년들." 


어깨동무하고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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