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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옹졸 Jun 24. 2024

살아 돌아온 새끼

괜찮아


중학생 아들은 대학 다니는 형이 집에 오는 날을 기다린다. 목요일부터 형 언제 오냐고 계속 묻는다. 직접 연락해 보라고 하면 그건 싫단다. 작년만 해도 둘이 말 한마디를 안 해, 우애 없는 것을 걱정했는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요샌 죽고 못산다. 큰아이에게 카톡했다. '언제 와? 지명이 눈 빠져. 빨리 와.' 전화 오는 진동이 울린다. "엄마." 죽어 가는 목소리다. "나 좀 데리러 올 수 있어요?"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어젯밤 술을 많이 퍼마셔 한발짝도 움직일 수 없이 힘들단다. 갈 마음도 없지만 마침 차도 없다. 올라오는 화를 진정하고 천천히 와 보라고 말했다.



세 시간 뒤 카톡이 왔다. '나 택시에서 토했어요.' 차 시트에 했을까 봐 걱정했는데 가방에 쏟았다고. '이 가방 살릴 수 있을까?' 변기에 오물 버리고 세탁기에 돌리면 괜찮을 것 같다고 말했다. '엄마 다른 건 안 나오고 물 같은 것만 나와서 휴지로 닦았어요.' 잘났다, 그래. '죽고 싶다. 어쩌지?' 술 먹고 차에서 토한 일이 저도 충격인가 보다. 냉장고에 오줌 싸는 사람도 있다고 답장을 보냈다. '그럼, 나 정돈 양반이네.'라고 한다. 너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충격을 주려고 한 말인데 아들은 위안으로 받아들였다. '그래, 그러니 힘내서 살려무나.'라고 했다. '네.'라고 대답한다.



자식을 키우며 바랐던, 그래서 애를 썼던 일이 보기 좋게 실패해 체면이 영 무색하다. '목사 아들이...' 뒤에 오는 비난을 듣게 될까 봐 두려웠다. 공부 잘하기를 바랐던 적은 없다. 아, 있었구나. 금방 포기했다. 예수님을 믿어 바르게 예배하고 방탕에 빠지지 않기를 바랐다. 이게 교회에서 두드러지게 눈에 띄니까. 때론 지독하게 외로운데 많은 보는 눈에 시달려야 하는 목회자의 숙명 같은 게 있다. '본', '덕'이 돼야 한다는 강박과 괜한 입방아에 오르내릴까 노심초사하는 중에 잘 키웠다는 잘난 척은 하고 싶었다. 믿는 사람들이 써 놓은 자녀 양육서를 많이 읽고 교회에서 자라는 아이들과 그 부모들도 유심히 살폈다. 너무 닦달하며 조여도, 그렇다고 한 없이 풀어 줘도 안 되는. 그 적당한 선을 잘 넘나 들어야 했다. 이 일에 많은 걸 쳤는데.


아들은 대학생이 되자마자 술을 마셨다. "엄마, 술술 들어가." 아주 해맑게 말을 늘어놓았다. 술 먹으면 안 된다고 엄포를 놓은 적은 없다. 그건 성경적이 않으니까. 결국 하나님과 자기의 문제다. "지성아, 혹시 하나님 생각은 안 났어?" "아니, 전혀." 신앙인으로 아무 고민이 없었다는 건 조금 실망이다.




현관으로 들어오는 아들 얼굴빛이 까맣다. "엄마." 하며 어린양을 한다. 그러면서 팔을 걷어 내민다. 빨긋한 반점이 양팔에 한 가득이다. "에이즈?" 영화에서 본 환자 피부랑 똑같다. 막 웃는다. "엄마, 나 종강 모임에서 소주를 세 병이나 마셨거든. 죽겠더라고. 기숙사가 저 앞에 보이는데 도저히 못 걷겠는 거야. 그래서 잠깐 쉬려고 벤치 앉았는데 그대로 잠들어 버렸어요. 새벽 다섯 시에 어떤 분이 깨워서 일어났다니까. 아니 그 시간에 산책하는 사람이 있대. 벌레가 이렇게 많이 물었어." 술 먹고 자다 퍽치기당한 사람, 입 돌아간 사람, 죽은 사람. 또는 인신매매. 살면서 들은 갖가지 뉴스가 떠올랐다. 무사히 돌아와 감격스러웠다. '아, 당신이 살려주셨군요. 감사합니다.'


"엄마, 내가 이렇게 사니까 속상하죠?" "아니, 생각보다 괜찮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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