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두 시 반. 다이소에서 산 손바닥 만한 알람 시계가 끔찍한 소리를 냈다. 새벽 예배 설교 준비 때문에 이 시간에 일어나는 남편. 그닥 바빠 보이지도 않더만 훤한 낮에 뭐 하고 이 시간에 일어나서 공부를 하는지. 차례로 소변을 보고 왔다. 나가서 더 잘까 했는데 내일 할 일이 별로 없어서 잠을 안 자도 될 것 같다. 놀아야지. 토요일은 바쁜 날이다. 새벽 예배 후 순장, 총무 모임이 있고 끝나면 바로 엄마를 목포대에 모셔다 드려야 한다. 중창단 연습도 있다. 카페에 올릴 글도 써야 하고, 지언이를 국악단에 데려다주고 데려 오고 해야 한다.
새벽 예배와 순장 총무 모임만 빼고 모든 게 취소되었다. 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다니 , 감격스럽다. 물론 기본적인 주부의 소임은 있지만. 남편 공부하는 옆에 나도 배를 깔고 누웠다. <골드문드와 나르치스>를 가지고. 헤르만 헤세. 이제 보니 이름이 겁나 멋있군. '골드문드'가 처음엔 사랑스러웠는데 갈수록 그의 방랑과 예술을 이해하기 어렵다. 사랑에 목마른 섹스중독자가 아닌지. 더 읽어야 한다. 끝엔 어떻게 그를 정의하게 될지. 책을 덮고 거실로 나가 티브이를 켰다. 요즘 '삼시세끼'가 시작해서 좋다. 유해진 팬이라 그렇다. 김혜수와 결혼하길 바랐는데. 언제적 얘긴가. 방앗간 작은 엄마가 유해진이 훨씬 아깝다면 노발대발 하셨던 기억이 난다. 방해를 받지 않고 온전히 티브이를 차지하고 있으니 좋기도 한데 어째 우리 집이 아닌 것 같다. 화덕에서 치솟는 불을 보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꿈에 임영웅과 차승원이 제육볶음을 들고 우리 집에 왔다.
남편이 나를 부르는 소리에 깼다. 먼저 갈 테니 천천히 오란다. 아, 새벽예배.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아까 쌌는데도 소변이 또 마렵다. 새벽 공기가 차다. 예배 시간 2분을 남기고 도착했다. 이내 내 남편 송 목사가 강단에 섰고 찬송가 383장을 부르자고 했다. 말씀은 열왕기하 14장이다. 짧은 말씀이 끝나고 기도했다. 요즘 왜 이렇게 눈만 감으면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 예수를 주인으로 삼아도 삶은 늘 불안해 두렵다. 하나님을 믿는 일이 이다지도 어렵다는 걸 한탄하며 긍휼을 베푸어 주시길 기도했다.
기도를 조금만 하고 식당으로 내려갔다. 마지막 주 토요일 새벽 예배 후에 순장, 총무 모임이 있다. 각 구역에 대표들이라 할 수 있다. 내가 맡은 순은 유령 같은 순이다. 있으면서도 없다. 믿음이 단단하지 않은 신혼부부가 모였는데 단톡방은 있으나 나 혼자 떠들고 순원들은 대답이 없다. 가끔 개인 톡으로 안부를 묻고 예배 때 보면 가볍게 눈인사만 한다. 나도 번죽이 없고 그쪽도 마차가지라서. 주일 말씀을 정리 요약해서 단톡방에 올리는데 누구 하나 읽는지 어쩌는지 모르겠다. 뭐, 아무래도 상관은 없다. 우리 순은 늘 보고 사항이 없어서 모임이 참여하는 일이 민망할 때가 많다. 아무 일도 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아서. 이번 모임에선 점점 개인화되어 가는 문화가 대세인 이때, 교회 공동체는 방향을 어떻게 잡고 가야 할지 심각한 토의를 했다. 교회는 달라야 한다는 의견과 시대와 문화를 거스르고 사람을 이끄는 건 어렵다는 주장이 맞섰다. 회의할 때 항상 느끼는 거지만 틀린 말은 없다. 다 맞는 소리를 한다. 허나 인간은 어떤 사안에든 중심을 잡을 수 없는 것 같다. 모두가 자기중심의 극치에 달해 있다. 좋은 허울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 포함. 그렇지, 그래서 모여야 하고 머리를 맞대고 회의해야 한다.
집에 오니 여덟 시다. 누룽지 끓여서 먹고 출근하는 남편을 따라 나서 또 교회에 갔다. 피아노를 쳐야겠다. 이런 여유가 넘치는 날은 피아노 생각이 간절한다. 2층의 작은 예배실. 서쪽 방향으로 창이 있어서 해가 충천인데도 캄캄하다. 이곡 저곡 코드를 눌렀다. 드럽게 늘지 않는 실력에 실망이다. 늘 똑같은 패턴 반주에 리듬감이 없고 자꾸 쳐지게 연주한다. 내 감상에 흠뻑 빠져서 치니 그러는 것 같다.
집에 걸어왔다. 다시 <골드문트과 나르치스를>를 데리고 드러누웠다. 골드문트가 또 다른 여자를 만났다. 징하기도 하여라. 졸린다. 너무 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