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이 사람이랑 살 비비며 아기 낳고 산 일이요. '절대'라고 여겼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하는, 놓아버려선 안 되는 거요. 그런데 그냥 뭐랄까, 조물주가 나한테 허락한 사람과 시간이었달까요. 절대가 어디 있겠어요. 못 살면 못 사는 거죠, 뭐."
"그 생각이 맞니?"
"훈수는 안 듣고 싶어요."
"후배 님, 맞아요. 네 말이 맞아."
"무슨 일이냐고 안 물어보네요. 고마워요. 그런데 막상 때려치우려니까 가진 게 많다는 걸 깨달았어요. 우습죠?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는데 내놓아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닌 거예요. 들고 다니는 게 아니라 몰랐어요. 금이나 다이아몬드라면 금방 알았을 텐데. 헤어지지 않는 건 사랑해서가 아니라 가진 걸 포기할 수 없어서."
"올바르게 가고 있네. 그런데 거기서 그치면 안 되고 그게 너에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야 해. 숙제야. 다음 만날 때까지 알아 와. “
전기 불판에서 삼겹살이 익는다. 여섯 식구가 둘러앉아 빠른 젓가락질로 한 점씩 입에 넣는다. 굽는 사람 손이 바쁘다. 엊그제 어머니가 담가 준 무 김치에 얹으니 환상이다. 고기를 다 먹고 돼지기름이 남은 판에 밥과 쫑쫑 썬 신김치를 넣고 볶는다. 마지막에 김 가루를 뿌리니 아이들이 숟가락으로 잽싸게 볶음밥을 떠 간다. 지성이다. "엄마, 엥겔지수가 높은 가정 중에서 우리 집이 제일 행복할 것 같은데요. 솔직히 이게 말이 안 되는 얘기지. 아빠 연봉으로 이렇게 화목하다는 게." 아들에게 맛있냐고 물었다. 까만 김이 낀 이를 드러내며 방실거린다. 맞다. 우리는 가난했지만 많이 웃었고 아이들은 학원 한번 못 다녔지만 영 멍청이는 아니게 자랐다. 설거지하며 나에게 이 행복을 빼앗을 권리가 있는지 생각했다. 남은 야채와 쌈장을 넣으려고 냉장고 문을 여니 어머니가 보낸 밤이 보인다. ‘공주 밤’이라고 크게 쓰여 있다. 삶아 식탁에 두었다. 택배를 받고 전화하지 않은 일이 생각나 핸드폰을 찾아 어머니 번호를 눌렀다. 연락이 늦었다고 너스레를 부리며 밤이랑 김치가 맛있다고 인사했다. 밤은 양이 적어 당신은 안 먹고 우리에게 다 보냈다며 잘 먹었으면 되었다고 하신다. 이혼한 며느리에겐 더 이상 택배를 보내지 않겠지?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내라는 모든 서류를 준비해 피디에프 파일로 묶었다. 전송 버튼을 누르기 전에 제대로 되었는지 공고문을 다시 살폈다. 다 맞는 것 같다. 자기소개서 작성 요령을 훑는데 ‘작성 시 본인의 성명, 학교명, 출생지, 부모 직업, 혼인 여부, 재산, 신체적 조건, 형제자매의 개인정보 등 개인 신상을 직·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은 작성금지(작성금지 사항을 작성하였을 경우는 감점 처리)’라고 되어 있다. 혼인 여부?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 자기소개서를 읽었다. 결혼한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제기랄. 다시 써야 한다. 결혼해서 애 낳고 키우며 밥해 먹고 산 일밖에 없는데 무엇으로 나를 소개해야 할지, 이것 말고 나를 이루는 구성이 뭔지 찾을 수 없다. 진실과 거짓의 중간 어디쯤, 밋밋하고 괴상한 글을 보냈다. 타이레놀 한 알을 입에 털어 넣었다. 두통이 오면 ‘뽀또’가 먹고 싶다. 바삭바삭한 크래커 사이에 치즈크림. 남편에게 가니 무슨 중한 걸 읽는지 책에 밑줄을 좍좍 긋고 있다. ”나 머리 아파. 뽀또 좀 사다 줘.“ 고개를 들어 나를 본다. 입술을 움직여 지금 바쁘기도 하거니와 밖은 너무 춥고 팬티와 러닝셔츠밖에 안 입어서 절대 나갈 수 없다고 말한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다 준다면 내게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하겠다고 했다. ”괜찮아.“라는 답을 들었다. 팔에 힘을 잔뜩 주고 방문을 닫았다. 문이 부서질 것 같은 소리가 났다.
뽀또도 안 사다 주는 게 무슨 사랑이란 말인가. 가진 것의 의미가 점점 또렷해지는 중이었는데 뽀또 때문에 다시 어렴풋 희미해, 어려운 문제가 되었다. 선배 만나는 날을 미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