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어야 하는데 이번 주는 그럴 일이 없이 지나가네. 내가 대단한 울보라 말이지. 이번 글감은 심혈을 기울여 얘기하려고 했거든. 쓸 거리가 무궁무진하니까. 그런데 뭐가 많아도 문제야. 하나 골라잡기가 너무 어렵잖아. 난 잘 울거든. 부부싸움할 때 제일 그렇고 요즘 운전하면서 '로이킴' 노래 주로 듣는데 그냥 별일 없어도 콧물까지 줄줄이라니까. 넌 안 그래? 울지 않으면 고단한 일상을 무슨 수로 버텨? 아무튼 이번 주는 단단히 작정했는데 물 한 방울이 안 나오고 쓸데없는 생각만 난다.
사실 나는 말로 하는 게 어려워. 이건 이렇고 저건 저래서 이리 저리 되었다고 정연하게 말을 못 해. 그래서 눈물부터 나오는 것 같아. "공주야, 말로 해야지 그렇게 질질 짜기만 할 거야? 그러면 사람들이 시피봐. 동생 챙기고 살라믄 야무져야지. 뚝 그쳐!" 크면서 우리 고모한테 자주 들었던 말이야. 아빠가 살았을 땐 원 없이 울 수 있었는데. 내가 입을 조금만 삐죽거려도 바로 알고 달려와 안아 줬거든. 품에서 속이 다 풀어질 때까지 언제까지고 있을 수 있었어. 그때 말로 하는 법을 알려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울면 혼나니까 어른들한테 안 들키려고 되게 노력했던 같아. 다 자거나 혼자 있을 때만 훌쩍거렸지. 뭐 아빠 없다고 그다지 서러운 일은 없었는데 보고 싶은 건 못 참겠더라고. 한 달에 두어 번은 베개며 입고 있던 티셔츠가 다 젖었다니까. 1989년 7월에 떠난 뒤로 단 한 번도 꿈에서 본 적이 없어. 진짜로. 꾸긴 하는데 만날 듯 말 듯하는 일만 겪다 깨. 그러면 꺼이꺼이 울지. 결혼하기 전까지 이런 밤이 많았어.
연애할 때 말이야, 이 남자가 얼마나 나를 많이 안아 줬게. 운다고, 웃는다고, 이쁘다고, 못생겼다고. 이유도 가지가지야. 그래서 결혼했던 것 같아. 아빠 같아서. 신혼여행 마치고 시댁에서 처음 잔 날이었어. 그날은 뭔가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그렇더라. 아버지, 어머니라고는 하는데 진짜도 아니고 가짜도 아니고 관계가 희미한 사람이랑 어떻게 잘 지내야 할지 막막하더라고. 꿈을 꾸었는데 우리 진짜 아빠가 여기에 날 보러 와서 문을 두드리는데 내가 열 수가 없는 거야. 밖에서 잡아당기고 안에서 아무리 힘껏 밀어도 안 열려. 너무 슬펐어. 난 기억이 안 나는데 자다가 소리 지르고 울었나 봐. 아침 밥상에서 우리 새로운 아빠가 "선영아, 새벽에 뭔 일 있었냐? 아빠랑 엄마랑 방에 들어가 보려다 참았다니까. 부부가 자는 델 함부로 들어갈 수가 있어야지. 준이가 때린 건 아니지? 그러면 즉시 말혀. 죽여 불라니까."라고 하더라고. 크게 웃었어. 그러고는 차츰 나아진 것 같아. 꿈도 덜 꾸고 보고 싶은 날도 줄고. 그러다 새끼 낳아 키우면서는 잊었어. 맞다, 한동안 남편도 아빠처럼 될까 봐 불안했던 적도 있었네. 이 사람 없으면 누가 날 안아 주냔 말이지. 그런데 이것도 20년 넘으니까 괜찮아지더라. 우리 남편은 나 먼저 가면 좋아할지도 몰라. 전에 '나, 죽으면 재혼할 거야? 절대 하지 마.'라고 했더니 '죽은 사람이 무슨 상관이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잠이나 자.'라고 하더라니까. 그런 말이 있다잖아. 마누라 죽으면 장례식장 화장실에서 웃는다고. 딴 여자랑 살아 볼 생각에 진짜 그럴지도 모르겠어. 그래도 나는 예의상 2년은 울려고. 그렇게 하고 안아 줄 사람을 찾아야지.
중국 소설가 '위화' 알지? <허삼관매혈기> 쓴 사람. 나 요즘 이 작가의 <인생> 읽거든. 한 번 읽어 봐봐. 눈 크고 발 작은 여자가 권했을 때 제목이 별로라 안 읽고 싶었는데 재밌다. '푸구이'라는 노인의 인생 이야기인데 아들, 딸, 사위, 손자를 차례로 잃고 늙은 소와 자기만 남아. 순서를 무시하고 죽음은 찾아오고 비참하고 남루하지만 산 사람은 살아지니까 또 사는 게 인생 아니겠니. 마지막에 푸구이의 이 말이 아려. '마음이 아프지만 때로는 아주 안심이 돼. 우리 식구를 전부 내가 장례를 치러 주고 내 손으로 직접 묻어주지 않았나. 언젠가 내가 다리 뻗고 죽는 날이 와도 누구를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말일세.' 여태, 죽은 아빠보다 살아 있는 내가 훨씬 힘들고 불쌍하다고 생각했거든. 한 번도 나랑 동생이랑 엄마를 두고 가야 하는 아빠가 끔찍하게 고통스러웠을 거란 걸 몰랐어. 아, 눈물 날 것 같아.
책을 팽개쳐 두고 남편한테 갔어. "자기야, 나 좀 안아 줘." 그런데 손을 더듬더듬하네. "아 진짜, 만지지 말고 안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