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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옹졸 Dec 19. 2024

작가 놀이 4

한 해를 보내며

 
겨울이지. 여름을 지낼 때면 더위가 영영 가지 않을까 봐 무서웠다. 봄이 이르는 것에는 의심이 없지만 겨울이 오는 사실은 믿어지지 않았다. 그 맹렬한 기운을 무엇도 이길 수 없을 것만 같다. 믿지 않았다고 닥치지 않는 겨울은 없었다. 언제나 끝은 찾아왔고 대단해서 뭐 하나는 이루고야 말 것 같던 열정도, 시간에 갇힌 듯한 징글징글한 지루함도 다 지나갔다. 마지막. 이건 사실이 아닌 것처럼 오기에 이렇게 말하게 된다. '아니, 벌써?' 교수님이 올린 공지를 한참 들여다봤다. 태어나 처음 겪는 일도 아닌데 '한 해를 보내면서'라는 문장이 쓸쓸하다.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큰데 그렇다고 다시 돌려놓으면 열심히 할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는 싱거운 마음이 뒤섞인다. 누군가에 고맙고 미안하여 자꾸 미련이 남는다.
 
오랫동안 친구라고는 국화뿐이었는데 올해 두 명을 사귀었다. 눈 크고 발 작은 여자, 눈도 작고 발도 작은 여자. 바람이 나면 이런 기분이려나. 세상에 좋은 사람이 또 있다는 것이 놀라웠고 신이 느닷없이 내려준 선물에 일 년 내내 마음이 들떴다. 태어나서 가장 진탕 놀아 본 해가 아닐지. 그러나 우린 뿌리가 덜 내린 어설픈 관계라 다음을 기약할 수 없다는 게 조금 슬프다. 내년에도 이 여자들과 아주 많이 놀고 싶다. 일을 했다. 7개월 계약직이라도 4대 보험이 들어가는 번듯한 직장이었다. 나에게 돈을 번다는 건 아주 먼 나라 이야기여서 직장 있는 사람이 가장 위대해 보였다. 그 대단한 일을 했으니 정말 선물 같은 돈과 시간이었다. 작은 일이지만 아주 멋지게 해 내고 싶었는데 그건 너무 우스운 꿈이었고 큰 사고 안 치고 남은 한 달이 마무리되길 바랄 뿐이다. 지성이가 내년엔 군대에 간다. 그러면 성가대 반주도 곧 마지막이겠다. 아들이 치는 피아노에 맞춰 노래하는 일이 감격스러웠던 덕분인지 예배가 지루한 적이 없다. 내가 배우지 못한 걸 아들에게 바라긴 했으나 큰 욕심은 아니었고 그저 어린아이가 피아노에 앉아 있는 그림을 보고 싶었을 뿐이다. <바이엘>이나 떼면 훌륭하다고 해 줄 참으로 이렇게 장대한 선사를 바라지 않았는데. 그러고 보니 손아귀에 움켜쥐려 할수록 갖기가 어려웠던 건 아닌지. 저 멀리 우주가 집이라는 남자가 그랬다. 자기는 욕심 없다고. 순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했는데 젊은 나이에 인생사 이치를 아는 사람이었다. 몇 번 되지 않은 연애의 끝은 항상 구질구질했다. 남들은 산뜻하게 잘도 헤어지는데 나는 그런 재주가 없다. 마음을 내주면 집착하고 집요하게 굴었다. 귀에 속삭이던 달콤한 사탕 같은 말들이 녹고 깨져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나에게 질려 다 떠났다. 내 것으로 삼으려 할수록 가질 수 없다는 걸 때마다 깨달았으나 고치지 못했다.

여러 사람의 발길에 차이다 차여 내 앞까지 온 전단지를 무심히 집은 탓에 글이란 걸 쓰게 되었다. 전단을 들고 찾아간 곳에 '훈이'가 있었다. "글 좀 쓰겠는데." 나는 글보다 이 말에 먼저 빠져 쓰는 일에 매달렸다. 훈이에게 실망을 주고 싶지 않아서 훈이의 마음을 얻으려고 훈이를 웃게 하려고. 훈이, 훈이, 훈이. 그를 위해 깊고 넓어져 잘 쓰고 싶었다. 어떻게 해야 잘 쓰냐고 징징대는 나에게 선배가 "황, 너를 봐. 자신을 들여다보라고. 대단한 작가보다, 니가 하는 사랑보다 너를 연구해. 그래야 깊고 넓어져."이라고 말했다. 하얀색 머리카락이 머리통을 뒤덮기 전에 이 말을 들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희멀건 국물에 건더기 몇 개 떠다니는 내면에서 뭐라도 건져 보려고 애썼다. 눈과 귀가 전과는 달라진 게 분명하다. 그러나 교훈을 깨닫고 수많은 에피소드를 담고 있어도 이걸 속에서 꺼낼 수 없어 단 한 문장을 쓰지 못한 날이 숱하다. 어찌어찌 풀긴 했지만 진짜로 하고 싶었던 얘기가 아니라 그냥 집어던지고 싶으나 노트북이 비싸서 그러지도 못하고. 구질구질하게 목매는 버릇을 여전히 고치지 못했다. 글과 훈이가 멀어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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